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이런, 완전히 갇혔네.”
입구 쪽으로 다가간 엘이 바위를 두드려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알리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알리사.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아래로 내려가야 했으니까.”
울먹이며 사과하는 알리사를 본 엘이 상냥한 얼굴로 달랬다. 다른 일행들도 그녀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데르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문이 닫힌 걸 보니 장소는 제대로 찾은 것 같군요. 통로를 막았다는 건 침입자를 감지했단 뜻입니다. 아마 던전에 있을 장치들이 작동되기 시작했을 겁니다.”
“장치요?”
“이 던전은 마검을 봉인해 두기 위해 만들어졌을 테지요. 원래 이런 목적의 던전은 침입자를 제거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는 편이라 위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지금부턴 아무거나 함부로 건드리거나 밟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가능한 한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자제하십시오.”
그의 말에 일행들이 모두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우리 앞쪽에 펼쳐져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통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지하로 이어지는 길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안으로 쭉 연결되고 있는 야명주의 희미한 빛이, 마치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쩍 옆을 보자 바짝 굳어 있는 이사나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전에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자아, 이사나. 뭘 그렇게 굳어 있어? 힘내자. 이제 막바지잖아.”
하지만 나보다 엘이 말을 건네는 것이 더 빨랐다. 기운을 북돋아주듯 활기한 음성에 이사나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네, 고맙습니다, 엘 님.”
“고맙긴. 너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충분히 강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별 일 없을 거야. 그보다 이곳만 무사히 다녀오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 형님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흥분되지 않아? 난 너무 기뻐서 몸이 다 떨릴 정돈데.”
“예, 맞습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사나의 얼굴이 감동으로 일렁거렸다. 그들의 깊은 교감 속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자, 그럼 다들 출발할까?”
엘의 말에 일행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인솔을 따랐다. 그 무리에 섞여들지 못하는 건 나와, 여전히 엘을 꺼리는 데르온밖에 없었다.
“저자, 작정하고 당신의 자리를 집어 삼키고 있군요.”
앞서 걷는 무리를 노려보면서 데르온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여요?”
“네. 제 눈엔 저자가 당신과 닮은 얼굴을 이용해서, 본래 당신에게 가야 할 호의를 빼앗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분하지도 않습니까? 계속 방치하면 전부 삼켜질 겁니다.”
나직한 경고에 나는 살짝 숨을 크게 쉬었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삼킨 건 내 쪽이었을지도 몰라요.”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에도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는 일행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보였다. 내가 빠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무리를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저 곳에 내 자리가 있기는 했던 걸까? 선대가 아들처럼 사랑한 계약자. 그의 소원으로 형성된, 계약자와 판박이처럼 똑같은 성격과 얼굴을 가진 나. 결국 복제하고 있는 것은 나. 그러니까, 그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나.
결국 나는 삼켰던 것을 그저 다시 뱉어내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잃어가는 것을 괴로워해선 안 된다. 이것 역시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억지로 다잡은 마음이 가슴 안을 할퀴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아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삼킨 걸 전부 다 뱉어내고도 내가 버틸 수 있을까. 호수의 표면에 돌이 던져지는 것처럼, 자꾸만 마음속에 파문이 인다. 던져진 돌을 따라 내 의지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왠지 갈수록 지탱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 * *
“무슨 용건이야.”
라피스는 뚱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티 한 점 없이 새하얀 피부, 사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큼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이 그를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머리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 길고 풍성한 붉은 머리칼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넘실거렸다. 바로 그녀가 눈빛만으로 사람을 홀린다고 알려진 클리프 상단의 총수 이카나였다.
물론 여인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라피스는 그녀의 유혹적인 몸짓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단지 ‘나이 먹고 저게 무슨 추태인가’라는 시선만을 싸늘하게 보냈을 뿐이었다.
“애쓰네. 그렇게 헐벗어서 순진한 인간들 꾀고 다니면 기분이 좋아?”
