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00화 (200/608)

제200화

“으으…….”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그를 얼른 부축했다.

“시벨!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으응? 엘? 엘이야?

내가 악몽에서 깼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벨리우스 역시 바로 정신을 되찾진 못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동안 그의 흐린 눈동자에 차츰 초점이 잡혔다. 이윽고 나를 확인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훈이었군. 미안.”

뚜렷한 경계선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서운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속내를 한 번 털어놓은 탓인지 예전보다는 나를 대하는 시선이 부드럽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이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응, 조금 어지러운 걸 빼면 아무렇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다들 한곳에 있네? 우리들 전부 다 흩어졌던 거 아니었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벨리우스가 근처에 누워 있는 일행들을 발견하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뤼엔의 말대로 주술에 걸렸을 때의 상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의식을 차렸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데르온, 어리둥절해하는 이사나에 이어 알리사까지 눈을 뜨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다소 멍해 보이는 것 외에 다들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다들 괜찮아?”

일행들은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들었어도 아직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기운을 차린 데르온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주술에 걸렸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물의 왕께서 주술을 푸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이요?”

반문하는 데르온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시벨리우스도 그도, 아직 우리들 외의 다른 존재는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엘은?”

그때 일행들을 돌아보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 사이에 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불쑥 다가온 누군가가 시벨리우스를 끌어내 벽으로 던지는 게 아닌가!

쿠웅!

“허억!”

“뭐, 뭐야!”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요란한 소음에 아직 비몽사몽하고 있던 일행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 역시 깜짝 놀라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도 당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이런 무식한 일을 벌인 사람의 정체가 가장 뜻밖이었다. 화사한 금발을 흩날리고 있는 미형의 남자. 바로 엘뤼엔이었던 것이다.

“엘뤼엔?!”

“쿠, 쿨럭! 쿨럭! 뭐, 뭐야!”

거의 처박히다시피 날아간 시벨리우스는 의식을 잃진 않았지만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냈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언젠가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라피스도 이런 일을 겪었더랬지. 시벨리우스 역시 그때의 라피스만큼이나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반대로 엘뤼엔의 얼굴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네가 깨어나길 기다렸지. 그동안 잘도 내 아들을 갖고 놀았더군.”

“대체 무슨 말을…….”

느닷없이 공격을 당한 것에 분노한 듯 시벨리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정작 엘뤼엔과 마주하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

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벌려진 입술 사이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느끼고 있을 충격을 이해했다. 그에게 엘뤼엔은 이미 소멸한 줄 알고 있던 과거의 정령왕이다.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심정일 테니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뭐, 뭐야. 너……. 설마……엘퀴네스?”

부릅뜬 시선이 엘뤼엔의 모습에서 못 박힌 듯 떨어지질 않았다. 한참 만에 터진 질문에 엘뤼엔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시벨리우스는 이미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헐떡였다.

“마, 말도 안 돼. 너 엘퀴네스 맞지? 맞아! 틀림없어! 그 얼굴은 분명……!”

“날 본 적이 있나?”

“본 적이 있냐니! 엘퀴네스잖아?”

“엘뤼엔이다.”

“……뭐, 뭐?

“난 엘뤼엔이라고 했다.”

그 말에 대한 반응은 정작 다른 곳에서 나왔다. 데르온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친 것이다.

“엘뤼엔? 서, 설마 형벌의 신 엘뤼엔?”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일인지 데르온은 소리친 즉시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그래 봤자 이미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진 뒤였지만 말이다. 엘뤼엔이 힐끗 시선을 보내자 데르온은 마비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족들이 엘뤼엔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그가 꺼낸 말의 파장은 몹시 컸다. 말 그대로 신이 눈앞에 강림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물론, 시벨리우스 역시 얼빠진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 신이라고? 형벌의 신 엘뤼엔? 하지만 그 얼굴은…….”

“한때 엘퀴네스이긴 했지.”

“……여, 역시! 그렇다면!”

“그런데 그게 너와 무슨 관계가 있지?”

“뭐?”

