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96화 (196/608)

제196화

“야, 찌질이.”

등교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큰 형이었다. 나는 조금 불편한 기분으로 큰 형을 바라보았다.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키, 마른 체구인 그는 곰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둘째 형처럼 위압적이진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더 불편한 타입이었다.

“찌질이 너 대답 안 해?”

“……왜.”

“너 돈 얼마나 있냐?”

“돈?”

“이 새끼가 자꾸 모른척한다? 너 알바 하잖아. 그동안 모은 거 얼마나 되냐고.”

“……그런 건 왜 묻는데.”

예감이 좋지 않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방어하기 위해 슬쩍 발을 뒤로 뺐다. 언제든 열고 나갈 수 있도록 몸은 현관문 앞에 바짝 붙인 채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큰 형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여친 생긴 거 알지? 조만간 백 일이라 이벤트 하려고 하는데 비용이 부족해. 좀 내놔 봐라.”

“뭐?”

“이게 진짜! 자꾸 두 번 말하게 할래? 돈 가진 거 있음 좀 내놓으라고. 아빠가 용돈을 너무 적게 줘서 반지 맞출 돈이 부족하단 말이야.”

“…….”

나는 조금 아연한 심정으로 큰형을 바라보았다. 형의 나이가 지금 몇 살이더라? 21세? 22세? 어쨌거나 대학생인 건 확실하다. 다니는 대학은 서울권에서 벗어난 곳이지만, 집안의 장남이 자취하며 고생하는 꼴을 볼 순 없다며 아버지가 집에서 통학하게 했다. 그 대신 교통비를 포함한 용돈을 듬뿍 지원해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적다는 용돈이 내 한 달 시급보다 많다는 건 알고나 있을까? 하물며 나는 용돈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도, 중학생이 된 후로는 부모님이 학비조차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내 말 안 들려? 돈 좀 내놓으라고.”

“……없어.”

“없긴 왜 없어? 너 알바 하잖아.”

“아르바이트비로는 학교 수업료랑 차비랑 점심값 해결하면 끝이야. 남는 건 전부 적금 통장에 넣어서 못 꺼내.”

따로 쓸 돈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형이 원하는 건 목돈일 텐데 내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현금이라고 해봐야 몇만 원 정도였으니까. 물론 큰 형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적금을 깨면 되잖아, 이 새끼야!”

“모, 못해. 통장 나한테 없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태, 태진이한테 맡겨 놨어. 졸업하면 받기로 했어.”

그 말에 큰형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집 안에선 모질어도 밖에서만큼은 친절한 내 가족들은 절대 남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게다가 태진은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고, 그의 부모님이 하시는 사업이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와도 밀접하게 엮여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태진에게 맡겨둔 거다. 아무리 형들이라도 녀석은 협박할 수 없을 테니까. 큰형 역시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눈치였다.

“하, 너 완전 잔머리 굴린다? 그렇게 나오면 후회할 텐데?”

“……없는 걸 내놓을 순 없잖아.”

“좋아. 두고 보자, 너.”

큰형이 비틀린 표정으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틈에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형한테 저항해본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야! 아프잖아! 살살해!”

“시끄러, 바보 같은 놈아! 좀 가만히 있어!”

체육이 4교시에 들어가 있는 요일은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급식소의 경쟁이 치열한 날이다. 한창 왕성하게 먹는 시기의 아이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 한 직후기 때문이다. 오늘이 바로 그 결전(?)의 날이었고, 태진은 아침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점심시간이 된 지금, 가장 먼저 급식소로 달려갔어야 할 태진은 내 팔을 붙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디서 구해온 건지 약이며 파스를 이것저것 늘어놓고 열심히 내 팔에 발라주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운동하는 중에 더워서 무심코 소매를 걷었다가 하필이면 피멍이 든 것이 걸리고 말았다. 평소엔 잘 하지 않는 실수였는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몸 상태가 좋은 편이라 다쳤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추궁하는 그에겐 계단에서 굴렀다고 둘러댄 참이었다.

