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같은 시각,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황제의 기사들은 관문 앞의 검문소와 대치하고 있었다. 에이프릴이 보낸 편지 하나만 보고 무작정 출발한 여정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른 참이다. 클리프 상단의 도움을 받아 용병으로 위장한 것까진 좋았으나,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발이 묶이는 바람에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상단 쪽도 더 이상 나서기 힘든 것 같군요. 이래서야 곧 경비대에 넘겨지겠습니다.”
상단 측 사람들이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페리스는 바람의 정령 실프를 통해 돌아가는 상황을 도청하고 있었다. 그가 전해준 좋지 못한 소식에 황제의 친위대장 케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역시 그렇군. 애초에 순조로울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떡하지, 대장? 이대로 끌려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초조한 음성에 케이 역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경비대에 넘겨지면 본격적인 신원 확인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클모어는 제국에서도 중요한 입지에 속한 곳이라 이곳의 관료들 중에선 중앙에서 파견되었거나, 한때 일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 많았다. 운이 나쁘면 그들 중에서 근위 기사들을 알아보는 자가 나올지도 몰랐다.
공국의 주인인 카웰 공작이 온전하지 않은 지금, 클모어는 대공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그 증거로 관문 앞까지 그의 병사들이 즐비하게 주둔해 있었다. 수배를 멈췄다 해서 추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닐 터. 여기서 상황이 더 악화되더라도 붙잡히는 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해라. 여의치 않을 시 그냥 돌파한다.”
나직한 명에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차하면 전투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실제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페리스가 난감함을 표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큰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이대로 얌전히 잡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페리스, 엄호를 부탁한다.”
“으음, 알겠습니다.”
이미 관문의 병사들은 그들을 연행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무장한 채 다가오는 병사들의 손에 그들을 결박할 밧줄이 들려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달리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건 페리스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그는 순순히 정령을 소환할 준비를 했다. 어차피 할 거라면 확실하게 판을 키울 작정이었다.
“리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느닷없이 자신의 팔을 붙잡는 손길에 페리스는 화들짝 놀라 기운의 운용을 멈췄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본 곳엔 굉장히 화려한 외모를 지닌 소년이 서 있었다. 밤하늘을 옮겨 담은 듯 새카만 머리칼 아래, 태양처럼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가 드리웠다. 보기 좋게 그을린 다갈색의 피부는 한여름의 화창한 녹음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생각지 못한 소년의 미색에 숨을 삼키느라, 페리스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한참 만에야 상기했다. 오랜 지인들 사이에서나 불리는 애칭을 불렀다는 사실 역시.
무심코 아는 사람이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보기 무섭게 그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살아가다 보면 까마득한 과거 저편으로 묻히게 되는 인연도 많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나 가능한 법이다. 이런 외모를 지닌 사람을 봤다면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맹세컨대 그의 인생에서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다들 이런 곳에 있었군요. 너무 늦어서 걱정했잖아요.”
소년의 시선이 이번엔 페리스를 넘어 그 뒤에 있는 기사들을 향했다. 마치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은 말투였다. 영문을 모르긴 기사들 역시 매한가지라, 그들은 돌격하려던 자세를 거두고 서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물론 명쾌한 해답을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봐, 넌 뭐지? 이자들과 아는 사이인가?”
뜻밖의 개입엔 관문의 병사들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에요. 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이어진 답문에 기사들은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의 기억에도 소년은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혹시 상단 측에서 준비한 사람인가 싶어서 상인들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서지 못하는 건 돌아가는 상황이 흥미로웠고, 소년에게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병사들은 공범을 대하는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이라 조사 중이었다. 너도 이들과 일행이라면 조사를 받아야겠군.”
“나무패가 문제인 건가요? 용병단의 신원이라면 상단과의 고용 계약서로도 충분히 증명이 가능할 텐데요.”
“이번부터 방침이 바뀌었다. 전부 원칙대로 처리하라는 명이다.”
역시 통하지 않는 건가. 병사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기사들은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그들의 눈엔 저 가냘픈 느낌을 지닌 소년이 도저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침 다들 방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 틈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의 시선이 닿았다. 흠칫 놀라 뻣뻣하게 굳은 기사들을, 소년의 황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훑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무슨 꼬마의 눈빛이…….’
자기도 모르게 숨죽인 기사들은 곧 충격을 받고 얼굴을 굳혔다. 자신들보다 한 자나 작은 소년에게 눈빛만으로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들의 동요를 무시한 채 빙긋 웃었다.
“그랬군요. 이런 일이 생겼으면 저한테 바로 연락을 해주셨어야죠, 리스. 제가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네? 아, 그, 으음, 저기…….”
이번에도 애칭을 불린 페리스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답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보고가 늦어 미안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저들의 신원은 제가 증명할게요.”
“네가 증명한다고?”
황당함이 역력한,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시선이 소년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병사들이 보기엔 소년 역시 제대로 된 용병 같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미색을 보아 혹시 어느 귀족가의 자제인가 싶었던 것이다. 존대를 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만 봐도 그랬다.
그러나 소년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찰랑,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눈앞에 떨어지는 둥근 메달을 보는 순간 병사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메달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검과 도끼가 교차된 문양은 용병 길드의 상징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색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으……은패?”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병사들이 헛숨을 삼켰다. 페리스와 황제의 기사들 역시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용병길드에서 은패는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전사에게만 지급되는 등급이었다. 저 작은 소년이 제국의 기사와 동일한 실력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모두를 충격으로 빠트린 소년은 그저 화사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원칙대로 길드 소속의 정식 용병이 신원 증명을 했어요. 이제 됐나요?”
“그, 그런…… 너 같은 꼬마가 어떻게…….”
