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꿈처럼 아늑하던 분위기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시벨리우스의 우렁찬 고함 소리 때문이었다.
“자, 잠깐 기다려! 엘을 모른다니 그럴 리가 없어! 전부 거짓말이야! 그럼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일들은 다 뭐지? 내가 아는 엘은?”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맞아. 그럼 엘은 뭐지? 고개를 번쩍 들고 쳐다보자 엘뤼엔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 난 누군지 전혀 모르겠군. 그게 정말 존재했던 인물이긴 한 건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얼마 전에 엘과 재회도 했고, 지금까지 쭉 같이 다녔어! 다들 내 말이 맞지?”
그의 질문에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반응을 확인한 시벨리우스가 의기양양해져서 소리쳤다.
“그것 봐!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엘이 현실에 나타날 리도 없잖아? 일단 엘을 만나 보고 나서 얘기해! 그를 보면 기억이 날지도……!”
“아아, 그거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군. 이미 만났으니까.”
“뭐?”
뜻밖의 대답에 놀란 사람은 시벨리우스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당황해서 엘뤼엔을 쳐다보았다. 이미 엘을 만났다니. 지금까지 그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를 혼란에 빠트린 엘뤼엔은 정작 무슨 문제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들었나? 네가 나설 차례인 것 같군. 뭐라고 해명을 해보시지그래, ‘엘’?”
“……!”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엘뤼엔이 응시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은 엘이 아니었다. 보이는 건 흑발을 늘어트린 남자의 훤칠한 뒷모습이었다. 조금 전 엘뤼엔에게 얻어맞은 사람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엘……?”
시벨리우스와 일행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을 부르며 바라본 곳에, 그를 전혀 연상할 수도 없는 엉뚱한 남자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발의 남자는 어디론가 가려다 멈춘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뤼엔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엘뤼엔은 전혀 웃지 않았다. 안 그래도 흉흉한 눈빛만 더 싸늘해졌을 뿐이었다.
엘뤼엔이 서늘한 눈짓을 보내기 무섭게, 흑발의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오랫동안 학습된 것처럼 숙련된 동작이었다. 하지만 엘뤼엔은 흡족해하기보다 오히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또 때리는 건 아니겠지. 조금 전 엘뤼엔이 다짜고짜 남자를 구타했던 것이 떠올라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전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일행들도 조심스럽게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엘뤼엔과는 어떤 관계인 거지? 상급신인 그를 편하게 대하는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존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받는 대우가 워낙 형편없어서 정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엘뤼엔이 그더러 원흉이라고 지칭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긴 했지만 그 또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긴 힘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흑발의 남자는 난처한 듯이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천성이 고민을 오래 하는 편이 아닌 듯, 곧 그의 얼굴 가득 헤픈 웃음이 떠올랐다.
“냐하, 모두들 안녕? 달콤한 꿈에 취하기 좋은 밤이야. 나와 같이 춤이나 한 판…….”
“닥치고 제대로 얘기해.”
이번에도 엘뤼엔의 살벌한 음성이 그의 발랄한 인사를 가로막았다. 흑발의 남자는 잠시 입술을 삐죽였다가(직후 엘뤼엔이 살벌하게 노려보자 다시 냉큼 웃었지만) 짧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소개가 많이 늦었군. 다들 내가 누군지 몹시 궁금하겠지? 그래, 다 이해해. 갑자기 나타난 이 잘생긴 남자가 대체 누구인가 싶겠지. 뭐, 딱히 잘생기지 않았다고 여겨도 상관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 물론 매우 의심스러운 취향이라고 확신하지만.”
“너 계속 헛소리하면…….”
“알았어, 알았다니까. 나 참, 우리 엘뤼엔은 성질이 너무 급해서 탈이야. 그렇게 화만 내면 나처럼 된다?”
“죽고 싶은 건가?”
“에에이, 농담이야, 농담. 하여간 금방 정색하긴. 아무튼 시간을 너무 끌었네. 이쯤에서 정식으로 인사할게. 난 카노스라고 해.”
