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아무래도 다들 흩어진 것 같아.”
내가 주위를 훑어보는 이유를 짐작했는지 시벨리우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싶었던 상황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 내 기분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주위를 돌아본 시벨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설마 공간이 변형되는 반술(反術)이라니. 이 던전을 만든 녀석, 누군지 몰라도 정말 보통이 아니야.”
“반술?”
“주술 안에 숨겨진 주술이야. 첫 번째 주술이 강제로 깨지면 그 반작용으로 발동하게 되어 있지. 이 경우 보통 처음 주술은 깔아두는 용도일 뿐이고, 이쪽이 진짜 주술에 가까워.”
“그렇구나. 역시 거울은 함정이었단 말이네?”
“그런 거지. 게다가 함정인 걸 알아도 피할 수 없도록 착실히 유도까지 했어. 이런 식의 반술은 고위 주술사 중에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 근데 정령왕이라면 이 정도는 저절로 알지 않아?”
설명하다 말고 찝찝했는지 시벨리우스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으므로 나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넌 진짜 이상해.”
“으음,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전부 모르는 건 아냐. 그냥 깨닫는 게 조금 느린 것뿐이지.”
“……마치 서로 바뀐 것 같아.”
“뭐가?”
“엘과 너 말이야. 엘은 인간인데 너무 인간 같지 않아서 이상했거든. 그런데 넌 정령왕인데 인간 같아.”
어쩌면 정말로 뒤바뀐 걸지도 모르지. 씁쓸한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조금 화가 난 듯한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는 게 버릇이야?”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왠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들, 네 입장에선 전부 부당한 것뿐이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지 않아? 다른 정령왕들한테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나 엘한테는 화풀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딱히 너희 잘못은 아닌걸.”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고. 내가 아는 한 정령왕들은 자신의 감정이 먼저지, 그런 식으로 잘잘못을 가려가며 참아주는 족속은 아니었어. 너 그럴 때마다 얼마나 엘 같은지 알아? 젠장, 하긴 그러고 보니 네 그 유한 성격도 선대에 의해 형성된 거라고 했지. 왜 엘 같은지 이해는 되네.”
“…….”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말문이 턱 막혔다. 스스로도 아차 싶었는지 시벨은 바로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런 말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너만 보면 화가 나. 네가 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거든.”
“……난 한 번도 내가 ‘엘’이라고 말한 적 없어.”
“알아. 오히려 싫어했지. 그래도 나는 네가 틀림없이 엘일 거라고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중이고.”
“뭐?”
마지막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니, 설마 아직도 나를 엘의 환생이라 여기고 있다는 뜻인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나는 당황하여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널더러 엘 같다고 했었지. 반대로 지금의 엘을 보고 있으면 왠지 그답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예를 들면 갑자기 지면을 무너트려서 모두를 위험하게 한 일이라거나.”
“아?”
그치만 그때는 오히려 엘을 두둔하지 않았었나?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 자신도 겸연쩍었는지 시벨리우스는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땐 사실 나도 좀 놀랐거든. 엘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알기 때문에 바로 납득은 했지만, 그답지 않다고 여긴 건 사실이야. 그 외에도 그가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당황스러워. 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서.”
“그, 그랬구나.”
“물론 예전에도 엘은 좀 과감하긴 했어. 분명 지금의 엘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은 행동, 똑같은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도 낯선 느낌이 들어서 이상해. 왜 그런 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너한테 익숙해진 탓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반응에 이미 적응해서, 엘이 너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무의식적으로 엘을 너와 비교하고 있단 말이야.”
“……!”
이건 정말로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벨리우스는 한껏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자조와 경멸, 수치심과 후회의 감정들이 일그러진 얼굴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우습지? 마음껏 비웃어도 돼. 나도 이러는 내가 납득이 안 돼서 혼란스러우니까.”
“비웃다니…….”
“왜? 누가 봐도 비웃을 만한 일이잖아? 난 그럴 때마다 내가 정말 짜증나! 엘은 내 소중한 친구야! 그런데 왜 내가 그를 남과 비교하면서 그답지 않다고 여겨야 하는 거지?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대체 뭐하는 녀석이냐고!”
나를 보는 시선에 원망이 가득했다. 정작 몰아세워진 쪽은 나인데, 마치 그가 버림받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벌려도 그저 벙긋거리기만 할 뿐 한마디도 제대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택한 나를 보며 시벨리우스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니다. 이런 얘기 너한테 해 봤자 소용없겠지. 이건 결국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미안하다.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널 탓할 생각은 없었어.”
“시벨…….”
“어쨌든 이 얘긴 여기까지 하자. 일단은 다른 애들을 찾는 게 먼저인 것 같아. 지금쯤 다들 헤매고 있을 거야.”
그가 알아서 이야기를 결론짓고 상황을 마무리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벨리우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먼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서둘러 나간 복도엔 이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벨?”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듯했다. 길은 양쪽으로 뻗어 있었고, 두 군데 전부 안쪽으로 꺾어지는 형식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일단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굽어진 길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흠칫 놀라 방어 자세부터 취하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있었구나?”
“……엘!”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엘이었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자 몸의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그 역시 우리를 찾으러 다니고 있었던 듯했다. 혼자 떨어져 있었던 게 분명한데, 다급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그답단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네?”
“그러게.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혹시 시벨 못 봤어?”
“시벨? 아니, 못 봤는데.”
“그렇구나. 실은 방금 전까지 나랑 같이 있었거든. 먼저 나갔는데 벌써 사라져서 보이질 않아.”
“흠, 그래?”
