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04화 (204/608)

제204화

“감시라니요, 데르온?”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계에 파수꾼이 있다는.”

“파수꾼?”

데르온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해준 건 오래된 마계의 역사 한 부분이었다.

“신계에서 막 분리된 직후의 마계는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는 차원의 길도 완전히 막혀 있지 않아서 서로 왕래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승부욕이 앞선 마족 군단이 신족으로 이뤄진 천군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죠. 그것을 계기로 두 종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천마대전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처음엔 단지 신족과 마족간의 전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신족들이 죽어나가자, 그것은 곧 신계 전체의 피해로 이어졌다. 신족은 신과 정서를 교감하는 존재인지라 그들의 고통과 죽음이 신들에게 몹시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신들까지 전쟁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나빠졌다.

이후 상급신들이 수습에 나선 덕분에 간신히 진정되긴 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마족을 향한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특히 신족을 창조한 천신 이오웬의 분노가 가장 컸다.

신들은 마족의 공격성을 염려했고, 그들이 또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이에 마족들을 멸족하고 마계 자체를 소멸시키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것을 막은 건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신, 카노스였다. 마신은 신계에서도 영향력이 몹시 큰 존재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했다. 대신 마신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한 가지 합의점을 제시했다. 마족들에게 족쇄를 걸어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족쇄요?”

“예, 족쇄에 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마계에 파수꾼이 있을 거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습니다. 마신이 세운 누군가가, 배후에서 마족들의 세력을 적당히 조율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

“물론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들 중 하나라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막 그게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군요.”

즉, 마신이 직접 파수꾼 역할을 했고, 그것을 위해 루카르엠이란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얘긴가?

확실히 심심해서라는 이유보다는 이쪽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그의 말대로라면 마왕은 표면적인 위치이고, 실상은 카노스가 직접적으로 마계를 통솔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좋은 쪽이 아니라 안 좋은 방향으로. 족쇄의 목적이라면 마족들의 힘이 커지거나 발전하는 것을 쭉 방해해 왔을 테니까. 마족들을 창조한 마신이, 마계의 확장을 막는 제어 장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르온은 의중을 떠보듯 카노스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카노스는 그저 웃는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쳐다본 데르온이 더 움찔해서 황급히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저, 저희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전부 똑같은 것도 그때 한 약속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부러 동일한 특징을 두어 누구나 마족임을 알 수 있게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사살하기 쉽도록 말입니다.”

“……!”

마지막 덧붙인 말에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언젠가 루카르엠이 하소연하듯이 떠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족들이 전부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지니게 된 건 다른 신들의 요청 때문이라고 했었다. 마족을 피할 수 있도록,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통일시킨 거라고.

흔한 전설이나 민담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사실이었나 보다. 당시엔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았던 그 말이 이렇게 살벌한 의미였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알아보기 쉽다는 건 그만큼 숨기기도 어렵다는 의미였다. 그건 즉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편하게 마족을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문제의 소지를 미리 제거하면 당연히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제 생각이 맞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생각이지?”

조심스럽게 묻는 말을 카노스가 느긋하게 되받았다.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거의 긍정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데르온이 그 자리에서 곧장 무릎을 꿇은 것이다.

“죽여주십시오.”

“데, 데르온?”

나는 깜짝 놀라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카노스는 그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낼 뿐,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여 달라?”

“감히 마신의 계획을 알고도 살아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일에 방해가 되기 전에 기꺼이 죽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은혜를 베푸시어 당신의 손에 직접 이 하찮은 목숨이 거두어지는 영광을 입게 해주십시오.”

뭐야,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본래도 데르온은 어떤 상황이든 쉽게 받아들이고 잘 적응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 뿐,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의 일을 대충 처리함으로써 윗선의 명령에 반발하는 심리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왕에 대해 별로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으니 아마 내 예상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신에게는 온전히 자신을 낮췄다. 지금까지 모두를 속여 온 것이나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취급에 항의를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순순히 수긍했을 뿐이다. 그의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겠다는 말 또한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마신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힐끔 카노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데르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는 여전했지만, 내내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진 채였다. 그것만으로 그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천진난만하고 능청스러웠던 남자는 사라지고, 서늘하고 위압적인 마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웃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그가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건 이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 참, 정말 고약한 녀석들뿐이라니까.”

중얼거린 말에 데르온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카노스의 손에서 새카만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풍기는 기운이었다. 그것을 본 데르온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뭐, 소원이라면 이뤄주지 못할 건 없지. 그런데 정말로 죽어도 괜찮겠어?”

“예, 괜찮습니다.”

“정말 이렇게 죽겠다고?”

“예!”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이 결연하다. 거듭되는 대답에 카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내가 아는 데르온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걸 용납할 위인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예?”

“네 장래희망 말이야. 천마대전을 다시 일으켜 천신이랑 일대일로 싸우다, 그의 손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꿈 아니었어?”