부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순간 들려온 이름에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때 털썩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데르온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은 듯한 모양새였다. 부릅뜬 눈이며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시기상 남자의 이름에 반응한 모습이라 나는 조금 긴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침착한 데르온이 저렇게 놀랄 정도라니. 애초에 평범한 사람일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존재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행동이 가장 두드러졌을 뿐 다른 사람들도 상태가 거의 비슷했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사레가 걸린 듯 계속 기침을 내뱉는 중이었고, 시벨리우스는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름인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엘뤼엔과 함께 나타난 걸로 봐선 그 역시 상급신일 가능성이 컸다. 신들 중에 카노스라는 이름이……어? 잠깐만, 카노스? 카노스라고?
“……마신 카노스?!”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등골이 쭈뼛 섰다. 경악해서 소리치자 흑발의 남자가 생긋 웃었다.
“정답! 참 잘했어요.”
“……!”
말도 안 돼! 정말 저 남자가 마신이라고?
설마 정말로 긍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다른 사람들도 새삼 충격 받은 듯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져 있었다.
“어, 어떻게 이곳에 마신이…….”
언젠가는 만나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확인하고 싶은 것들도 참 많았는데 막상 눈앞에 있는 남자가 마신이라고 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후후, 놀랐구나? 그러고 보니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인가? 초면은 아니지만 만나서 반가워.”
멋대로 성큼 다가온 흑발의 남자― 아니, 마신 카노스가 내 손을 붙잡고 상하로 마구 흔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다가 흠칫 놀라서 뿌리쳤다. 무례하다고 여길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얼굴은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고 호의를 담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카노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지금까지 마신이라고 하면 그저 험악하고 무섭게 생긴 모습밖에 상상하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준수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 당황스러웠다. 생김새도 그렇지만 말투나 성격 또한 예상과는 굉장히 많이 달랐다. 어? 잠깐, 그런데 초면이 아니라고?
“……언제 저희와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는 분명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이미 서로 만난 적이 있단 뜻이다. 내 질문에 카노스는 잠시 묘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난 적이 있었지.”
“그, 그래요? 어디서요?”
학술원에 있던 마신교 관련자들 중 한 명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전? 딱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어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며 카노스는 생글 웃었다.
“누군지 한번 맞춰 봐.”
“네?”
“모르겠어? 별로 어렵지는 않을 텐데. 힌트를 줄까? 조금 전에 엘뤼엔이 날 뭐라고 불렀게?”
재밌다는 듯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식은땀이 흘렀다. 엘뤼엔이 뭐라고 불렀냐니. 그거야…….
“…….”
결론을 도출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마신이 끼어든 건 ‘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엘뤼엔은 엘을 이미 만났다고 했고, 뜬금없이 그를 돌아보며 해명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엘이라고 불렀지.
“설마…….”
나는 눈앞에서 웃고 있는 마신을 바라보며 신음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믿고 싶지 않은데, 그것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아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신은 내 기분을 배려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맞아, 내가 엘이었어.”
“……!”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말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엘이라니. 그가 엘이었다고? 그럼 진짜 엘이 아니었단 건가? 4천 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건? 그게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엘이 가짜였다니. 이제야 원흉이라는 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엘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진 상황이었는데, 그의 고백으로 인해 완전히 결론이 내려진 느낌이었다. 어디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형 폭탄을 터트린 주제에 카노스는 홀로 태평해 보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장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돼!”
그 순간 누군가 앞으로 튀어나와 마신의 멱살을 붙들었다. 얼굴을 가득 일그러트린 시벨리우스였다.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이 충격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터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번뜩였다.
그 행동에 데르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신은 마족들의 창조주이고, 데르온은 바로 그 마족의 일원이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신에게 함부로 구는 모습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이봐! 감히 마신께 무슨 짓이야!”
“닥쳐!”
데르온이 달려들자 시벨리우스는 거칠게 그를 밀쳐냈다. 평소였다면 힘에서 밀릴 리가 없을 텐데, 지금은 시벨리우스가 심하게 흥분한 탓인지 예상보다 쉽게 떨어져나갔다. 데르온이 다시 다가서지 못한 건 카노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카, 카노스 님!”