“아무래도 반대편으로 갔나 봐. 놓치기 전에 어서 따라가자.”
“응, 그래야지.”
왠지 모르게 돌아오는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앞서 가려다 말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엘?”
“시벨이 왜 먼저 간 거야?”
“어?”
“이런 상황에서 단독 행동이 위험하다는 건 누구나 당연히 알 거야. 보통은 같이 움직이려고 하는 게 정상일 텐데. 굳이 널 놔두고 먼저 간 이유가 있나 해서.”
“아, 그건…….”
허를 찌르는 질문이라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엘이 뭔가 짐작했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싸웠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아니면, 시벨이 너랑 있는 게 괴로웠던 건가?”
“……!”
아마도 내 눈빛이 흔들렸던 것 같다. 집요할 정도로 날 주시하던 엘이 피식 웃었다.
“실은 알고 있었거든. 그 녀석이 아직도 너와 날 보며 혼란스러워한다는 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너와 거리를 둔다는 것도. 그냥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될 걸, 누가 진짜인지 아닌지 일일이 구분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참 미련한 성격이라니까.”
“저기, 엘…….”
“네가 이해해 줘. 유니콘들은 원래 타인과의 교류에 미숙하거든. 평생에 걸쳐 좁고 협소한 관계를 이루는 편인데, 그런 대신 그 몇 안 되는 관계를 매우 특별하게 여기고 집착하지. 자신의 친구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녀석 입장에선 위협을 받는 기분일 거야. 심지어 헷갈리기까지 하니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결국은 나 때문인 거네.”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그게 네 잘못은 아니라도.”
“…….”
딱 자른 말투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입술에 걸린 미소와는 달리 엘의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혹시 화가 난 걸까? 조심스럽게 그의 기분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넌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으응?”
“지금 네 모습이랑, 성격. 남의 닮은꼴이라는 게 억울하지 않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어? 이제 슬슬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황해서 되물은 말에 엘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네 생각이 궁금한 것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이 상황이 좀 재밌거든. 그래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시벨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네. 일전에 시벨도 충고했을 텐데. 네가 알아서 제자리로 돌려놓길 바란다고. 설마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아니면, 설마 너도 같이 즐기고 있는 거야? 나와 시벨을 괴롭히고 싶어서?”
“뭐?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라면 태도를 확실히 해 줄래? 정령왕도 인간도 아닌 상태잖아, 너. 네가 어중간한 위치를 고수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도 널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거야. 이사나와 알리사가 널 볼 때마다 긴장하는 거, 느끼지 못했어?”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름을 바꾸고 엘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내가, 주위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는 걸까.
나를 향해 분통을 터트리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방적으로 화내고 있었지만, 그 역시 괴로워한다는 게 아플 만큼 느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되는 건가?
“난…… 그럴 생각이…….”
변명하기 위해 힘겹게 입을 열자 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물론 넌 그러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잖아.”
“……그게 전부 내 탓이야?”
“글쎄. 우리 둘이 너무 닮는 바람에 빚어진 혼란이니까. 이 경우엔 따라 한 쪽의 잘못이겠지.”
따라 한 쪽.
적나라한 표현에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감정이 얼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엘이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니까 당황스러워? 하긴 네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긴 하지. 하지만 둘 중 하나가 가짜라면, 결국 가짜인 쪽이 진짜를 따라 한 게 맞잖아?”
“…….”
“자신 있다면 대답해 봐. 넌 누구야? 지금의 네가 과연 진짜 너라고 할 수 있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려는데, 뭔가 미지근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심코 만지자 손이 흥건히 젖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게 조금 신기해서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을 흘려본 게 얼마 만이더라? 언제부터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이젠 우는 법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동안 손가락 위를 감돌던 물방울들이 마치 피부에 흡수되듯이 사라져 갔다.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내가 물의 정령왕이란 증거는 이렇게나 명백하다. 그럼에도 나를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누구냐고?
글쎄,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지? 난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거지?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저 나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전생에서의 부모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네 행동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는 거라고. 그러니 네가 변해야 한다고.
난 변하려고 노력해야만 인정받는 존재인 건가? 지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그럼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진짜 나를 찾으면 인정받을 수 있나? 그게 진짜 나이긴 한 건가?
‘……왜 이렇게 힘들지.’
지치고 지쳐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라도 이 답답한 감정을 하소연하고 싶은데, 문득 나한텐 그럴 대상조차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엄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그래도 예전엔 친구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렇지도 않은가. 그럼 이제 전부 다 놔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럴 바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부정적인 생각은 사람을 한없이 침몰하게 만든다.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밑바닥에 있는 것이 차라리 마음은 편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왠지 머릿속이 점점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지훈?”
엘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저 부름에 응답하면 나는 또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번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듣지 않을 거다. 응, 그래도 될 거야.
“어? 잠깐만. 설마 정말 잠드는 거야?”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그의 당황이 느껴졌다. 아아, 그래, 나는 지금 잠들고 있는 거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지금 내 상태를 깨달았다. 그런데 그게 딱히 나쁘지 않았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오히려 기분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영원히 잠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훈? 아니, 엘? 엘! 정신 차려! 으아, 이게 아닌데?”
잠결의 착각인 걸까. 다급하게 외치는 엘의 목소리가 낯설게 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왜 나를 엘이라고 부르는 걸까. 정작 그 이름은 자신의 것이면서.
스치는 의문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새카만 암흑이 눈앞을 뒤덮었다. 귓가에서 누군가 난처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무겁게 가라앉은 감각으로 인지하기에도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으으음, 어떡하지. 이건 좀 많이 혼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