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아, 역시 이건 좀 충격이 큰가?”
이사나와 알리사는 물론, 상념에 빠져 있던 시벨리우스조차 이 상황엔 넋을 잃은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카노스는 느긋하게 웃었다. 처음엔 조금 난감해하는 듯하더니, 막상 판이 벌어지자 다분히 이 상황을 즐기는 얼굴이었다.
“나 참,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엘뤼엔. 다들 너무 놀라서 굳어버렸잖아. 내가 곤란해지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우리 엘뤼엔은 심술쟁이.”
낯간지러운 타박에 엘뤼엔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타고나기를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본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였다. 그에게서 이렇게 과격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니. 충격적인 정체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새삼 그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내 이름 앞에 끔찍한 호칭 붙이지 마라. 게다가 네놈의 어디가 곤란해하고 있단 거냐?”
“아니, 이래 봬도 정말 곤란해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르온한테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고. 나름대로 그동안 완벽하게 위장해 왔었단 말이야.”
“자업자득이다.”
“응, 그건 그래.”
냉정한 타박이 무색하리만치 카노스는 상큼하게 대답했다. 그 태연한 반응에 모두가 어이없어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좀처럼 속을 읽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점은 확실히 루카르엠과 닮았다. 왜 진작 그를 연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데르온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는 걸 보니 단순히 흉내 낸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그가 루카르엠 본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정말 당신이 루카르엠이에요? 장난하는 게 아니고?”
“후훗, 장난이었으면 좋겠어?”
“그치만 루카르엠은 마계 4대 공작 중 한 사람이잖아요. 공작은 마왕의 명을 받는 존재 아니었어요? 마신이 대체 왜 마족으로 활동을?”
“음, 글쎄. 그냥 심심해서?”
천진하게 웃는 얼굴에 잠시간 말문이 막혔다. 그의 뒤쪽에서 엘뤼엔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심심하면 일을 해.” 라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노스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 진중함이라곤 조금도 찾기 힘든 모습이라 이 순간에도 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는 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카노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계속 중간계에 내려와 있어도 괜찮겠어, 엘뤼엔? 슬슬 한계일 텐데?”
그의 장난스러운 시선이 말없이 서 있던 엘뤼엔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들이 불쾌했는지 엘뤼엔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
“우후후,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벌써 서류가 몇 년 치는 쌓였을걸?”
“닥쳐. 그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싸늘하게 일갈하는 엘뤼엔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그가 신계로 귀환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신들은 중간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다고 했었다. 엘뤼엔이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강제적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상당히 오래 버티고 있는 편이었다.
초조한 기분으로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내 시선이 뜻하는 바를 읽었는지 엘뤼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헤어질 시간인 것이다.
“가는 거야?”
“그래. 이제 시간이 다 됐다.”
“그렇구나…….”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사실을 확인하니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부자로 인연을 맺긴 했지만 엘뤼엔과 나는 거의 일방적으로만 소통하는 관계다. 그가 날 찾아오지 않으면 내 쪽에선 찾아가기도, 연락을 취하기도 힘들었다. 그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지금까지 딱히 그 사실에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는데, 오늘 그의 존재감을 강렬히 확인하고 난 탓인지 새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내가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해라. 가능한 한 자주 들를 테니까.”
“그치만 엘뤼엔은…… 바쁘잖아.”
“아무리 바빠도 아들에게 내줄 시간 정도는 있다.”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엘뤼엔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거짓말을 했다. 산더미 같은 업무 속에서 시간을 낸다는 게 그의 말처럼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게 고마워서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엘뤼엔이 문득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엘, 떠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 둘 게 있는데.”
“응? 뭘?”
“내가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질문이라고 생각한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술로 만들어진 환상에 갇혀 있을 때, 엘뤼엔이 내게 몇 번이고 물었던 말이었다. 그게 단순히 그의 정체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 그의 질문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진짜 답이 무엇이었는지도.
“어, 음……. 아버지……?”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하자 엘뤼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잘했다.” 그렇게 칭찬하는 얼굴이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내 기분 역시 덩달아 따뜻해졌다(왠지 애견 훈련을 받는 것 같아 복잡한 느낌이긴 했지만).
“앞으론 꿈에서라도 다른 녀석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쁘니까.”
덧붙인 말은 지나가는 듯한 어조와는 다르게 조금 퉁명스러웠다. 뒤끝이 있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꿈속에서의 일에 어지간히도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도 상당히 불쾌해하긴 했었지.
“응, 다신 안 그럴게.”
맹세하듯 건넨 말에 엘뤼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몸에서 천천히 빛 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신전에서 봤던 마지막 때와 같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그 현상의 의미를 곧바로 간파했다. 신계로 강제 송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로군. 난 이만 가봐야겠다.”
한숨처럼 내뱉는 말에 나 역시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이 엘뤼엔이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작별의 순간의 애틋한 기분은 아주 잠시였을 뿐, 이어지는 말은 나를 빠르게 현실로 이끌었다.
“아마 어렵겠지만 카노스는 적당히 무시해라. 대다수가 쓸데없는 말들일 테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다.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패. 일이 벌어진 후엔 이미 늦으니까.”