멈칫한 시벨리우스를 보며 엘뤼엔은 피식 비소를 흘렸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미 소멸한 선대에게 미련이 참 많기도 하군. 이렇게 멍청한 놈들을 연달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우, 웃기지 마! 누가 네 녀석이 반가워서 이러는 줄 알아? 난 그저 엘이…….”

“엘이 뭐?”

“큭!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 소멸해서 그대로 사라진 것도 아니고 신이 됐다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서 대체 그동안 뭘 한 거야! 엘이 4천 년이나 갇혀 있는 동안 찾아볼 생각도 안 하다니! 너무하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 아들이 언제 갇혀 있었다는 거냐?”

“뭐? 아, 아들?”

“그래 내 아들 말이다. 여기에 엘이 내 아들 말고 또 누가 있지?”

냉소가 흐르는 얼굴로 그가 나를 가리켰다. 엘뤼엔이 왜 이러는 거지? 시벨리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조금 당황해서 그와 시벨리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는 참인데 엘뤼엔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니 입 안이 더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 역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곧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 뭐야. 이제야 알겠군. 그러니까…… 지금의 엘퀴네스를 네 아들로 삼았다 이거지? 그래서 이제 진짜 엘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진짜 엘이라…….”

“모른 척하지 마! 네가 엘과 닮은 가짜를 만들어 냈잖아! 결국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지? 엘 대신 그를 아들로 삼으려고! 네 그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몇 사람이 피해를 입은 줄……!”

“……그래, 네가 멍청하게 그 말에 넘어가서 내 아들을 괴롭혔다는 얘긴 들었지.”

“뭐?”

그 순간 시벨리우스가 목을 감싸 안은 채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뱉었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그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멱살을 잡아서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누가 가짜라고? 누가 누구를 대신해? 한 번 더 내 앞에서 지껄여 보시지.”

“큭! 커윽! 너……! 너어!”

부릅뜬 눈에 새빨간 핏줄이 섰다. 바닥에 닿지 않은 다리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오히려 숨이 더 가늘어지고 있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 강하게 압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칫하면 사람을 잡을 기세라 나는 급히 엘뤼엔을 만류했다.

“엘뤼엔! 뭐 하는 거야! 그만해!”

“끼어들지 마라, 엘. 지금도 충분히 봐주고 있는 거니까.”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벨리우스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정말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배려(?)가 고맙게 느껴질 리는 없었다. 주저앉아 한동안 숨을 몰아쉬던 시벨리우스가 눈앞에 선 엘뤼엔을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엘뤼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기체를 응시하듯 아무런 감정이 없는 시선이라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이어진 질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단 묻겠는데, 넌 대체 누구냐?”

“……뭐?”

툭하고 내뱉듯 건네진 엘뤼엔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수많은 전개를 예상해봤지만 이것만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 모른다고?”

“난 원래 관심 없는 녀석을 기억에 담아두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넌 정말 모르겠더군. 너도 그렇고, 네가 말하는 그 엘이라는 인간도.”

덧붙여진 말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엘이 누군지 모른다니. 지금 그렇게 말한 게 맞는 건가? 굳어진 나만큼이나 시벨리우스는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렇다 쳐도, 엘은 네 계약자였잖아? 어떻게 계약자를 잊을 수가 있어?”

“잊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게 과거의 기억이란 묻어두는 것뿐, 잊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인간 계약자라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

“하지만 모른다며!”

“그래, 모른다. 그런 계약자는 없었으니까.”

“……!”

흡, 하고 짧은 숨이 터졌다. 두 눈을 부릅뜬 시벨리우스를 보며 엘뤼엔이 차게 웃었다.

“왜 놀라지? 내 아들이 알려주지 않았나?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은 그가 계약한 꼬마가 처음이라고 말이야. 설마 들어본 적 없다고 하진 않겠지.”

“그, 그런……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내 기억으로는 분명……!”

“네 기억 따위엔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너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만은 확실히 말해두지. 난 인간에게 소환된 적도 없고, 계약하지도 않았다.”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단호한 음성이 울렸다. 한순간에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시벨리우스도, 나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에게 소환된 적도 없고 계약하지도 않았다……라고? 그럼 엘은 뭐지? 그가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은?

