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99화 (199/608)

제199화

“허억!”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희뿌연 빛을 밝히고 있는 천장이었다. 주위는 꽤 넓은 홀로 보였고, 나는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그리고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온몸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이 늦었다. 뭔가 굉장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사태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깼으면 그만 일어나. 그 상태로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는 연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심하다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의 주인은 바로 엘뤼엔이었다.

“……어? 엘뤼엔?”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조금 전의 꿈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의 꿈을 꿨었지. 현실의 날 잊을 정도로 그 안의 상황에 몰입해 있었는데 엘뤼엔이 나타나서 정신을 차리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지금도 그가 내 눈앞에 있다니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게 마냥 꿈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건가?

“뭐야, 뭐야? 깼어? 깬 거야?”

그때 엘뤼엔의 옆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였다. 키는 엘뤼엔보다 조금 더 큰 편일까.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검은 눈동자에 어깨를 살짝 넘는 머리칼 역시 밤하늘만큼이나 짙은 흑발이다. 그와 반대로 피부색은 눈처럼 희어서 드러난 부분마다 마치 빛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뤼엔이나 라피스 만큼 화려한 느낌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 같았다.

여기서 내가 굳이 추측성의 표현을 한 이유는 그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잔뜩 부어있는 데다가 알록달록한 멍을 한가득 달고 있었으니까. 보기에도 몹시 아플 것 같은 모습을 한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헤벌쭉 웃었다.

“이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 안녕, 엘. 냐하하~ 사랑스러운 밤이지?”

“넌 닥치고 있어.”

내가 적당한 대응을 고민하기도 전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엘뤼엔이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닿자 흑발의 남자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흐흑! 너무해, 엘뤼엔. 나는 그저 친우의 아들에게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듣던 중 가장 기분 더러운 헛소리군. 친우는 누가 네놈 따위의 친우라는 거냐? 친우란 놈이 남의 아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갈 생각을 해?”

“에헷! 설마 그 정도로 이렇게 심하게 충격 받을 줄은 몰랐지. 아이, 그렇게 화내면 무섭잖아, 자기. 설마 또 때리려고? 너무해엥~.”

“닥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난 분명 던전 안에 있었다. 엘과 대화를 나누다가 정신이 흐려졌던 것 같긴 한데 이후의 상황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눈앞에 엘뤼엔이 있는 것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도, 무엇 하나 납득이 되는 것이 없었다. 꿈에서 내가 주술에 걸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아직도 그런 상태인 건 아니겠지? 왠지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 같고 감각이 둔하기만 한 게 영 수상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뭔가에 취해 있었다가 깬 것처럼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곧 들이닥친 사태가 혼몽한 정신을 확 깨게 했다. 무심결에 옆을 돌아본 순간 나는 헛숨을 삼켰다. 이사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내 근처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거!”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투닥거리고 있던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사나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안색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이사나! 이사나, 일어나 봐! 이사나?”

어깨를 흔들어봤지만 이사나는 흐느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흑, 흐으윽. 죽……일 거야. 전부 다…… 죽여버릴……거야.”

덜덜 떨고 있는 입술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심하게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다가온 엘뤼엔이 몸을 굽히고 있었다.

나는 급박한 상황도 잊은 채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깨 아래 흐트러진 금실 같은 백금발하며,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은 분명 엘뤼엔이 틀림없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그의 얼굴이 있는데도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엘뤼엔은 내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사나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잠시 후 이어지는 말에 나는 다시 당황했다.

“감정 상태가 정상이 아니군. 이미 꿈에 먹혔나.”

“꾸, 꿈에 먹혀?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들 전부 주술에 걸렸다고 했잖아. 벌써 잊은 거냐?”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꿈속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걸 눈앞의 엘뤼엔이 알고 있는 걸 보니 역시 그게 전부 꿈이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도 꿈이거나. 왠지 후자가 더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정신 차려. 이건 현실이다.”

내가 하는 생각을 읽었는지 엘뤼엔이 내 이마에 꿀밤을 놓으며 말했다. 나는 아파서 얼얼한 이마를 부여잡은 채 작은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한 건 꿈속이었잖아?”

