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92화 (192/608)

제192화

덜컹! 쿠우웅!

“꺄아악! 엄마야!”

“알리사!”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구덩이로 변한 바닥에서 무수히 많은 쇠창살이 튀어 올랐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알리사가 그대로 떨어지려는 순간, 이사나가 황급히 시큐엘을 소환하여 그녀를 잡아채 밖으로 끌어 올렸다. 아주 잠깐이라도 늦었다면 놓쳤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괜찮아, 알리사? 어디 다친 덴 없어?”

“어, 엄청 놀랐어.”

“하아, 내가 더 놀랐다. 이러다 심장마비로 먼저 죽는 거 아니야?”

창백한 얼굴로 심호흡하는 알리사 옆에서 이사나와 시벨리우스가 같이 숨을 몰아쉬었다. 데르온과 엘의 안색도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다른 함정을 간신히 피한 참에 바로 연이어진 일이라 다들 더 크게 놀란 참이었다.

나는 알리사의 상태를 간단히 점검한 후 우리가 지나온 길을 힐끗 돌아보았다. 견고하고 웅장하게 세워진 내벽, 그 양 사이로 펼쳐진 거대하고 긴 통로는 여느 왕성의 복도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바닥은 잘 다져진 대리석 대신 온통 폭격을 맞은 듯한 흔적들만 가득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파인 수많은 구덩이, 종류를 알 수도 없는 살벌한 무기와 빼곡하게 전개된 갖가지 살육용 장치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몇 번은 황천길에 올랐을 현장을 돌아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끝은 언제 닿는 걸까. 쫓기듯 정신없이 이동하는 동안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듯했는데, 여기가 던전의 어디쯤인지는 정확히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구조의 건물인 건지. 같은 장소를 반복하게 만들던 결계를 부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정령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시야가 닫힌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똑같았다. 하다못해 해가 뜨고 지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어서 시간 감각마저 모호해진 상태였다. 다만 확실한 건, 이곳에서 벌어진 첫 전투가 어느새 가물가물하게 여겨질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정말 굉장했었는데 말이지.’

다시 떠올려도 끔찍한 기억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입구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짐승은 검은 털을 지닌 거대 늑대였다. 매우 날렵한 데다 덩치가 몹시 컸지만 상대하기 곤란할 정도로 강한 편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니, 정확히는 죽여도 다시 살아나서 덤벼들었다. 베어내면 쓰러지는 건 그때뿐, 사체가 곧장 증발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데 뭉쳐져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처리하고 처리해도 끝도 없이 계속 밀려드는 바람에 나중에 가서는 그냥 기계적으로 베어낸 기억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공방은 결국 내가 늑대들을 전부 물에 가둬 얼려버리고 나서야 간신히 끝을 고했다. 애초에 죽이는 게 아니라 포획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했었던 듯했다. 깨닫는 게 늦어 오랜 시간을 헛수고한 셈이다. 그때쯤엔 이미 다들 너무 지쳐서 심한 탈수 증상까지 보였다.

하지만 엘의 말대로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부터 던전은 본격적으로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곳곳에 함정들이 산재해 있었다는 뜻이다. 돌연 사방에서 뾰족한 송곳이 내려온다거나 화살 비가 쏟아지는 건 예사였고, 지금처럼 바닥이 갑자기 꺼지거나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오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살아 있는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그 대다수가 기괴한 형태의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데르온 덕분에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들 대부분이 마계에서 서식하는 종류라는 것이다.

“네? 그게 마계의 생물이라구요?”

“예, 그것도 경계에 사는 생물들입니다.”

“경계?”

