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저, 저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
“거짓말하지 마! 내 앞에서는 착한 척 불쌍한 척 온갖 궁상을 다 떨더니. 뒤로는 이런 호박씨를 까고 있었니? 아무튼 넌 뱃속에 들어설 때부터 내 맘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네가 그렇게 잘났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큰형 공부하느라 많이 힘든 거 몰라? 안 그래도 통학하느라 고생하는 거 안쓰러워 죽겠는데, 넌 막내가 돼 가지고 형을 돕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더러운 모욕감을 줘? 그래서 결국 엄마 돈에까지 손을 대게 만든 거니? 그 여린 애가 얼마나 기댈 곳이 없으면 혼날 줄 알면서 그런 짓을 했겠어!”
“아, 아니에요, 엄마. 정말로 저는 그런 적이……!”
“그럼 지금 진수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니? 정말 기가 막혀서. 못된 것만이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하구나, 너? 내가 진수를 몰라? 어릴 때부터 남이 제 물건을 훔쳐가도 한마디도 못하던 순둥이였어, 그 애는! 그런 착한 애가 그럴 리가 없잖니!”
그럼 나는요?
엄마, 나도 엄마 아들이에요. 형에 대해 아는 만큼 나에 대해서도 아셔야 하잖아요.
가슴 안이 먹먹해지는데 목소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소리치는 엄마의 뒤쪽에 큰형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보며 피식 웃은 그가 입술 모양만으로 말을 건네 왔다. ‘내가 두고 보라고 했지?’ 그가 전하는 내용을 알아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울컥 차오른 속을 다스리느라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자 그것을 본 엄마의 눈이 더 사나워졌다.
“어머, 너 지금 주먹을 쥔 거니? 왜? 날 치기라도 하려고?”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세상에, 요즘 지 부모 때리는 패륜아가 그렇게 많다더니! 너 같은 애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내가 사람을 낳은 게 아니라 짐승 새끼를 낳았어!”
“엄마!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 저는……!”
“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지? 널 내 배로 낳았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못나게 태어났으면 사랑받을 노력을 해야지!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살아달라는 것뿐인데 그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하겠니? 꼭 이렇게 튀어서 분란을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우리 집에 왜 너 같은 게 태어나서! 너만 아니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 집인데!”
충격에 머릿속이 얼얼했다. 이번에도 나는 입을 벙긋거리는 것 외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명할 기회도, 하다못해 말을 끝까지 잇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아예 없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탈한 기분에 나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나를 엄마가 밖으로 떠밀었다.
“나가!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너랑 같이 사는 게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어! 다신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고 당장 썩 사라져버려!”
“어, 엄마! 엄마!”
저항하려고 했지만 엄마의 힘이 너무 셌다. 꽉 움켜잡은 손톱이 내 손목과 팔을 마구잡이로 할퀴어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고 강제로 밀쳐졌다. 거친 손길에 넘어진 후 망연자실한 상태로 고개를 들자 악귀처럼 일그러진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껏 저렇게 괴롭고 끔찍한 엄마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엄마한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건가? 나 때문인 거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얼른 달려가 문고리에 매달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급히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미 굳게 잠긴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았다. 서럽고 두려운 기분에 나는 온몸을 떨었다.
“어, 엄마! 엄마! 형!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엄마! 제발……!”
“……겨우 찾았나 했더니.”
귓가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복도 저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늦은 시각이었고, 불이 켜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내 질문에 그가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다가올 때마다 드리워진 그늘이 걷어지면서, 가려졌던 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길에 만났던 바로 그 금발 남자였다.
“왜 여기에…….”
생각지 못한 만남이라 그 순간만큼은 절박한 감정도 잊었다. 당황하며 묻자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예?”
“대체 뭘 하는 거냐.”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갑다. 왠지 몹시 불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는 짜증 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는(그런데 왠지 그 짜증이 날 향한 것 같진 않았다)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내 팔을 붙잡아 부축해서 일어나게 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쯧, 뿌리치고 달아나기나 하니까 그렇지.”
“네?”
“되묻는 것이 특기인 줄은 몰랐군.”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손등으로 내 이마를 툭 쳤다. 우와, 이 사람 웃을 줄도 알았구나. 무심한 표정만 보다가 웃는 얼굴을 보니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남자는 더러워진 내 옷을 털어주며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닿는 손길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이었지만 싫진 않았다.
“험한 꼴은 이제 충분히 겪었겠지? 그만 돌아가자.”
“도, 돌아가요? 어디로요?”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남자가 살짝 멈칫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이봐,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쪽에서 누군가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돌아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태진이 있었던 것이다.
“태, 태진아?”
이런 늦은 시각에 태진이 왜 여길 온 거지? 나한테 급히 전할 말이라도 있었나? 반가운 기분이 들어야 하는 게 맞는데, 상황이 너무 뜻밖이다 보니 당혹감이 더 컸다. 사실 수상하기로는 내 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더하긴 했지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태진은 우리 집 위치라도 알고 있기라도 하지, 이 사람은 그런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날 찾아올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오히려 태진을 방해꾼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또 저건가.”
남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사나운 눈빛으로 태진을 노려보았다.
“방해하지 마.”
그 순간이었다. 내게 빠르게 다가오던 태진의 동작이 갑자기 멈췄다. 말 그대로였다. 주춤거리는 것도, 물러난 것도 아니라 그냥 그대로 몸이 굳었다. 마치 멈춘 동영상 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태, 태진아? 하태진?”