“나참, 덤벙거리는 것도 어지간히 해야지. 뭘 어떻게 하면 계단에서 구르냐? 게다가 이렇게 다쳤으면 진작 치료라도 받든가! 이걸 왜 그냥 방치하고 있어?”

타박하는 태진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날 보며 태진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좋다고 웃고 싶기도 하겠다. 아픈데 웃음이 나와? 너 매저냐?”

“별로 안 아팠거든? 네가 눌러서 아팠던 거거든?”

“웃기시네! 우길 걸 우겨라! 피멍이 이렇게 심하게 들었는데 아프지 않기는!”

투덜거리면서도 태진의 손은 멈추지 않고 치료를 계속한다. 멍이든 자국을 살피는 얼굴이 풀어질 줄을 몰랐다.

“너 이거 진짜 계단에서 굴러서 생긴 상처 맞지?”

“당연하지. 그럼 계단을 날다가 생겼겠냐?”

“농담하지 말고.”

“정말이야.”

모른 척 잡아떼자 태진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거즈로 환부를 감싸며 말했다.

“맞아서 생긴 타박상이랑 굴러서 생긴 거랑 형태가 다른 건 아냐?”

“……어?”

“됐다. 네가 굴렀다면 구른 거겠지. 단지 네가 구른 게 아니라 다른 게 굴렀던 것 같긴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계속 거짓말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술에 좀 많이 취해서 오셨어. 재떨이가 날아왔는데 내가 미처 그걸 피하지 못했을 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일부러 겨냥해서 던진 거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을 뿐.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경악할 게 분명하니 굳이 쓸데없는 설명은 추가하지 않았다. 팔에 든 피멍 이외에 보이지 않는 곳엔 더 많은 상처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 태진에게 상처가 걸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와 친해진 이후로 벌써 열 번은 넘게 들켰던 것 같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몹시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술을 마셨고, 그가 휘두르는 폭력의 대상은 주로 나였다. 어제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 재떨이에 맞고 몇 대 밟힌 정도에서 끝났지만, 운이 나쁠 땐 거동이 힘들 정도로 맞을 때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자잘한 상처들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는 내 실수라고 넘겼지만 계속 반복되자 태진이 의심했고, 결국 아버지의 술버릇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전부 솔직하게 밝히지는 않고 적당히 순화해서 설명해둔 상태였다. 태진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또 술에 취해서 물건을 마구 던지신 거야? 학창시절 때 투포환 선수여서 술만 드시면 물건을 집어 던지신댔나?”

“으응, 그렇지, 뭐.”

“거참. 그쯤 되면 네 아버지 술 못 드시게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너도 웬만하면 잘 좀 피해라. 그냥 마구잡이로 아무 데나 집어 던지는 거라며. 일부러 겨냥해서 던지는 것도 아닌데 민첩성이 얼마나 떨어지면 매번 그렇게 얻어 맞냐?”

“하하, 그러게.”

“……라고,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편이 네 마음이 편하겠지?”

“응. ……응?”

뭐야, 설마 거짓말인 걸 눈치챈 건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태진이 복잡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타까움과 힐난이 뒤섞인 시선에 나는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네가 바보라고 나까지 멍청해 보이냐?”

“……미안.”

“됐어. 암튼 네가 꺼리니까 더는 묻지 않을게. 하지만 나중엔 솔직히 말해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혼자 전부 끌어안고 있지 마라.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알았지?”

힘주어 강조하는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치부를 들켜 얼굴은 화끈거리는데 왠지 속은 후련했다. 아마도 누구 하나쯤은 내 사정을 알아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태진에게 미안하고 민망하면서도, 그가 나를 경멸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 그래서 결국 그에게 전부 다 털어놨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태진은 이렇게 묵묵히 내 옆을 지켜줬었던 것 같다. 졸업을 하고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키까지 부쩍 커져서,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몹시 든든했었다.

고등학생? 내가 지금 고등학생이라고 했나? 나는 물끄러미 태진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1학기 초반이고, 졸업 이후의 진로는 정해두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미 겪은 마냥 회상하다니,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웃고 있는 태진의 얼굴 위로 조금 더 성장한 그의 얼굴이 겹쳐진다. 처음 보는 게 맞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하고 친근했다. 이건 단지 내 희망사항인가? 그게 아니면 지금 여기가…….