“제 신원까지 문제 삼고 싶다면 용병 길드에 정식으로 문의하시죠. 샴페인 용병단의 매튜라고 하면 친절하게 절차를 밟아줄 거예요.”
“샤, 샴페인 용병단?”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던 병사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금패의 용병 휴센이 이끄는 샴페인 용병단은 어느 정도 전사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한 이름이었다. 소식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는 관문에서는 특히나 익숙한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샴페인 용병단 중에 십 대의 소년이 있다고 했었지. 과장된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니…….’
상황 파악을 끝마치자마자 병사들은 아쉬운 한숨을 삼켰다. 은패의 용병, 더구나 샴페인 용병단같이 유명한 곳에 소속된 사람의 보증이라면 없는 신용이라도 만들어서 놔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클리프 상단을 난처하게 만들 예정이었는데 그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그만 가보시오.”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뒤, 병사들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황제의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병사들이 완전히 떠나고 있었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 이렇듯 허무하게 끝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따라와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해 있는 그들을 향해, 영웅처럼 사건을 해결한 소년이 말했다. 기사들과 상단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소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관문 앞을 벗어날 때까지, 소년은 앞서 걷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저어…….”
어느 정도 관문과 거리가 벌어졌을 때쯤 페리스가 용기를 내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먼저이긴 한데, 그보다 앞서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기다려요. 곧 사람이 올 거예요.”
“예?”
뜻 모를 말을 이해할 겨를은 없었다. 그 순간 저편에서 누군가 버럭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 젠장! 뭐야!”
음성은 왠지 상당히 화가 난 듯 울분에 차 있었다. 고함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페리스와 기사들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엔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 눈앞의 소년보다 화려한, 아니, 화려하다 못해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아, 저분은…….”
누군가 그를 알아본 듯, 상단 측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남자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한발 늦었어, 라피.”
아는 사이인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더 위협적일 정도로 화려해서 기사들은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물론 화가 나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인 남자에겐 그들의 그런 상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껏 마음 다잡고 행차했는데 남에게 공로를 가로채인 것은 물론, 약 올림까지 당했다. 심지어 상대는 그가 마음대로 대할 수 없는 얼마 되지 않는 존재 중 하나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 라피스는 소년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너 왜 아직도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어. 떠날 경비는 다 모은 거 아니었어?”
“상단 호위 의뢰가 들어왔는데 마침 가는 길이라 수락했거든. 출발 일정이 어중간하게 남아서 대기하는 중이었어.”
“그럼 숙소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남의 일을 방해하고 난리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방해가 아니라 도와준 거거든?”
소년, 트로웰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뻔뻔한 모습에 라피스는 욕설을 내뱉으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구해주는 걸 핑계 삼아 화풀이나 실컷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저 얄미운 대부 때문에 전부 다 그른 듯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냥 곤란해 보이는 것 같길래.”
“장난해? 네가 언제부터 남의 곤란한 사정에 그리 관심이 많았다고?”
“엘과 관계된 사람들이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얼굴에 라피스는 다시 머리를 짚었다. 엘의 관계자라서 도와줬다고? 이쯤 되면 성격이 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 자체가 바뀐 수준이었다. 정령왕 하나 새로 태어났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바뀔 수가 있나? 아무래도 이 대부가 뭔가 이상한 것을 주워 먹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엘이 이상한 것을 먹였거나.
“에, 엘? 혹시 엘……님과 아는 사이십니까?”
대화 속에 섞인 낯익은 이름을 용케 알아들은 페리스가 기겁하며 물었다. 트로웰은 돌아보았고, 페리스는 헛숨을 삼켰다.
무심하리만치 고요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치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환상이 이어졌다. 청명한 하늘과 그 아래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대지의 운동.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 그곳에서 페리스는 아주 볼품없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허억!”
“어이, 페리스? 갑자기 왜 그래? 이봐!”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의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그를, 기사들이 당황하여 부축했다.
견디려 할수록 더 심하게 압박해오는 기운에 페리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페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와 함께.
―너무 예민한걸. 엘이 도와준 부작용인가? 친화력이 지나칠 정도로 상승했군. 들킬 생각은 없었는데.
“……!”
그 순간 온몸을 억압하고 있던,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억눌려 있던 숨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자 그는 급하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흐읍! 쿨럭, 쿨럭!”
“어이, 페리스! 괜찮아? 설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콜록! 하아, 괘, 괜찮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잠깐 과호흡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걱정스러운 말들에 차분히 대꾸한 페리스는 다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로부터 전해졌던 끝 모를 아득한 느낌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 모습을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짙푸른 녹음이 펼쳐지던 환상. 숨 막히도록 강한 존재감이 경고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심장을 두드렸다. 머릿속을 직접 파고드는 것 같던 음성도 선명히 기억했다. 난처한 듯 중얼거린 목소리는 분명히 들킬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대체 무엇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들을 도운 건 계획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 마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정령술을 공부하며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땅의 왕을 만났을 때에는 그 생각을 조심하라. 마주하는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은 그의 지배하에 속함이니. 진실을 감추는 자는 화를 당하게 되리라.
그건 바로 땅의 정령왕 트로웰을 언급했던 부분이었다. 미래를 읽고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투시한다는 대지의 왕. 네 정령왕 중 풍요와 지성의 상징이자, 수많은 예언자들과 현자들의 어버이.
‘설마…….’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다시금 전신에 휘몰아쳤다. 페리스는 급히 숨을 죽이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경련이 이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 트로웰이 빙긋 웃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딸꾹질을 시작한 페리스를 뒤로한 채, 트로웰은 라피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모처럼 나왔으니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안내해줘. 그게 네 역할이잖아.”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 이따 다시 얘기해.”
라피스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돌아서기 전 가볍게 보낸 눈짓엔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