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02화 (202/608)

제202화

“그럼 엘은?”

소란이 멈춘 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음성 때문이었다. 돌아본 곳엔 시벨리우스가 망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시벨…….”

“정말 아무도 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단지 나 혼자만 그를 알고 있는 건가? 그가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럼 내 기억들은 전부 다 뭐지? 지금도 선명하기만 한 엘의 모습은?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에 엘뤼엔이 카노스를 누르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여전히 불쾌해 보였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존재했던 사람일 수도 있지.”

대답한 사람은 카노스였다. 뜻밖의 말에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벨리우스 역시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내가 변장한 엘은 네 기억을 본 따 만들어 낸 거라고 했잖아? 허구로 만들어진 기억이 그 정도로 자세하진 않거든. 위화감이 들거나 허술한 부분도 없었고, 연결되는 상황마다 전부 빈틈없이 정교했던 걸 보면 꿈이나 환상 따위는 확실히 아니야. 그렇다면 그 기억 속의 존재 역시 실존했단 말이겠지.”

“하지만 조금 전엔 분명…….”

“물론 그게 사실이라고도 확신할 순 없어. 주신이 정한 순리라는 건 몹시 신비해서, 가끔은 신들조차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특히 시공간에 얽힌 것들은 대부분 그래. 그 대신 분명한 규칙 하나는 있어. 허용되지 않는 건 아무리 강렬해도 결국은 지워버리고 만다는 거야.”

“무슨……말인지 모르겠어.”

“그럴 거야. 이건 어느 누구도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빙긋 웃어 보인 후 카노스는 그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요컨대 네가 아는 엘이 정말로 실존한 인물이었다는 전제하에, 그에 관해선 두 가지 경우로 정의할 수 있어.”

“두 가지?”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였거나, 있어선 안 되는 존재였거나. 어쨌거나 둘 다 허용이 안 되는 기록이지. 그래서 세상이 지웠을 거야.”

“그런…….”

“그러니 그는 애초에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아. 네게는 안 된 말이겠지만.”

단호하게 떨어진 음성에 시벨리우스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조금 전처럼 흥분해서 덤벼들진 않았다. 그 대신 애써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난 다시금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카노스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대견하다는 듯이 웃었다. 첫인상만큼이나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분위기라 나는 새삼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만 보면 그가 지금까지 우리를 농락하고 심한 장난을 친 사람이란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해, 엘뤼엔?”

“뭘 말이지?”

카노스가 싱글거리며 묻는 말에 엘뤼엔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경계하는 눈빛이다. 그 모습만 봐도 엘뤼엔이 그를 전혀 신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노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과거의 엘 말이야. 그가 정말로 존재한 사람이라면 네 계약자인 것도 사실이라는 소리잖아? 만약 어떤 상황으로 인해 그의 존재가 지워졌고, 저 성마만이 봉인된 영향으로 기억을 온전히 유지하는 거라면? 그럼 굉장한 반전 아니야? 결국 순순히 기억을 잃은 네 쪽이 오히려 바보라는 얘기지.”

“헛소리.”

“아니, 이거 의외로 중요한 부분이다? 네가 지금의 엘퀴네스를 아들로 삼은 게 바로 그로 인한 영향일 수도 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건 내내 날 괴롭혀 왔던, 내가 가장 신경 써 왔던 부분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다시 엘뤼엔의 애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반응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조마조마한 심정이 무색하리만치 엘뤼엔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딱히 아무래도 상관없다. 영향은 단지 영향일 뿐. 설령 그 때문에 내가 엘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이 맞다 해도, 그건 단지 계기에 지나지 않아.”

“오우, 굉장히 단호한데?”

“당연하지. 난 엘을 내 아들로 삼은 이후에 더 소중히 여기게 됐다. 그 가치는 그만의 것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확신해.”

떨어지는 대답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박하사탕처럼 청량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소중하다고, 내가 지닌 가치는 나만의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엘뤼엔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그 무엇보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바로 내 아버지가.