“시끄러. 이건 그냥 이번 유희의 설정일 뿐이거든?”
“변태 총수가 설정이야?”
“아냐!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고 요염한 여인 총수라고!”
뭘 그런 이상한 설정을 했냐고 묻는 얼굴에 이카나―이프리트가 울컥해서 대꾸했다. 덕분에 그린 듯이 짓고 있던 유혹적인 미소가 사라지자 라피스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다 아는 사이에 원래대로 해, 원래대로. 네 웃기지도 않는 유희에 장단 맞춰줄 기분 아니니까. 게다가 그런 꼴로 그 설정은 좀 힘들지 않겠어?”
“내가 어디가 어때서?”
“성숙미가 전혀 없잖아. 공들여 가슴을 만들면 뭐해? 그래 봤자 이제 막 소녀티 벗은 풋내기 처녀일 뿐인데. 완벽하게 할 거면 연령대도 같이 높이든가.”
“연령을 바꾸는 건 유지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간단 말이야! 그리고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거든? 이곳 남자들이 날 보면 얼마나 얼굴을 붉히는 줄 알아?”
“아, 그거 말인데. 내가 좀 알아보니까 이 제국 인간들이 눈이 많이 낮은 모양이더라고.”
“……너 진짜 재수 없어.”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한마디도 굽히지 않고 받아치는 말에 이프리트는 입술을 악물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에서 짜증 나는 녀석이라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묻어나왔다. 라피스 역시 동일한 감정으로 이프리트를 노려봤다.
전대 이프리트 때도 그랬지만, 그는 정말 불의 정령왕과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기운이 아니라 감정적인 문제다. 지나치게 화려한 외형이라든가, 거침없고 거만하며 위풍당당한 성격은 불의 속성을 지닌 자들에게서 대체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 속성을 가장 강하게 타고나는 것이 레드 드래곤이다 보니, 불 그 자체인 이프리트의 모습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보통은 자신과 닮은 존재에게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라피스는 반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종의 동족혐오에 가까웠다. 이번 이프리트는 여성체라고 해서 귀여운 맛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웬걸. 상성에 성별은 상관없다는 깨달음만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부른 이유가 뭐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묻자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한 뒤 근처에 있던 두루마리를 하나 집어 그에게 던졌다. 무심코 잡아 챈 라피스가 얼굴을 찌푸린 채 눈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밀서야. 황제의 기사들이 이곳으로 오는 중인 건 알지? 우리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으로 위장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거의 다 도착했단 연락을 받았거든. 그런데 오늘 새벽 마지막 관문 앞에서 발목이 묶인 것 같아.”
“뭐야, 붙잡힌 거야?”
“아직 정체를 들킨 건 아냐. 그들의 신분을 문제 삼는 상황이긴 하지만.”
“잡힌 거 맞네.”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얄미운 대꾸만 할까. 이프리트는 다시금 이를 갈며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외모가 성격을 이기지는 못한다더니. 쓸데없이 말끔한 얼굴 가죽 말고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전대의 엘퀴네스가 그와의 계약을 수차례 거절한 심정을 이제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이렇게 울화가 치미는데, 직접 계약한 관계였으면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그 거절당한 기억 때문인지 지금 엘과의 계약은 제법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저래서야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진 활용해 줘야겠지. 이프리트는 초반의 목적을 상기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위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단지 요즘 우리 상단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을 뿐이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는 놈들이 있잖아? 이번에도 그런 종류인 것 같아.”
“흐응, 마신전이야?”