그런 장래희망을 갖고 있었냐!

나를 비롯한 모두가 뜨악한 시선으로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그건…….”

“우와, 그동안 날 속였던 거야? 이건 좀 괘씸한데? 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 거창한 포부를 지닌 상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아닙니다! 속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긴 합니다만, 지금도 가능하면 그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긴 합니다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그냥 내 손에 죽겠다고? 어떻게 해서든 신의 손에 죽기만 하면 되는 거였구나? 데르온, 그렇게까지 죽고 싶어 했었을 줄이야. 그건 몰랐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왜 죽고 싶어 하는 게 됩니까?”

“응? 그치만 죽여 달라며. 죽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정색하고 답한 뒤 데르온은 곧장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신의 언변에 휘말려들었다는 깨달음과,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 못했단 자괴감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카노스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특유의 천진난만한 분위기도 다시 돌아왔다. 그는 능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나쁜 아이네. 죽고 싶지 않은데 왜 거짓말을 해?”

“거,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죽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하, 바보구나? 그럼 살아야지.”

“예, 예?”

“네가 날 위해서 할 일은 죽는 게 아니거든.”

가볍게 떨어진 말에 데르온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카노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해하고 있는 데르온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이제 다음은 누구지? 그쪽 꼬마 차례인가?”

그렇게 말하며 카노스가 응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나였다. 그를 지목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이사나 역시 숨을 삼키고 있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지?”

이사나의 눈이 커진다 싶더니 얼굴에서 당황하던 기색이 사라졌다. 그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카노스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그것을 본 카노스가 더 짙게 웃었다.

“정말 좋은 표정이야. 그 나이에 그런 눈을 갖기도 쉽지는 않지.”

“…….”

“좋아, 뭐든 물어봐. 그동안 속인 사죄의 뜻으로 가능한 한 뭐든 대답해 줄게.”

“……그럼 사양하지 않고 묻겠습니다.”

의외로 이사나는 움츠리지 않고 대담하게 응수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래전부터 단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신탁을……. 신탁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이사나가 물은 건 선황이 받은 신탁에 관계된 것이었다.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마신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이기도 했다. 바로 그가 신탁을 내린 장본인이었으므로.

“신탁이라……?”

“마신께서 제 아버지의 업을 알리는 신탁을 내리셨지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지은 업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가혹한 벌이 내려진 겁니까? 그리고 제 아버지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용서를 받으신 겁니까?”

그가 지니고 있던 마음의 무게를 반영하듯,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직 정황을 모르는 알리사만은 의아한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느라 바빴다.

카노스마저도 이런 분위기는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는 조금 머쓱한 듯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아아, 그거 말이구나. 뭐, 언제고 알려질 일이긴 하니 말해주는 게 낫겠지. 하지만 이걸 알면 놀랄지도 모르는데. 들어도 괜찮겠어?”

“……어떤 말씀이든 듣겠습니다.”

“진짜 충격 받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흐음, 좋아. 그럼 알려줄게. 하지만 경고하는데, 진실은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괴로울 거야.”

빙긋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지만 농담은 아닐 것이다. 이사나는 극도로 긴장한 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참혹한 진실이 떨어질까 싶어 나 또한 충격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 모든 예상을 가볍게 상회했다.

“전부 금시초문이야.”

“예?”

“신탁이고 뭐고 난 모르는 일이라고. 난 최근 50년 사이에 어느 누구에게도 신탁을 내린 적이 없거든.”

“……!”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과 함께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생각을 잇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거라곤 정말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상황을 겨우 인지하고 났을 땐 손끝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마신은 신탁을 내린 적이 없다.

그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신탁이 가짜였던 거다.

“이사나 씨!”

충격이 컸는지 이사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알리사가 옆에서 그의 몸을 얼른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카노스를 쳐다보자 그가 곧장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내가 반응하기를 기다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그 신탁이 가짜였어요?”

“내가 내린 적이 없으니 당연히 위조된 거겠지.”

“신관이 그런 짓을 해도 돼요?”

“안 되지 물론. 신관은 신의 이름을 절대 사사로이 이용하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저주를 받아 죽거나 최소한 사제의 자격을 잃게 되어 있어. 신관이라면 무조건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지.”

“하지만 대공은 멀쩡한데요?”

“응, 그러니까 신관이라면, 이라고 말하잖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바람에 의미를 이해하는 게 조금 늦었다. 불현듯 깨닫고만 진실에 나는 그대로 얼이 빠졌다.

“……대공이 신관이 아니라구요?”

그가 지닌 신의 문장도 가짜였다는 거다.

맙소사.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수명에 좋지 않은 일만 생기려는 모양이다. 온도를 느낄 리가 없는데도 주위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이사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안색이 새파랗다 못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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