나는 한참을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내 얼빠진 표정을 본 엘뤼엔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책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확인을 받았어야지. 바보같이 왜 마냥 휘둘리고 있었던 거냐.”

“그, 그치만……맞다고 할까 봐…….”

“그게 겁이 나서 처음부터 묻지도 않았다? 내가 너한테 상당히 신용이 없는 아버지인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아니, 그치만 이상하긴 했잖아. 그날 처음 본 것에 불과한 나를 갑자기 아들로 삼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한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아서…….”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잖아. 그게 이유가 되지는 않았던 거냐?”

“마, 마음에 든 게 엘이랑 닮아서일 수도 있잖아.”

“하?”

“내 외모도, 성격도…… 선대의 바람으로 형성된 거라고…….”

“너까지 그 말을 믿는 거냐? 그래서 내가 널 그와 닮도록 만들어냈다?”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짚었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의외로 이어진 대답은 차분했다.

“……후대의 성정이 선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영향을 받는 수준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바란다고 해서 전부 똑같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반영은 되지만, 타고난 본성이 바뀔 정도는 아냐. 특히 외형에 관해서 결정할 권한 같은 건 없다. 네 외모는 너만 지닐 수 있는 고유의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닮는 건 불가능해.”

“그, 그럼 일부러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게 아니란 거야?”

“당연한 말을 하는군. 정령왕은 타고난 본 모습에 가장 가까운 외형을 지닌다.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영원히 지녀야 하는 모습이지. 그런 게 고작 남의 의사로 결정된다니, 선대의 권한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게다가 내가 후대에게 바란 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뭐였는데?”

반사적으로 물은 말에 엘뤼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대답이 내키지 않는 듯 했다. 그래도 내가 시선을 떼지 않자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말 별 거 아니다. 그저, 내 다음 세대는 좀 더 주위와 어울릴 수 있는 녀석이었으면 했다. 그것뿐이야.”

“어? 주위와 어울리는?”

“내가 그러지 못했으니까.”

한숨처럼 답하는 말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내가 아는 사실과 달라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엘뤼엔의 바람이 의외라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주위와 어울릴 수 있길 바랐다니. 저 무심한 표정을 하고 그런 다정한 소망을 기원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엘뤼엔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내게 다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눈에 내가 지닌 외로움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비웃는 대신 품으로 안아주었다. 아버지가 되기로 한 것도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게 나한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쳐 올랐다. 안도감과 창피함, 기쁨과 죄책감이 서로 번갈아 자리를 바꾸는 기분이었다. 우스꽝스러울 것이 분명할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덮었다.

“이제 오해가 풀린 거냐?”

“미, 미안해. 내가 잘 알아보지도 않고…….”

“사과할 건 없다. 하지만 앞으로 한 가지만은 반드시 명심해라. 내 아들은 너밖에 없다.”

“……!”

“언젠가는 지금보다 성장해서 더 이상 네게 부모의 자리가 필요하지 않게 될 때도 오겠지. 그래도 난 여전히 네 아버지로 있을 거다.”

나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어쩌면 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순간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꿈같은 말을 건네는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이 순간의 기억을 분명한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 그런 내 생각을 엘뤼엔도 읽은 것 같았다. 그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제대로 보란 듯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헛소리를 할 만큼 한가한 신이 아니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응.”

“그래, 그거면 됐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부드럽게 휘어진 물색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안도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그가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천지 무서울 것이 없다는 잔혹한 형벌의 신이, 고작 내 작은 반응 따위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아직도 환상 속에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엘뤼엔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남의 이야기 같은 건 듣지 마. 내 말을 믿어라. 마음껏 네 권리를 주장하고 차지해. 넌 그래도 된다. 네 아버지인 내가 허락한다.”

주문 같은 말들이 귓가에 쏟아져 내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이렇게 구원을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끌어안고 아등바등 지키느라 벅차기만 한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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