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97화 (197/608)

제197화

친구들과 헤어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은 한적했다. 학교가 끝난 이후인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하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몸은 조금 고단하지만 시급이 꽤 괜찮았다. 무엇보다 미성년자인 데다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나를 일하게 해주는 곳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선 그저 감지덕지한 일터였다. 내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사장님이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전부 좋은 사람들뿐이라 여러모로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마 대학에 갈 때까진 쭉 다니게 될 것 같았다.

“너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푸른 눈을 지닌 외국인이 바로 내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의 정체는 더 뜻밖이었다. 새카만 케이프 코트와 하나로 내려 묶은 백금색의 머리칼. 휘황찬란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눈에 익었다. 점심시간에 교실 창문에서 봤던 바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와아…….’

멀리서 봤을 때도 충분히 감탄한 외모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차원이 달랐다. 피부 결이며 속눈썹 한 올 한 올마저 예술가가 온 힘을 다해 그려낸 것 같은 게,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잘생길 수가 있지? 인간 같지 않게 화려한 외모에 감탄하느라 나는 그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내게서 반응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 외국인인 그가, 한국인인 나에게 말이다. 그것을 깨닫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왜 대답이 없지?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앗! 저, 저기, 죄송해요! 제가 영어를 전혀 못 하거든요! 으아, 그러니까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아임 쏘리?”

“……난 영어를 쓰라고 한 적이 없다만.”

“네? 그치만…… 어엇! 그러고 보니 말이 통하네요?”

다시금 깨달은 사실에 눈을 껌뻑이자 남자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라 민망했지만, 그래도 말이 통한다는 사실에 느끼는 안도감이 더 컸다. 긴장이 풀리니 그를 바라보는 것도 조금 편해졌다.

“하하, 죄송해요. 그나저나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요. 혹시 유학생이세요? 아니면 한국계?”

“내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듣고 싶은데.”

“아, 맞다! ……근데 뭐라고 하셨죠?”

내 질문에 그의 결 좋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런 동작 하나까지 멋있게 보이다니, 역시 사람은 타고난 얼굴이 잘나야 하나 보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아, 그러셨구나.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대답.”

“하,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가는 길이에요.”

아무리 잘생겼다곤 하나 낯선 사람이다. 일부러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남자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집? 여기에 너희 집이 어디 있는데?”

“버스 타고 두 정류장 정도 가면 있어요.”

“그게 아니라, 이곳에 네가 있을 곳이 어디 있냐는 뜻이다.”

“……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해져서 바라보자, 남자는 아까보다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푸른 눈이 파도가 이는 것처럼 일렁거리자 더욱 박력이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나를 쏘아보던 그가 문득 내 이마 쪽을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덥수룩한 앞머리에 가려져 있는 상처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태진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눈썰미가 좋은 사람 같았다.

그의 손이 내 머리칼을 쓸어 올리려 해서 나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성큼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남자는 기어코 내 이마의 상처를 살피고는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이랬지?”

“네? 아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좀 칠칠맞아서…….”

“누가 이랬냐고 물었다.”

“윽,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냥 제가 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됐어요?”

“누가 아버지라고?”

음성이 더 낮아진다. 나는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정 폭력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라도 가진 사람인가?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화를 낼 필요는 없잖아. 내가 원해서 맞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더 상대했다간 피곤해질 것 같아 나는 억지로 남자를 떨쳐내고 돌아서려고 했다.

“저기요,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그럼 이만…….”

“회피하지 말고 날 똑바로 쳐다봐. 누가 네 아버지라는 거냐? 네가 그렇게 부를 사람은 그쪽이 아닐 텐데?”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부 다 알고 있잖아.”

“뭐라구요?”

“기껏 도망친다는 게 이런 곳이었나? 과거에 숨어들면 전부 다 괜찮아질 것 같았어? 그것도 고작 이런 기억 따위에?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바보같이 그냥 참고만 있어! 날 봐, 엘! 네 앞에 있는 내가 누구지?”

“……!”

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억지로 떠올리는 기분? 거북한 무언가가 속에서 강하게 충동질하는 것 같았다. 아아,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이것 놔요!”

“엘!”

“내 이름은 엘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소리치자 남자의 손길이 주춤거렸다. 나는 그 틈에 그를 밀쳐낸 다음 무작정 달렸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그가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초조했다.

그때 눈앞에 있는 어느 건물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는 태진이었다. 검도 유단자인 태진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도장으로 간다. 특히 지금은 대회를 앞둔 시점이라 오후 수업을 재끼고 연습하러 갈 때도 많았다. 지금쯤이면 도장에 있을 시간인데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게다가 여긴 그가 다니는 도장이 있는 방향도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짜 맞춘 것처럼 아는 사람을 발견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힘껏 달려가 태진의 등에 덮치듯 매달렸다.

“으악! 깜짝이야! 뭐야! 어? 강지훈?”

“헉헉! 헉! 태, 태진아!”

갑자기 닥친 상황에 화들짝 놀란 태진이 화난 얼굴로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내 모습을 훑어 내리곤 빠르게 얼굴을 굳혔다.