“마계 주 영토 밖에 있는 외곽 지대를 말합니다. 주민은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죠. 그곳에 서식하는 생물들은 마족들 중에서도 실력이 없는 자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검이 봉인되었다더니, 아무래도 이 던전은 마족이 설계한 것 같군요. 최소한 큰 조력자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설계에 관여한 마족은 상당한 고위 계급이었을 거라는 게 데르온의 총평이었다. 내친김에 그는 상대의 정체까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상당히 치밀한 자인지 그 어디에도 단서로 삼을 만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선지 이동하는 내내 데르온은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마족이기 때문인지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 문이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증거일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험은 잠시 후 뜻밖의 국면을 맞이했다. 하염없이 이어지던 기나긴 복도가 끝나고, 그 앞에 굳게 닫힌 문이 나타난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다들 뒤로 물러서.”

엘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계속 장치가 튀어나온 만큼, 이 문 자체가 함정일 거란 의심도 지울 순 없었다.

엘 역시 긴장했는지 살짝 심호흡을 한 다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이익, 나무가 비틀리는 것 같은 억센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반쯤 드러난 틈 너머로 희뿌연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외의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일행들은 천천히 경계 자세를 풀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머뭇거리는 그들을 대신해서 내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제야 제대로 드러난 광경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문 너머에도 여전히 기나긴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이전보다 폭이 좁았고, 바닥과 천장을 제외한 모든 곳이 반들거리는 재질로 이뤄져 있었다. 매끄러운 표면 위엔 주위의 광경이 그대로 내비쳐 보였다.

“……거울?”

재질의 정체는 한눈에 깨달았다. 그것도 상당히 선명한 거울이었다. 실험하는 기분으로 살짝 안에 들어서자 양쪽에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마치 내가 끝도 없이 복제되어 늘어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취향이 의심스러운 곳이군요.”

뒤따라 들어온 데르온 역시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일행들도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전부 거울이네요.”

“여기도 평범한 곳은 아닌 것 같지?”

“뭔가 되게 기분 나빠.”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엘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고요했고, 우리가 걷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위기만 봐선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밟기만 하면 나타나던 구덩이도,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이나 살벌한 흉기들도 없었다. 오히려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쾌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무한정 반복되는 공간에 갇힌 경험도 있으니만큼 평화롭다고 해서 무조건 안심할 건 못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 일도 없으니 오히려 불안하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불편하게 주위를 응시하는 데르온을 따라 나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툭툭,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이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지훈?”

“응? 지금 내 어깨 두드리지 않았어?”

“으응? 아니,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

내가 잘못 느낀 건가?

꽤 뚜렷한 감각이었는데 착각이었다는 게 좀 이상했다. 그래도 이사나의 당황한 표정이 거짓인 것 같지도 않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광경에서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거울에 비치고 있는 이사나의 얼굴들 중 하나가 마치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흠칫 놀라 돌아봤지만, 전부 똑같기만 할 뿐 아무런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지훈?”

“……아, 미안. 아무것도 아냐.”

‘뭐야, 또 착각…….’

너무 지나치게 긴장한 건가? 속으로 혀를 찬 후 다시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바라본 곳에서 당황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거울 속에 비친 알리사가, 품속에서 천천히 단검을 빼 들고 있었다. 알리사가 저런 무기를 갖고 있었나? 나는 깜짝 놀라 알리사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뭐…….”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나서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황급히 알리사의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를 붙잡아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놀란 시벨리우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이 보였다.

“뭐, 뭐야, 너?”

당황한 그가 항의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거울 속의 알리사가 자신의 옆을 단검으로 힘껏 찌르고 있었으니까. 방금 내가 잡아끌기 직전까지, 시벨리우스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뭐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멋대로 행동을?’

너무 충격적인 상황이라 등줄기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공격한 쪽도 공격당한 쪽도 전부 거울 속의 광경이긴 했다. 그래도 왠지 피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 공격이 실제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현명했다. 다음 순간 거울 속의 이사나가 빙긋 웃더니, 마찬가지로 거울 속에 비치고 있는 나를 보란 듯이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정말로 내 어깨 쪽에서 선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 전 나를 건드린 것도 거울 속의 이사나였던 모양이다.