“그렇게 불러도 이제 반응하지 않을 거다.”
다급하게 부르자 남자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의 존재가 두렵게 다가왔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섭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태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악몽을 잠시 멈춘 것뿐이야. 네가 자꾸 깊이 들어가려고 하니까.”
“악몽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거냐? 정말 단단히 홀렸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니까!”
“후우……. 엘, 일단 진정해. 나와 차분히 대화를…….”
“엘 아니야!”
강한 부정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찌푸린 시선이 내 의도를 탐색하듯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 아냐. 내 이름은…… 엘이 아니라고…….”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본 남자가 곧 한숨을 내뱉는 것처럼 말했다.
“좋아, 그럼 다르게 부르지.”
그 말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선뜻 받아들이는 걸 보니 그는 내 원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가 내 본명을 부른다고 생각하니 더 싫었다. 그 입에서 ‘지훈’이란 이름이 나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건 전혀 뜻밖의 단어였다.
“아들.”
“……!”
“나랑 얘기 좀 하자, 아들.”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남자가 담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받았다.
“……아들?”
“이름은 싫다며.”
“그게 아니라…… 왜 나를 아들이라고 불러……?”
“네가 내 아들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남자에게 잡혀 있던 팔을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이번엔 간단히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를 더욱 강하게 잡은 그가 진지한 얼굴로 한 글자씩 끊어내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넌 이미 알고 있어. 건방지게 내게 말을 놓고 있는 게 그 증거잖아.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이 이상 머물면 아무리 너라도 반드시 정신세계가 무너진다. 널 위해주는 유일한 친구? 그런 알량한 방어 기제 따윈 오래가지 못해. 아니, 앞으로는 오히려 그게 역으로 너를 공격하려 들 거다.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주술이니까.”
“주……술?”
“그래. 너만이 아니라 네 동행인 전부 그 안에서 헤매는 중이지. 네가 이러고 있는 동안 네 친구들은 점점 미쳐가고 있을 거다. 그대로 내버려둘 거냐?”
“친구? 미쳐가다니?”
“기억해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니, 일단 이것부터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겠군. 아깐 대답하지 않고 달아났었지? 다시 한 번 묻겠다. 내가 누구냐?”
“……모르겠어.”
남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겠지. 자, 아들. 전부 들어줄 테니 말해봐. 왜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지?”
“왜냐니……. 난 다른 사람 대타 같은 거 싫어.”
아들이란 단어에 가슴 안이 술렁거렸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흠칫 놀라 얼굴을 굳히는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이었다.
“가족한테 무시당하고 맞는 건 괜찮고?”
“그, 그래도 그들은 ‘나’를 바라봐. 다른 사람의 대신은 아니야. 그들이 아무리 날 싫어해도, 날 욕하고 저주한다고 해도……그건 온전히 나를 향한 거야. 게다가 이곳엔 아프면 위로해 줄 친구도 있고…….”
“그래서? 계속 여기서 살고 싶은 거냐? 이게 전부 네가 만들어낸 가짜라고 해도?”
“……가짜?”
“그래. 이곳에 있는 모든 건 네 멋대로 꾸며낸 환상일 뿐이다. 실제론 넌 이들 사이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벌써 잊은 거냐?”
“그게 무슨…….”
그 순간 불현듯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눈물을 삼키고 있던 친구들. 검은 탁자 앞에 하나둘씩 놓이던 국화꽃들. 누군가의 장례식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태진이 상주의 표식을 한 채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영정 사진에 나는 숨을 삼켰다. 검은 리본을 두른 액자 속에 담긴 사람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익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나였으니까.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난 이미 죽었던가. 퍼뜩 떠오른 사실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부드러운 감각과 함께 어깨 아래에서 무언가가 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내밀자 물을 머금은 것 같은 푸른색 실타래가 사뿐히 손가락 사이에 감겨들었다. 그것이 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침한 기운을 내뿜던 차디찬 아파트의 복도도, 굳어 있던 태진의 모습도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주위가 컴컴한 암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건 나와 눈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밖에 없었다. 그제야 나는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엄격한, 그러면서도 다정한 눈빛을 한 그는…….
“……엘뤼엔?”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탁한 감각이 사라지고 일시에 시야가 트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라는 거라든가.
“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야 자각한 현실에 절로 헛숨이 삼켜졌다. 엘뤼엔이라니! 뭐야, 정말 엘뤼엔이라고? 말도 안 돼! 왜 엘뤼엔이 이곳에 있는 거지? 여긴 던전 안이었던 거 아니었어?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의 남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맙소사! 잘못 본 게 아니다. 다시 보고 또 확인해 봐도 정말 엘뤼엔이 틀림없었다. 산만해진 내 행동에 그 역시 내 상태를 파악한 것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란 게 속만 썩이긴.”
“어어, 저, 저기?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엘뤼엔? 나 방금 전까지 던전에…….”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네가 쓸데없이 마음이 약해서 별 시답지도 않은 주술 따위에 걸려든 거지.”
혼란에 빠진 나를 향해 엘뤼엔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 못 한 채 되물었다.
“자, 잠깐만. 주술이라고?”
“그래, 주술. 일단 정신 들었으니까 눈부터 떠라. 그게 순서인 것 같으니.”
“뭐? 그건 또 무슨…… 으악!”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유리처럼 와장창 깨졌다. 바닥을 딛는 감각도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사태를 깨달았을 땐 난 이미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