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검은 눈동자였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자, 쾅하고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눈앞이 번쩍거렸다. 동시에 끔찍한 두통이 찾아들었다.
“아윽! 뭐, 뭐야!”
“크흑! 아, 젠장! 진짜 아파! 뭐긴 뭐야, 이 빌어먹을 놈아! 점심시간 됐는데도 안 일어나니까 이 몸이 몸소 깨우러 온 거잖아!”
타격을 입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머리 위에서 앓는 소리가 쏟아져들었다. 비록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상당히 거침없는 반응이었다. 최근 들어 나한테 저렇게 막말을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 아파서 본성이 나온 건가? 이런 식의 대응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불쾌하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반가움이 더 앞섰다.
“이씨! 너 돌머리지? 뭐가 이렇게 단단해? 코 박살 나는 줄 알았네.”
“돌머리긴 누가 돌머리……어? 너 누구야?”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드니 투덜거리는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낯설었다. 아니, 낯선 게 아닌가? 왠지 생소한 느낌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리둥절해져서 묻자 상대가 끙끙거리다 말고 뭘 잘못 먹었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너 누구야? 하, 이 새끼 잔머리 굴리는 것 좀 보게? 네가 지금 기억상실인 척해서 눈앞에 직면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양인데. 쇼해도 소용없거든, 강지훈? 나한테 그딴 게 통할 것 같냐?”
“어? 강……지훈?”
“그래, 강지훈! 너 말이야, 너!”
불쑥 들이밀어진 얼굴에 무심코 물러서다 말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에 있는 얼굴이 낯익어도 너무 낯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한때는 지겨우리만치 줄곧 붙어 다니던…….
“어어? 설마……하태진?”
“설마는 무슨 설마야. 뭐야, 아직도 잠에서 덜 깼냐?”
황당하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말에 헛숨이 삼켜진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앞에 있는 녀석은 분명 전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하태진이 맞았다. 단정한 교복 차림과 훤칠한 키. 색소가 옅다는 친가를 닮아 약간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까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보다는 조금 더 어려 보였지만 분명 그였다.
교복이 회색인 걸 보면 중학생 때쯤인가. 같은 반이라면 3학년 때일 거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눈에 익은 교실과 어지럽게 늘어진 책, 걸상들. 역시나 익숙한 아이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던전에 있던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어? 던전? 그건 또 뭐지? 게다가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모습? 전생에서 친한 친구라니? 그럼 내가 죽어서 새로 태어나기라도 했단 거야, 뭐야?
“으윽! 뭐가 뭔지 모르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이어가던 생각이 갑자기 뚝 끊어진 것 같았다. 뭔가 생각이 날듯 말 듯한 느낌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런 나를 향해 태진이 끌끌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하루 종일 퍼 자니까 그렇지. 정신 차려, 인마. 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아직도 비몽사몽이야?”
“……꿈?”
“그래, 꿈. 너 일 교시부터 한 번도 안 깬 건 아냐? 수학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데도 꿈쩍도 안 하더라.”
태진의 눈이 불순한 빛을 띠고 내 위아래를 훑었다. 이건 독한 놈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긴 일 교시부터 점심시간까지라면 정말 많이 자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민망해서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본 태진도 곧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할 말 없으니까 웃기는. 아무튼 배고파 죽겠다.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민식이가 네 것까지 도시락 싸왔다더라. 더 기다리게 했다간 지가 다 먹어버릴걸?”
“아, 알았어. 근데 저기, 나 진짜 꿈꾼 거 맞아?”
“뭐?”
“그게,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정말 실감 났었거든. 난 분명히 방금 전까지 캄캄한 동굴 속에 있었는데. 이상한 괴물들이랑도 막 싸우고…….”
그 말에 태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첫째, 여기가 어딜까요?”
“학교.”
“둘째, 그럼 지금은 무슨 시간?”
“어…… 점심시간?”
“셋째, 그럼 너는 학교 점심시간에 괴물이랑 싸운 용감한 학생이 되는 걸까?”
“……아니.”
“꿈꾼 거 확실하지?”
“……응.”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게 아니지 싶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웃고 있는 태진을 보는 순간 찝찝한 기분이야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꿈이라면 꿈인 거겠지, 뭐. 사실 교실에 있는데 그게 꿈이 아니면 뭐겠는가. 나는 머릿속 잔상을 털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태진이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응? 뭐야?”