“뭘 그렇게 봐?”

불퉁하게 묻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태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체형도, 얼굴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다. 방금 내가 겪은 게 무슨 현상일까? 뭔가 깨달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고지에 다다르자마자 증발한 듯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대충 둘러댔다.

“아니, 그냥. 오늘따라 네가 왠지 늙어 보여서.”

“허어, 이 가련한 중생이 말하는 것 좀 보게? 넌 오늘따라도 아니고 그냥 꾸준히 계속 못생겼거든?”

“내가 뭐! 나 정도면 평균이지!”

“쯧쯧, 꼭 못난이들이 이렇게 현실을 모른다니까. 친구로서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넌 못생긴 거 맞아. 얌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해라.”

“죽을래?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생겼다고?”

그 말에 태진이 훗 하고 건방진 미소를 날리더니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몸의 미모야 자타가 공인한 사실이지. 자, 봐라. 이 잘생긴 얼굴과 매끄러운 피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여자애들이 나만 보면 좋아서 달려드는 거 너 모르지? 시대가 낳은 꽃미남이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이 말씀!”

뻔뻔함도 이 정도쯤 되면 국보급이 아닐까. 나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태진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제일 좋다. 어지간하면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가 친구로서 내게 충고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잔인한 현실을 깨우쳐줘야 할 것 같았다.

“후, 불쌍한 녀석. 네가 아직 진정한 꽃미남을 못 봤구나.”

“진정한 꽃미남?”

“이 형님의 말을 잘 들어. 진짜 꽃미남은 말이지. 여자들이 긴장해서 접근도 하지 못해. 반경 삼 미터 뒤로 물러서서 힐끔힐끔 바라보는 게 전부라고. 왠지 알아? 얼굴을 보는 순간 그냥 넋이 나가버리거든. 후광이란 거 들어봤지? 이게 살아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얼굴에서 광채가 번쩍번쩍 난다니까?”

“마치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 같다?”

“당연하지. 엘뤼엔부터 시작해서 트로웰, 라피스, 이사나 등등. 다들 얼마나 잘생겼는데.”

“엘…… 뭐? 그게 다 누군데?”

“엥? 그, 글쎄? 누구였지?”

“……재떨이에 맞은 게 팔이 아니라 머리였냐?”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는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태진을 무시한 채 교실로 먼저 향하면서도 기분은 찜찜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요즘 내가 좀 이상하긴 했다. 왠지 갈수록 헛소리를 하는 일이 늘어난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교실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몹시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반 애들 대부분이 우르르 창가에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옆 건물인 여학생 교실 쪽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인데?”

뒤따라온 태진이 냉큼 그들 틈에 끼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더니 한 팔만 뒤로 내밀어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하필 다친 부분이라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파!”

“아, 미안. 야, 근데 저기 좀 봐봐. 네가 말한 꽃미남의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 있어.”

“엥? 어디?”

태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교문 앞이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각같이 섬세하고 작은 얼굴에 늘씬한 체형, 훤칠한 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등 뒤로 늘어트린 머리칼은 화려한 백금색. 짙은 정장 위에 검은색 케이프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멀리 떨어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에서 광채가 느껴졌다. 마치 그림 속의 존재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교문 담에 기대어 무료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응시했다.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그와 나의 시선이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물론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본 표정이 정확할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히야~ 진짜 기똥차게 잘생긴 남자네. 누굴 만나러 온 걸까? 웬만한 연예인은 저 사람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겠다. 그치?”

“으응. 근데 저 사람, 아까부터 이쪽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래? 헉! 혹시 내 미모에 질투라도 한 게 아닐까? 이런, 어쩌지? 이러다 결투장이라도 날아오면…….”

“어휴, 그냥 꺼져라. 내가 말을 말지.”

어째 이놈의 왕자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저 녀석 부모님은 아들이 이러고 다니는 걸 아시기나 하려나?

태진과 투닥거리는 동안 나는 교문 앞에 서 있던 외국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것은 수업이 끝나고 하교할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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