“괜찮으니 물러서라, 데르온. 나한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
카노스의 말에 데르온이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카노스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단 사실에 감격한 것 같았다. 반대로 시벨리우스는 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그는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고 집요하게 카노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엘이었다고? 그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엘이, 진짜 그가 아니라 네가 연기한 가짜였다고? 그걸 날더러 믿으란 거야?”
험악하게 다그치는 말에 카노스는 멱살이 잡힌 와중에도 느긋하게 웃었다.
“글쎄, 네가 믿지 않든 말든 딱히 상관없는데?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거짓말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엘일 리가 없잖아! 그가 가진 능력도, 성격도, 심지어 사소한 말투와 표정조차도! 전부 내가 기억하는 엘과 똑같았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그 엘은 네 기억에 있는 모습대로 구현한 거니까.”
“……뭐?”
“나 정도 되는 신이면 남의 머릿속쯤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거든.”
그 순간 눈앞에서 카노스의 모습이 ‘엘’로 변했다. 입고 있는 옷, 머리 모양, 착용한 무기까지 전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하고 있던 엘의 모습 그대로였다. 허를 찔린 듯 움찔거리는 시벨리우스를 향해 금발의 엘이 빙긋 웃었다.
“내가 연기한 엘은, 네가 알고 있는 엘의 모습을 따와서 만들었단 소리야. 그러니 당연히 네 기억에 있는 모습이랑 똑같을 수밖에.”
“…….”
무거운 정적과 함께, 멱살을 잡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손이 힘없이 내려졌다. 비틀거리며 한 발짝씩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그의 모습이 위태롭기만 했다. 결국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 시벨!”
놀라서 다가가려는데 누군가의 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엘뤼엔이었다. 그는 내게 고개를 저은 다음, 서늘한 시선으로 시벨리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조금은 알아들었겠지. 내가 지금 널 살려두는 건 단지 너 역시 저 망할 놈의 장난에 휘말린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결코 네 행동을 용납해서가 아냐.”
“장난……?”
“그래, 장난.”
무심히 응시하는 눈빛 아래 차가운 미소가 더해졌다.
“신 중의 신이라는 마신 카노스는 성격이 괴팍해서 호기심을 악질적으로 발휘하기로 유명하지. 전부터 그는 내가 양자를 들였다는 소문을 듣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될까 봐 철저히 감추고 있었는데 잠복하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된 모양이더군. 변장해서 접근한 것이며, 이 던전에 깔린 주술까지 모두 내 아들을 궁지로 몰아가기 위한 놈의 작품이었다. 넌 그 계획에 보기 좋게 이용당한 거고.”
설명을 들은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 역시 아연한 심정으로 카노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이었던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가 정말 엘로 변장해 있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설마 던전 안에 있던 주술들까지 전부 마신의 장난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그 모든 것들이 날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던전에 진입한 순간부터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고초들이 떠오르자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일행들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마지막의 환각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전에 겪은 일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게 힘들었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에 비난이 서리자(심지어 데르온조차도) 카노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심하다, 엘뤼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악당이라도 된 것 같잖아.”
“악당? 그 정도면 차라리 귀엽기나 하겠군. 넌 그냥 악(惡)이다. 구제할 길도 없는 악 덩어리 그 자체.”
“우와, 정말 너무하네. 난 그냥 던전에 있던 기존 함정들을 아주 살짝 손본 것밖에 없거든?”
“살짝 손을 봐? 정령왕의 정신까지 무너트리는 주술을 깔아둔 게 말인가?”
“아니, 정말로 조금이었어. 단지 그 전에 정서를 심하게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그 정도의 주술에도 쉽게 걸려들게 만든 것뿐.”
“……그래, 넌 죽고 싶다는 말을 아주 길게 돌려서 하는 재주가 있었지.”
음산하게 중얼거린 엘뤼엔이 카노스의 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카노스는 과장되게 켁켁거렸고, 그 모습에 발끈한 엘뤼엔이 더 강하게 그의 목을 졸랐다. 저러다 정말 죽이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엘뤼엔이 머리끝까지 화난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차마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이번만은 데르온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