“너 표정이 왜 이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나는 그를 방패 삼은 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금발의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쫓아오는 중간에 포기했거나, 일행이 나타난 걸 보고 그냥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태진이 너 이제부터 히어로 해라. 소질이 있는 것 같아.”

“무슨 헛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다그치는 목소리에 오히려 안도감이 밀려든다. 끔찍한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도 설명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서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다행히 태진은 투덜거리기만 할 뿐 재촉하지는 않았다. 대신 염려하는 눈으로 확인해두기만 했다.

“괜찮은 거지?”

“응, 걱정 끼쳐서 미안해.”

“됐어. 근데 너 알바 갈 시간 아냐? 7시 다 돼가는 것 같은데?”

“헉! 맞다, 알바!”

태진의 말을 듣고서야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얼굴을 굳힌 채 황급히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가는 시간만 30분이 넘게 걸리는 곳인데 이미 바늘이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아, 망했다. 오늘 기순 형이 급한 볼일 있다고 꼭 시간 지켜 달랬는데!”

“전 타임 알바 형 말이지?”

“응! 미안해, 태진아! 나 먼저 가볼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뛰어가려고?”

“버스 타면 좋긴 한데.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나 뛰어가는 시간이나 그게 그거야.”

“버스 말고 다른 걸 타면 되지.”

“다른 거?”

“쯧쯧, 이게 뭐게?”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묻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태진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의 옆에 서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둥그런 바퀴가 두 개 달린 검은색의 날렵한 물체는 바로 자전거였다.

“어? 그거 네가 통학할 때 타고 다니는…….”

상황을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번쩍 치켜들자, 짓궂게 웃고 있는 태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게 탐이 나는가, 형제여?”

“예! 몹시 탐납니다!”

“형님이라고 부르면 빌려주지.”

“형님!”

“음하하하! 귀여운 놈! 네가 사회생활하는 법을 좀 아는구나!”

호탕하게 웃은 태진이 기꺼이 내게 자전거를 건넸다. 이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평소 태진은 자기 물건에 애착이 강한 편이라 남에겐 지우개도 잘 빌려주지 않는 녀석이었다. 특히 자전거는 그가 소유한 것들 중에서 가장 아끼는 애장품이다. 그런 녀석이 아르바이트에 지각할 친구를 위해 선뜻 그것을 내준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둔 것 같다. 감동을 만끽하고 있는 날 보며 태진이 피식 웃었다.

“왜 안 가고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

“태진아. 난 역시 너만 있으면 될 것 같아.”

“헐, 됐거든? 내가 좀 멋있는 건 아는데, 사내자식의 구애 따위는 정중하게 사양하마. 이거 죄다 빚으로 달아둘 거야. 나중에 성공해서 전부 갚을 생각이나 해.”

엄격하게 하는 말도 내 자존심을 위한 것이란 게 느껴져 기분 상하지 않았다. 진정한 친구는 평생 동안 하나 만들기도 어렵다던데. 그런 면에서 보면 내 인생도 썩 쓸 만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바라건대 이렇게 평온한 순간이 영원하길.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 * *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 안의 공기가 이상했다. 늦은 시간이라 떠들썩하진 않아도 아직 다들 모여 TV를 시청할 때였는데,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실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처럼 불도 켜져 있었고, 형들이 현관을 내다보는 기척도 느껴졌다.

“어, 왔네.”

고개를 힐끔 내민 둘째 형이 날 발견하곤 말했다. 웃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물론 날 아는 척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왔니?”

신발을 막 벗으려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엄마가 서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지독하리만치 무심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귀가를 맞이해준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끝에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걸 간신히 떠올렸다.

“아, 다녀왔습…….”

하지만 서둘러 건네려던 인사는 끝말을 잇지 못했다. 짜아악!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뺨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인지했다. 때렸다. 엄마가, 나를.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자 이번엔 반대쪽 뺨이 뜨거워졌다. 연달아 친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엄마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 배은망덕한 놈.”

사납게 내뱉는 말에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만큼은 분명히 보였다.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어, 엄마……?”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키워주고 가르쳐준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해? 네 주제도 모르고?”

“무, 무슨 말씀이세요?”

“진수가 서랍에 넣어둔 곗돈을 훔쳤어!”

예상치 못한 소리에 나는 잠시 눈을 껌뻑였다. 진수라면 큰형의 이름이다. 오늘 아침 날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설마 엄마의 곗돈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일이 나한테까지 불똥이 튄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이…… 훔친 거잖아요?”

“얘 눈 똑바로 뜨는 것 좀 봐. 그래! 훔치기는 진수가 훔쳤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추궁했더니 돈이 너무 급해서 그랬다더라. 그래서 네 잘못은 없다는 거니? 넌 아무것도 모르시겠다?”

“그야…….”

“계속 그렇게 잡아뗄래? 진수한테 이미 전부 다 들었거든? 너한테 빌려달라고 했더니 지잡대 다니는 병신은 꺼지라고 했다며! 그것도 모자라서 뭐? 마마보이는 엄마한테나 가서 젖이나 빌어먹으라고?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막말을!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낯이 뜨거워지던지!”

아니다. 그런 게 아닌데. 그녀가 내뱉는 것마다 전부 처음 듣는 말들뿐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되는 것 같아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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