“그래. 네가 깨어나려고 하지 않아서 내가 직접 의식에 개입해 끌고 나왔지.”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지금 네가 이렇게 눈을 뜬 거잖아. 자꾸 달아나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긴 하는 거냐? 거기서 또 나를 뿌리쳤다면 너도 이 꼴이 됐을 거다.”

그러면서 그가 가리킨 것이 쓰러져 있는 내 일행들이라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엘. 좀처럼 깨어나지 않아서 엘뤼엔이 얼마나 걱정했다고. 나 엘뤼엔이 이렇게 초조해하는 거 첨 봤다니까?”

“넌 닥치고 있으랬지.”

이번에도 낯선 남자가 친근한 어조로 끼어들었고, 엘뤼엔이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래도 그의 성격에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고 대응을 한다는 게 신기했다.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헷갈리는 관계였다.

나는 다시 다투기(엘뤼엔이 일방적으로 화내고 있었지만) 시작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엘뤼엔이 실제인 것도 맞고 그가 날 구해준 것도 맞는 것 같은데, 자세한 정황을 물으려니 당장 눈앞에 있는 일행들의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이사나가 가장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상태가 비슷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고, 다들 괴로운 신음이나 헛소리 같은 것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저기. 그 주술이라는 게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야? 왜 다들 일어나지 않지?”

내 질문에 엘뤼엔이 흑발 남자를 윽박지르던 걸 멈추고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경험했잖아. 의식에 침투해 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빠트리든, 평소 두려워하는 일을 경험하게 만들든. 어떤 식으로든 죄책감이나 절망, 고통, 분노 같은 것들을 자극해서 궁지로 몰아가지. 네 경우엔 정신력이 버텨줘서 좋은 기억도 함께 공존했지만.”

“좋은 기억? ……태진이 말이야?”

“그래. 그 친구와의 기억이 네 정신을 지키는 방어 기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보통은 악몽만 끊임없이 이어져서 오래 버티지 못해.”

“그,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극단적으로 불안해질 때마다 태진이 나타났던 것 같다. 어쩐지 그의 등장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그게 설마 그런 이유였을 줄이야. 납득이 되자 뭉클한 감각이 퍼졌다. 태진은 전생에서도 나를 몇 번이나 지탱해주었던 친구였다. 이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억지로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하게 되다니. 마치 그가 지금도 여전히 날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엘뤼엔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방어를 한 건 다행이지만, 내가 그와의 추억에만 매달려서 현실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더 곤란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엘뤼엔을 만날 때마다 태진이 나타난 것이 그의 입장에선 내심 충격이었던 듯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다가 다시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주술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나도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방법을 알면 못 할 건 없지. 이젠 주술을 푸는 것밖에 못 하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꿈에 먹혔다고 했잖아. 타인이 중간에서 개입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대론 깨어나더라도 온전한 정신은 아닐 거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니. 그럼 미쳤다는 건가? 충격적인 사실에 가슴 안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계속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게 비정상적이긴 했다. 특히 흐느끼는 이사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마다 정신력이 다르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 일단 네 계약자는 확실히 망가진 것 같군.”

“그럴 수가……. 치, 치유술로 고칠 수 있을까?”

“정신질환도 상처의 일종이니 불가능하진 않아. 하지만 치유해도 기억은 남는다. 지금처럼 환각을 통한 기억은 강렬하게 각인되는 편이라 후유증을 크게 겪을 거야. 다른 방법을 함께 쓰는 게 좋아.”

“다른 방법?”

“먼저 치유부터 해라. 설명은 그 다음이니까.”

“아, 으응!”

나는 서둘러 일행들의 머리 위에 치유의 힘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앓는 소리가 멈추더니 이상 증세가 사라진 것이다. 한결 나아진 안색이나 편안해진 숨소리를 보니 다들 괜찮아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엘뤼엔이 한 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더니 마치 연기처럼 뭉쳐져 천천히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허공을 맴돌던 푸른빛은 이내 일행들 머리 위로 하나둘씩 스며들었다. 단지 그것뿐, 그 외에 딱히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없었다. 대체 뭘 한 거지? 의아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주술에 걸린 순간부터의 기억을 지웠다.”

“어? 기억을?”

“잔상을 남기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어떤 꿈을 꿨든 이걸로 아예 경험한 적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테니 후에 쓸데없는 여파를 겪을 일은 없을 거다.”