“뭐긴, 안경이잖아. 이거 안 쓰면 멀리 있는 건 하나도 안 보이면서.”
“으음, 그, 그랬던가? 나 눈이 굉장히 좋아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이너스를 눈앞에 두고 있는 주제에 좋기는 개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써. 너 하나 때문에 애들 다 기다리잖아.”
태진의 재촉에 못 이겨 나는 마지못해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얼굴에 걸쳤다. 그러자 왠지 갑갑하다고 생각했던 주변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머리가 멍하다고 느꼈던 건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나 보다.
“……이제 잘 보이네.”
“그치? 이 자식은 어째 갈수록 맹해지는지 몰라. 꿈이 그렇게 재미있었냐? 일어났을 때 친구 얼굴도 한순간 못 알아볼 만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 대충 알 만하다. 괴물이랑 싸웠다는 걸 보니 무슨 전설의 영웅이 되어서 거창한 모험이라도 했겠지. 만날 판타지 소설 들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정말 언제나 크려는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소리쳤다. 태진의 놀란 시선과 반 아이들의 당황한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몰려들었다. 아, 이게 아닌데. 뒤늦게 차오른 낭패감에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태진이 약간 기죽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야, 알았어.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그냥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미안해. 많이 삐쳤냐?”
“아, 아니야. 그냥……갑자기 좀 답답해져서. 너한테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됐다. 네가 아직도 잠의 여운에서 벗어나질 못한 모양인데, 이 형님이 그런 거 하나 이해해주지 못할 만큼 좀생이는 아니다. 그 대신 내가 확실하게 정신이 들도록 만들어 주지. 에잇!”
“우아악! 이 자식! 무슨 짓이야!”
갑자기 태진이 나를 끌어안고 간지럼을 태우는 통에 나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주위의 녀석들은 태진을 말리기는커녕 좋다고 낄낄거리기만 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휘파람을 부는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순히 항복하는 게 좋을 텐데? 안 그럼 단계를 더 높인다?”
“으아악! 알았어! 항복! 항복! 내가 다 잘못했어! 항복한다니까?”
“훗,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거만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고 물러서는 태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악마 같았다. 나는 질린 기분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무튼 이 녀석도 라피스 못지 않게 재수없…….
‘응? 라피스가 누구지?’
불현듯 떠오른 이름에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굉장히 낯익은 게 어디선가 꼭 들어본 느낌인데 그게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영어라면 알파벳도 헷갈리는 내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을 리는 없고. 얼마 전에 본 영화에 나왔던 주인공 이름인가? 잠시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어 나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왜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들까. 주위의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딴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 앞에서 조심스럽게 건넨 인사에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집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나라는 존재가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을 뿐.
돌아보지 않는 가족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집 안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30평형의 아파트. 현관과 연결된 복도를 지나 조금 앞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거실이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부엌이, 양옆으로는 유리 창문이 달린 발코니가, 그 너머의 공간으로 방들이 하나씩 배치된 구조였다. 거실 정면 벽에 설치된 검은색 TV에선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4인용의 가죽 소파는 몇 달 전에 새로 교체한 것이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본 모습인데 이상하리만치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야.”
시비조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나한테 형도 있었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잊어버릴 만한 일도 아닌데 형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심지어 나한테 형이 그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거실에서 다른 형이 힐끔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가 첫째 형,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둘째 형이다. 이 사실도 조금 늦게 떠올랐다. 드디어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걸까?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반응이 늦어지자 둘째 형의 얼굴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뭐 하냐, 너?”
“으응?”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거기서 꺼지라고. 처맞고 싶냐?”
“아, 아니. 미안해.”
노려보는 눈빛에 잔인함이 깃드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안방을 중심으로 배치된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내 방은 현관 바로 앞에 있는 통로에 붙어 있다. 평소였다면 거실까지 가지도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오늘따라 이 집이 유난히 생소하게 여겨졌다곤 하나, 가족들이 전부 있는데 안쪽으로 들어섰던 건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형들 역시 의아했는지 걸어가는 뒤쪽에서 빈정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거. 꼴에 시위라도 하나?”
“몰라. 비루먹은 것 같은 새끼가 머리 좀 컸다고 슬슬 기어오르네. 저거 조만간 손봐 줄 거야. 눈이 다시 밤탱이가 되어 봐야 형님 무서운 줄을 알지.”