“응, 알았……자, 잠깐.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심코 대답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치 까다로운 도구의 사용법을 알려주듯 차분히 당부 사항을 읊던 엘뤼엔이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저 간사한 놈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는 건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런 걸 알려주는 건데? 마신은 돌아가지 않는 거야?”
“저 녀석은 휴가 중이라고 했잖아. 돌아가는 건 나 혼자다.”
“그, 그래?”
머릿속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설마 마신이 이곳에 남을 줄은 몰랐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것도 많은 만큼, 당연히 엘뤼엔이 같이 끌고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리 오래 머물진 않을 테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뤼엔 역시 정작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있었다. 그가 해준 말이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않게 들리기도 처음이었다. 슬그머니 돌아보자 시선을 받은 카노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조금 전 아무렇지 않게 ‘루카르엠’이라 밝히던 때와 똑같은 얼굴이라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조금 더 시달려야 할 운명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유일하게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엘뤼엔마저 돌아간다니. 왠지 남은 시간이 순탄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드는 건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마치 불곰을 묶어둔 족쇄가 곧 풀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 기분이야 어쨌든, 엘뤼엔은 곧 새하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가 카노스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보였지만 그 눈빛에 담긴 의미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다만 카노스만은 알아들은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은 내가 의식이 없을 때 이미 카노스와 대면했겠지. 같이 돌아가지 않는 것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마신이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 확신하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흩뿌려진 빛의 잔상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흐트러졌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나는 어느 때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부터 가장 큰 골칫덩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야~ 이런 걸 놀랄 노 자라고 표현한다지? 저 얼음 동상 같은 엘뤼엔이 아들을 들인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친히 찾아와서 살뜰히 챙겨주기까지 할 줄이야. 이래서 뭐든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바로 그 골칫덩이가 말했다.
뻣뻣한 목을 억지로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노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가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얘기를 계속해 볼까?”
* * *
“무슨 얘기를 해요?”
“뭐든. 나한테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경계하며 묻는 말에 카노스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기운차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꼭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듯한 모양새라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할 얘기? 물론 할 얘기는 많긴 했다. 당장 조금 전에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대화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 사람이 정말 그 루카르엠이었단 말이지.
나는 차분히 그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살폈다. 엘뤼엔과 함께 있을 땐 잘 몰랐는데 혼자 있으니 존재감이 정말 뚜렷하다. 압도적으로 큰 키도 그렇고, 몸 전체에 감도는 기류가 사나워서 저절로 시선을 끌었다. 그래선지 부드러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다가서기 힘든 느낌이 강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전신이 전부 흉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딱히 내세우려고 하는 모습이 없는 것을 봐선 그냥 타고난 기운인 것 같았다.
확실히 마신은 마신이구나. 시선이 마주 닿기만 해도 그에게서 전해지는 압력 때문에 손발의 감각이 저릿했다. ‘엘’이나 루카르엠도 강하긴 했지만 이렇게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들을 두고 마신을 연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창피해할 일은 아닐 거다. 응, 그렇고말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위안하며 지난 그의 모습들을 돌아보았다. 엘도 그렇지만, 매시간 불쑥 튀어나와 나를 약 올리고 귀찮게 굴던 마족이 마신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내 이마에 있는 신의 문장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더라니. 그저 단순한 흥미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때 내가 엘뤼엔의 양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 시간 이후로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설마 그때부터 이런 장난을 준비했었던 건 아니겠지. 제법 가능성이 높은 생각이라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자, 그래서 질문은?”
“…….”
바로 눈앞에서 카노스의 검은 눈동자가 불쑥 떠올랐다. 그가 얼굴을 바짝 들이민 것이다.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에서 어떻게든 질문을 받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됐지, 왜 꼭 질문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불만스럽게 응시하는 내 눈길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루카르엠일 때도 그는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정체를 드러낸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노려보길 그만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질문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진지하게 대답하지도 않을 거잖아요.”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루카르엠으로 활동한 이유가 심심해서라면서요.”
볼멘소리로 대답하자 카노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왜라뇨!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성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신은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거든요? 마신이라면 특히 더 바쁠 텐데 심심하다는 게 말이 돼요?”
“오, 그건 확실히 일리 있네. 할 일을 안 해서 심심한 거라고 하면 어때?”
“지금 장난해요?”
“흐음~ 이것도 안 통하나? 그럼 네가 생각하기엔 뭐일 것 같아?”
그걸 내가 알면 애초에 질문을 했겠냐!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머리를 짚었다. 루카르엠일 때도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 이 남자와의 대화는 늘 스무고개를 하는 것 같아서 정신건강에 해롭다. 생길 리도 없는 두통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엘뤼엔이 때리라고 했을 때 모른 척한 대라도 칠 것을. 내가 왜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까. 배가 떠난 뒤에 후회한다더니 내가 바로 딱 그 짝이다. 이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건가 보다(?).
“저희를 감시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때 우리의 대화를 가르고 딱딱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비장한 음성의 주인은 바로 데르온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서서 카노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 받은 충격은 많이 가신 듯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