라피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하면서 두루마리의 내용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길게 펼쳐진 종이에는 현재 기사단이 처한 상황이 구구절절한 어휘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위장을 위해 모조로 만든 용병패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용병 길드에 정식으로 등록되는 건 동패부터로, 그 외의 지망생들이나 임시직들에겐 나무(木)패가 발급된다. 나무패는 딱히 신원을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한테나 발급해주는 것이라, 구하기도 쉽고 모조품을 만들기도 쉬웠다. 황제의 기사들이 사용한 모조품 역시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워낙 허술한 구석이 많은 만큼, 본래 나무패 자체는 활용도가 크지 않았다.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선 다른 신분패를 보유하고 있거나 길드에 등록된 정식 용병이 동행하여 보증을 해줘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검문에서 걸린 게 당연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규정이 완벽히 지켜지진 않았다. 고용 계약을 마친 상태에선 고용주의 신분만 확실해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길드의 관리를 받는 건 번거로운 데다 세금도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하급 용병 중에선 일부러 길드에 소속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그런 점은 용병을 고용하는 쪽 역시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정식 용병보다 나무패를 지닌 용병들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무패만으로 구성된 용병단도 드물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실태가 이렇다 보니 관문의 병사들이 그 부분을 문제 삼는 일 역시 매우 흔치 않은 경우에 속했다. 클리프 상단의 신원 증명이 부족하지는 않을 테니 누가 보아도 노골적인 시비였다.
“보통은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조금 괴롭히다 놔주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무조건 지하 감옥까지 끌고 들어갈 작정인 것 같아. ‘용병단’의 신원만 문제 삼고 있는 상황이라 상단에서도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어. 아마 이런 식으로 우리 쪽의 평판을 떨어트릴 작정이겠지. 신원을 보증하지 못하는 상단이란 인식이 생기면 어떤 용병단도 우리와 계약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
“그런데?”
“상황은 전부 들었잖아? 감옥에 갇히면 족히 한 달은 나오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해. 기사들의 정체를 들킬 확률도 굉장히 높아지지. 네가 가서 해결 좀 해줘야겠어.”
“내가 왜?”
삐딱한 대꾸에 이프리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물론 라피스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내가 부탁받은 건 이사나의 사촌이라는 여자를 보호하는 것뿐이야. 그 외의 것까지 맡을 생각 없어.”
“이것도 그 일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야. 황제의 기사들은 앞으로 에이프릴 공녀를 도울 사람들이라고. 그들에게 닥친 위기가 곧 네 아가씨의 위기나 다름없단 말이지.”
“내 아가씨는 누가 내 아가씨야? 웃기지 마. 귀찮은 일은 전부 나한테 떠넘기려는 수작인거 모를 줄 알아?”
라피스가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리자 이프리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곧 이카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화사하게 웃었다.
“어머나,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엘이 이 사실을 알면 좀 실망하겠네.”
“뭐야?”
“그렇잖아. 기껏 힘들게 마검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이곳 상황이 엉망이 되어있으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어? 공녀 쪽이 기반을 닦아둬야 귀환한 다음 일을 진행하기도 훨씬 수월해질 텐데 말이야. 정말 실망할 거야. 그치?”
“…….”
“이참에 아무나 믿고 일을 맡겨선 안 된다는 것도 깨닫는다면 좋을 텐데. 하긴, 아무리 엘이 순진해 빠져도 이런 것까지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약도 다시 재고해 보라지, 뭐.”
젠장!
결국 그로부터 얼마 후 라피스는 이를 갈며 관문 쪽으로 향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에게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물의 정령왕과의 계약일 것이다.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사실이 오늘만큼 짜증 난 적이 없었다.
“다신 이런 부탁 들어주나 봐라.”
애초에 남아달라는 부탁에 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귀찮은 일들이 떠넘겨질 줄 알았다면 아무리 간절히 요청해도 절대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수개월이 넘도록 방치되고 있는 것도 불쾌한데,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피를 토할 때까지 마나를 죄다 뽑아가질 않나. 그 사실에 불만을 품었더니 무신경하다고 혼나기까지 했다. 그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손해만 넘치는 거래였다.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겠다? 좋아, 뒷감당에 몸서리를 치게 만들어주지.”
붉게 타오른 두 눈이 복수심으로 희번덕거렸다. 황제의 기사들이란 게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귀찮게 한 대가는 톡톡히 지르게 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