“야야, 격투기도 배웠는데 살살해, 살살. 네 주먹에 잘못 맞으면 저 새끼 그대로 골로 간다.”
“쯧, 덩치라도 있으면 때리는 맛이라도 있지. 아무튼 쓸 데가 없어.”
딱히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는다. 일부러 겁먹게 하려는 것이 분명한 말들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내 뒤를 따라붙었다. 부엌에 있는 어머니는 말없이 형제가 먹을 과일을 깎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평소 형제끼리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빗자루를 들고 와서 훈계하는 사람답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서 나를 괴롭히는 건 죄가 아니니까.
늘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건, 오늘 학교에서 꾸었던 꿈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그래도 사랑받고 있었던 것 같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래서 꿈이라는 것마저 잊어버렸을 만큼.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났더라? 문득 궁금해졌지만 나는 곧 쓰게 웃었다.
‘뭐, 그래 봤자 꿈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아름답고 행복한 꿈이어도, 결국 꿈은 꿈일 뿐.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거다. 오히려 그 잠깐의 환상 때문에 현실이 더 버거워진 것 같아서 뒷맛이 씁쓸하기만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창백한 얼굴을 비춰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 못생긴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다. 약간은 각진 얼굴에 거칠고 창백한 피부도. 바둑알처럼 검고 탁한 눈동자도. 덥수룩한 머리카락까지도 본래의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내 얼굴이 원래 이랬었나? 나는 한참이나 빤히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때 문득 바깥쪽에서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퇴근한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쿵! 방문에 날카로운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 후레자식 놈! 당장 안 기어 나와? 오냐, 그래 이제 아비고 뭐고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거지? 이래서 재수 없는 자식은 키우면 안 된다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는 고성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혀 풀린 음성은 명백히 술에 취한 사람의 것이었다. 예상이 맞았다. 이런 날은 곱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여보! 내가 오늘은 술 드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시끄러워! 가서 지훈이 새끼나 불러와! 아버지가 왔는데도 나와서 인사를 안 해? 저딴 것도 아들이라고 집에 들여놔! 당장 내쫓아버려, 당장!”
“쫓아내려면 당신이 해요! 정말이지 내가 못 살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이제 좀 그만둘 수 없어요?”
“뭐가 어째? 당신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그러게 누가 저딴 녀석 낳으랬어?”
“누가 낳고 싶어서 낳았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럴 거면 지운다고 할 때 말리지나 말지! 왜 이제 와서 난리야? 왜 이제 와서!”
울분에 받친 목소리와 통곡하는 울음소리. 이럴 때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이 나를 향한 저주라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다. 내가 태어난 뒤로 벌써 몇 년 동안 반복되는 상황이라는 것도.
형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는 거의 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이 아는 아버지는 어지간하면 화내는 일이 없는, 자식 사랑이 지극한 가장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의 어머니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다독이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남부럽지 않게 화목한 집안이었다. 그래, 나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이 화를 내는 원인을 알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그 의문에 납득이 가는 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다못해 누군가 이유라도 알려준다면 좋겠다. 그럼 이 참담한 시간도 조금 더 견디기 쉽지 않을까?
<간혹,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원래 가야 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잘못 분배되는 경우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
<부모 형제와 유대감이 없지는 않았습니까?>
어디선가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나는 어둡고 좁은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뭐야, 환청인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상처투성이로군.>
“…….”
또 다시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번엔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음성이었다. 앞서 들은 음성이 조금 당황스러운 것뿐이라면, 이번에 이어진 음성엔 왠지 가슴이 술렁거렸다. 무뚝뚝하고 한심해하는 듯한 말투인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듣고 싶었다.
<다시 만나면 선물을 주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눈앞에 한 광경이 천천히 펼쳐졌다. 꿈처럼 아늑한, 동화 같은 공간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조차 아름다운, 한 폭의 유화를 닮은 사람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얼음처럼 차갑던 시선이 나를 발견하자 부드럽게 변한다. 마치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너, 내 아들 해라.>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온몸을 가득 채운 따뜻한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꿈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게 꿈이 아닐 리가 없다. 하지만 주저하는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난 왜 이렇게 서럽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거지?
맹세코 이런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마니까.
나는 무릎을 바짝 세우곤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