뺨이 달아오른 게 나 스스로도 확연히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지 않을까. 슬쩍 두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데 빤히 들여다보는 검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한 카노스였다. 내가 움찔하자 그는 푸흐흐,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어머나, 어머나, 소중하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부끄럽잖아~”

“닥쳐. 누가 네놈이 소중하다고 했나? 어쨌든 내 아들을 자극하는 건 이제 그만두지그래. 지금까지 괴롭힌 걸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지?”

“냐하하, 눈치챘어?”

“네 녀석의 수작이야 뻔하지.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질 낮은 교란을 시도하다니. 그 도전 정신만큼은 높이 사주마.”

파지직, 엘뤼엔의 손에 새하얀 빛이 맺혔다. 언젠가도 본 적이 있는, 신력으로 만든 빛의 구(球)였다. 아, 저거 맞으면 되게 아픈데. 속으로 중얼거리기 무섭게 카노스가 재빨리 뒷걸음 쳤다. 이미 그의 얼굴에 서린 장난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 아니. 잠깐 기다려. 난 딱히 네 아들을 괴롭히려고 했던 건 아냐. 정말이야. 누차 말하는 거지만 원래 주술에 걸리게 할 생각도 없었어. 정말 걸리는 바람에 나도 진짜 당황했다니까? 난 단지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무슨 확인?”

“인간 같은 정령왕이라니 신기하잖아. 엘퀴네스로 태어났으면 성격이 좀 더러워야 정상인데 애가 너무 온순한 것도 그렇고. 그게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타고난 품성의 영향도 있는 건지 알아보고 싶었어. 감정의 밑바닥까지 몰아붙이면 본성을 좀 드러내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그딴 짓을 벌였다?”

“아니, 난 그냥 화를 낼 줄 알았지. 보통은 건드리면 발끈하게 되어 있잖아? 심지어 자존감이 높은 정령왕이라면 더더욱. 설마 혼자 속으로 다 삭이고 숨어들어 가는 쪽을 택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만 해도 돼?”

“뭐지?”

“네 아들 좀 귀엽네. 응. 괴롭히는 재미가 있어.”

“……변명은 그걸로 끝인가?”

“아악! 잠깐만! 거긴 아까도 때린 곳……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니까!”

다시금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구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마신인데 저렇게 대해도 괜찮은 걸까. 뒤늦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미 만류하기에도 늦은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데르온은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신이 중간계에 있는 건 휴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에게도 휴가라는 것이 주어지는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아무리 신이라 해도 매일같이 안에 틀어박혀 일만 할 리는 없었다. 그 언젠가 엘뤼엔의 궁처에서 봤던 서류의 양을 생각한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엔 남모를 비극이 존재했다. 주인이 부재중인 동안에도 업무는 계속 들어오는데, 마신이 이걸 전부 형벌의 신전― 즉, 엘뤼엔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고 왔다는 것이다. 엘뤼엔의 무자비한 응징에는 그로 인한 분노도 다분히 섞여 있었다. 일을 전부 넘긴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틈을 타 아들을 골탕 먹이고 있었으니 누구라도 분노할 일이었다.

“마신이 이런 분인 줄 몰랐어요.”

사태가 진정된 후 건넨 첫마디에 카노스는 빙긋 웃었다. 그의 얼굴 가득 파랗게 자리 잡은 멍 자국들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미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누가 신 아니랄까 봐 경이로운 재생력이었다.

“예상보다 더 근사하지?”

“하하……. 네, 어떤 의미에서는요.”

“좋은 쪽? 나쁜 쪽?”

“으음, 좋은 쪽이에요.”

“어라, 정말?”

“왜요?”

“평가가 꽤 후한데? 지금까지 겪은 일들만 봐도 내게 별로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대답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즐겁다는 듯이 웃는 얼굴을, 나는 다시금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동안 겪은 일들이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전부터 마신에겐 좋지 않은 감정들만 있었다. 그가 내린 신탁 때문에 이사나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었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신과 관계된 자들에게 지독한 짓도 여러 번 당했다. 대공이 벌이고 있다는 끔찍한 인신 제사에도 깊이 관여된 존재였다. 싫어할 이유를 꼽자면야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가 밉지 않았다.