‘설마…… 거울 속의 내가 공격을 받으면 진짜 나도 다치는 건가?’

거기까지 파악하자마자 나는 황급히 거울을 돌아보았다. 그 즉시 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헛숨을 삼켰다. 이번엔 내가 검을 꺼내 들고 시벨리우스를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한테서 떨어져!”

“뭐?”

비명을 지르듯 내뱉은 고함에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 역시 거울 속의 광경을 발견한 것이다.

“뭐, 뭐야, 이거!”

그제야 다른 일행들도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얼굴을 굳혔다. 거울 속의 자신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다들 멀찍이 물러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거울 속의 우리는 실제 우리가 위치한 자리에서 멀리 이탈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엘이 지시를 내리자 일행들은 주춤거리면서도 빠르게 일정 간격 이상으로 거리를 벌렸다. 거울 속의 우리들도 각자 무기를 빼어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벨리우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쯧, 어쩐지 평범한 곳 같진 않더라니. 설마 그림자 주술인 건가.”

“그림자 주술?”

“암흑 주술 중 하나야. 대상의 그림자를 삼켜서 모습을 그대로 본뜬 분신을 만들어내지. 저주를 걸거나 누명을 씌우기 위한 용도로 주로 쓰였어. 거울에 비친 형체를 이용하는 방식은 나도 처음 봤지만. 이건 조금 변형된 형태 같아.”

“주술의 파훼법은 알겠나?”

이번에 물은 건 데르온이었다. 시벨리우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어떤 주술이든 사물을 매개체로 한 건 사물 자체가 발동 조건이야. 아무리 대단한 거라도 조건이 사라지면 더는 유지할 수 없으니까. 이 경우엔 거울을 깨면 될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말했다시피 사물을 매개체로 하는 건 발동 조건만 없애면 돼서 파훼가 쉽거든. 그래서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 걸로 정해. 하지만 지금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이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단 말이군.”

“바로 그거야.”

일행들은 한동안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냥 이대로 있을 수도 없지만, 섣불리 주술을 깨트렸다가는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다음 일을 결정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시기는 곧 강제로 찾아왔다. 별안간 거울 속의 이사나가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간 것이다.

“자해도 하는 거였어?”

경악하는 우리의 반응을 즐기듯, 거울 속 이사나가 빙긋 웃었다. 그러자 보란 듯이 다른 그림자들도 차례로 자기 자신에게 검을 겨누기 시작했다. 공격은 피할 수라도 있지만 자해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일행들의 표정도 다급해졌다.

“젠장! 할 수 없지. 거울을 전부 깨트려!”

“그, 그래도 돼?”

“여기서 목이 베이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파도를 일으켜 양쪽 거울 벽을 크게 강타했다. 쿠구구궁!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리를 비추고 있던 거울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림자들의 모습 역시 일시에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 다음 순간 일어났다. 파괴된 벽면 밖으로 공간이 순식간에 넓어지는가 싶더니, 바닥에서 멋대로 거대한 기둥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쿠웅! 쿠우웅!

“뭐, 뭐야!”

솟아나는 기둥들에 따라 우리가 서 있던 바닥도 꿈틀거리며 변형되기 시작했다. 마치 장소 자체가 새로 조립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거울의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 간격 사이에도 벽면이 치솟아 올라 새로운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꺄악!”

“지, 지훈!”

“이런! 알리사! 이사나!”

빠르게 세워지는 기둥들 사이로 알리사와 이사나의 모습이 삼켜지듯 사라졌다. 그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려는데 내 앞에도 벽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기둥 때문에 넘어지려는 걸 누군가 뒤에서 받쳐주었다. 시벨리우스였다.

“괜찮아?”

“아, 으응.”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문득 주위가 고요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요란하던 바닥의 들썩임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을 들자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전부 꽉 막힌 밀실 같은 방이었다. 왼편의 한구석에 이 공간의 유일한 출구로 보이는 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나와 시벨리우스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