“정말? 다행이다.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됐네.”

“너였다면 경우가 달랐겠지.”

“응? 나?”

뜻밖의 말에 돌아보자 엘뤼엔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정령왕은 정신이 무너지기 쉽지 않지만, 한번 무너지고 나면 복원 또한 간단하지 않아. 지금처럼 빠른 치유도 어렵고 기억을 강제로 지우는 건 더욱 불가능하지. 네가 꿈속에 끌려들어 갔으면 지금처럼 손을 쓰기 힘들었을 거다.”

“그, 그렇구나. 그럼 나 되게 위험했던 거네?”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너도 참 어지간하군. 내가 괜히 왔을 것 같아? 갑자기 느낌이 이상해서 찾아봤더니 이런 일에 휘말리기나 하고. 쯧.”

“아하하, 미, 미안해.”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가슴 안이 따뜻해졌다. 그가 날 위해 여기까지 와 준 애정은 분명 거짓이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건 그게 다른 사람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엘을 봤을까? 그를 발견하고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퍼뜩 떠오른 생각에 나는 일행들을 살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사람들 속에서 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나는 눈을 몇 번 비비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어디에 있는 거지? 안도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내가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엘뤼엔이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행들은 걱정할 것 없다. 기억을 지우면서 자극을 줬으니 이제 곧 의식을 찾을 차례야. 정신이 들면 주술은 저절로 풀릴 거다.”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명이 없어.”

“뭐?”

“엘이 안 보여. 저, 저기. 그러니까 엘뤼엔이 예전에 알던 그 엘 말이야.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나랑 같이 있었거든. 어, 어떡하지? 어디 다른 곳으로 혼자 떨어졌나 봐.”

그런데 엘뤼엔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불안해하며 쳐다보니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문제가 있었지.”

놀라지 않고 단조롭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그는 이미 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도 꽤 담담한 반응이긴 했었다. 남의 대신이 싫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진 않았다. ……그리고 부정하지도 않았지.

한참 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임에도 막상 이런 순간이 닥치자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나는 억지로 태연한 척 말했다.

“일단 엘부터 찾아야겠어. 우리들을 여기로 데려온 게 엘뤼엔인 거 맞지? 혹시 엘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을 수 있겠어? 얼른 찾으러 가야…….”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응? 그게 무슨…….”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대답에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엘뤼엔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흑발의 남자였다. 그새 상처가 다 나았는지 엉망이던 피부가 깨끗했다. 말끔해진 얼굴은 짐작한 대로 꽤 준수한 편이었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던 흑발의 남자는 엘뤼엔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침울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 상황을 보면서 뭔가 할 말이 있을 텐데?”

“내가 잘못했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대답이 이어졌다. 한참 전부터 이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엘뤼엔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와 동시에 흑발의 남자가 허윽,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구부렸다. 엘뤼엔이 그의 배를 무릎으로 가격한 것이다.

“소개하지. 이번 일의 원흉이다.”

지켜보는 내가 식은땀이 나는 상황에서, 엘뤼엔이 혼자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표정만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 아래 주저앉아 부들거리고 있는 흑발 남자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만.

“워, 원흉? 무슨 원흉?”

“너도 한 대 쳐라. 아니, 고작 한 대로 끝낼 일은 아니겠군. 네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으로 열흘간 쉬지 않고 패도 된다. 형벌의 신인 내가 허락하지.”

들으면서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나 대신 배를 움켜쥔 채 끙끙거리는 흑발의 남자가 그의 말에 반응했다.

“에, 엘뤼엔. 그렇게 맞으면 아무리 나라도 죽거든?”

“죽으라고 하는 거다. 이참에 깨끗이 소멸해버려.”

“흐에에, 너무해.”

남자가 칭얼거렸지만 엘뤼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아연한 심정으로 서 있는 나를 채근하듯이 말했다.

“뭐 하고 있는 거냐. 마음껏 때려. 후환은 염려하지 말고.”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대체 아까부터 뭘 하는 거야?”

“뭐긴. 네 손으로 되갚을 기회를 주겠다는 거다.”

“되갚다니, 뭘?”

“아아, 마침 주역들이 다 모일 차례군.”

엘뤼엔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쳤을 때였다. 누워 있는 일행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