해맑게 웃는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지닌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실 경계하고 싶어도 엘뤼엔에게 얻어맞던 모습을 생각하면 도무지 위험한 존재로 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닌 듯, 이사나 역시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넘어가지 마라. 이건 네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나마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은 건 바로 이어진 엘뤼엔의 경고 때문이었다. 흠칫 놀라 카노스에게서 시선을 떼자 엘뤼엔이 잘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기엔 원래 사람을 현혹하는 힘이 담겨 있지. 마신은 그 힘을 가장 진하게 지니고 있는 존재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방심하면 그대로 홀리게 돼.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게 좋아.”

그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노스는 자신을 병균 취급한다며 투덜거렸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에이, 분위기 좋았는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모습에 신경이 곤두섰다. 처음부터 내가 호감을 보일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 반응에 기뻐한 것처럼 보였던 것도 의도했던 걸까? 새삼 방심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마신과 엘뤼엔의 관계는 의외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투닥거리고 있는 두 상급신을 힐끔 보았다. 언젠가 엘뤼엔이 마신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기도 하고, 최근 교단끼리 대치하고 있는 상태기도 하니 상당히 험악하거나 전혀 교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둘의 모습은 잘 알고 지내는 것만이 아니라 꽤 스스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다소 폭력이 동반되긴 하지만 그건 자초한 결과니까 모른 척하자). 왠지 이렇게 말하면 엘뤼엔이 질색 할 것 같아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겠지만.

“근데 절 언제부터 알았어요?”

“응?”

“잠복하던 중에 저에 대해서 알았다고 했잖아요? 엘로 접근하기 전에 이미 만났단 소리로 들리거든요. 어디서 누구로 잠복했던 건가 해서…….”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에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고개를 들자 카노스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내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엘뤼엔에 의해 가로막혔다.

“말해.”

“으음, 전부 다?”

“그래, 전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좀. 여기 데르온도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가 난처한 얼굴로 데르온을 의식해서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뜻밖에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데르온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엘뤼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니, 뭐. 생각해보니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네. 그래, 말할게. 다 말하면 되잖아.”

카노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선선히 항복 표시를 했다. 저항은 일찌감치 단념한 기색이었다.

“후,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나도 내 할 말은 해야겠어. 솔직히 나도 좀 억울하다고. 내가 장난을 심하게 친 건 맞는데, 그냥 무작정 일을 벌였던 건 아니거든? 나름대로는 미리 배려도 했어.”

“잘도 배려했겠군.”

“정말이라니까? 엘, 내가 한 말 기억해?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었지? 의심하는 순간 너의 상냥함이 독이 되어 돌아갈 거라고 말이야.”

“네? 아, 네.”

“거봐. 난 제대로 경고했다니까?”

카노스가 보란 듯이 나를 가리키며 위풍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설마 그게 이런 뜻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점에서, 딱히 도움이 된 경고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말을 한 건 엘이 아니라…….

“루카르엠이 했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씩 웃었다. 의미심장하게 휘어진 검은 눈동자에 가슴 안이 덜컥 내려앉았다. 딩동댕, 어디선가 실로폰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뭐, 그런 거야.”

내가 한 생각을 못 박는 것처럼, 카노스가 고개를 느긋하게 끄덕였다. 그 의미를 깨닫는 데까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파악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주하게 된 진실 앞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루카르엠이……당신이었다고요?”

“쿠, 쿨럭! 쿨럭, 쿨럭! 쿨럭! 컥! 커억!”

뒤편에서 데르온이 미친 듯이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해낼 것 같은 기세다. 그 심정이 처절하게 공감되는 한편으로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그의 상태가 몹시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나 역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감각에 정신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도, 심지어 엘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조차 이보다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한동안 우리를 줄기차게 따라다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그 얄미운 마족의 정체가 마신 카노스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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