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88화 (188/608)

제188화

“소드 마스터인 데다 전대 엘퀴네스의 계약자였다고 했던가요. 저자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연스러운 존재는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인간이란 종족이 주신의 은총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계는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다수의 기적이 겹치는 건 정말 드문 일입니다. 하물며 그만한 성취를 이룰 정도의 나이로 보이지도 않는군요. 저렇게 주신의 특혜를 한 몸에 받은 듯한 존재가 그저 우연히 생겼을 리가 없습니다. 물의 왕께선 저자를 예의 주시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런 류는 반드시 언젠가는 뒤통수를 치거든요.”

“그, 그래요?”

“제 경험상 장담합니다. 특히 저자의 생김새는 정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神)의 외모는 유일무이한 것. 마찬가지로 신에 가까운 정령왕 역시 그러하지요. 아름다움의 수준을 견줄 수는 있어도, 어느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외형을 가질 순 없습니다. 그건 드래곤의 마법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의 왕과 똑같이 생긴 인간이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다시 침묵했다. 엘이 아니라 내가 그쪽을 닮은 거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데르온 역시 그 이상의 말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엔 자연히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뒤쪽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들 덕분에 말없이 걷는 길이 고요하진 않았다.

데르온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주위의 냄새를 맡더니 반가운 말을 꺼냈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엇, 정말요?”

“네, 바로 저 앞입니다.”

기다려왔던 순간에 나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서둘러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가리키는 쪽을 확인한 나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가운 기분을 표현하기도 무색하리만치, 보란 듯 길이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밑은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데르온, 저 앞은 절벽인데요?”

“……그렇군요.”

이어지는 대답이 조금 느렸다. 그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저곳이 확실합니다.”

재차 거듭된 확언에 나와 일행들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더 나아갈 수 없이 끊어진 길.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허공일 뿐, 그 어디에도 마검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릴 만한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절벽 아래에 있나 본데.”

“으음, 역시 그런 건가.”

츠츠츠―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생각을 차분히 이어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몹시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에서 새카만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바짝 가시를 세운 둥그런 형태가 거대한 성게 같기도 하고, 억센 밤송이 같기도 했다. 그 양옆으로는 몸체보다 더 큰 4쌍의 다리가 갈고리처럼 뻗어있었다.

“……지옥 땅거미?”

지난 며칠간 온 숲을 다 헤매고 다녀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던 녀석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문제는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기겁하는 내 옆에서 엘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막다른 길이라 해볼 만하다 싶었나 보네. 밑은 벼랑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테고, 잘 밀어붙이면 떨어트려 죽일 수도 있을 거라 여긴 건가? 역시 똑똑한 놈들이라니까.”

어느새 사방이 전부 검은 덩어리들로 가득해졌다. 바닥은 물론 나무까지 바글바글 뒤덮은 탓에 새카만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을 굳힌 이사나가 알리사를 보호하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시벨리우스 역시 주위를 경계하며 엘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 엘?”

“흠, 글쎄. 하나하나 다 해치우기엔 좀 귀찮은데.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줄까?”

“응? 그게 무슨…….”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별안간 검을 뽑아든 엘이 그 자리에서 곧장 지면에 그것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쩌적,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일어나더니, 동시에 바닥이 형편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밑이 허전하다고 느꼈을 땐 어느새 디딜 곳이 사라져 있었다. 그 의미를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꺄아아악!”

“알리사!”

비명소리와 함께 모두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나를 향해 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을, 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행들은 전부 무사했다. 내가 큰 물기둥을 만들어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들을 하나씩 받아냈기 때문이다.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도록 위쪽에서부터 삼켰더니 물을 좀 마시긴 했지만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이때만큼 내가 정령왕이란 사실을 감사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한동안 미동 없던 시벨리우스도 내가 일행들을 구하기 시작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본체로 변해서 엘을 태우고 날았다. 덕분에 일행들 중에서 물에 젖지 않은 건 나를 제외하면 그 두 사람뿐이었다.

“다들 무사해?”

“으아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늘어진 상태에서 물을 몇 모금 뱉어낸 알리사가 탈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사나와 데르온도 조금 전보다 확연히 지친 모습이었다.

“와아, 역시 정령왕은 굉장해. 이런 방법으로 받아낼 줄은 몰랐네. 모두 괜찮아?”

때마침 엘을 태운 유니콘이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일행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면서도 엘은 전혀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내려서는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듯이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하하, 미안, 미안. 많이 놀랐어?”

“지금 웃음이 나와? 다짜고짜 지면을 무너트리다니! 그러다 누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어쨌든 전부 무사하잖아. 시간을 절약하려면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았어. 게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누구든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엄청난 짓을 벌여놓고도 가볍게 넘어가는 엘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울컥해서 더 항의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를 잡은 내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시벨리우스였다.

“그쯤 해 둬.”

“하지만!”

“조금 과격한 방식이긴 했지만 엘의 말대로 그 상황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어. 어차피 우린 벼랑을 타야 했고, 수많은 몬스터들을 일일이 잡고 있을 수도 없었잖아. 결과적으론 전부 무사하니 이렇게 화를 낼 일도 아냐.”

“결과만 괜찮으면 다 좋다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뭐?”

“애초에 뭘 그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런 일에 어떻게 될 만큼 약한 일행은 아니잖아. 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다들 알아서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은 있어. 엘은 그걸 알고 있었을 뿐이야.”

화가 날 정도로 차분한 말투에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힘을 주어 노려보자 시벨리우스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마주 응수했다. 그나마 내 심정을 이해하긴 하는지 평소처럼 아주 퉁명스럽지는 못하고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 자. 다들 싸우지 마.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든 몬스터들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었나 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데만 집중해서 미처 다들 놀랄 거란 것까진 생각을 못했어. 용서해줘, 지훈. 응?”

대치하던 상황은 엘이 끼어들고 나서야 간신히 종료됐다. 조르듯이 사과하는 사람에게 더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런 일을 벌일 땐 미리 예고라도 해줘.”

“응, 그럴게. 정말 미안.”

엘이 재차 사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로 난감해하는 모습이라 나도 완전히 마음을 풀었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 여기서 더 다그쳐 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른 일행들은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흥분하는 것도 바보 같았다. 시벨리우스의 말 역시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나서서 구하지 않았더라도 일행들은 스스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다들 그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으니까. 그러니 엘은 추락해도 모두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거다. 결국 나 혼자만 일행들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끄럽고 괴로워졌다.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데 죄송하지만, 다들 이곳으로 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 멀찍이서 데르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이동했는지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절벽 바로 밑에 있는 구석진 장소였는데, 그 앞으로 무성한 덤불이 자라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데르온?”

“관심을 가지실 만한 걸 찾은 것 같습니다.”

관심을 가질 만한 것?

나와 일행들은 의아해하면서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데르온이 덤불의 한 부근을 손으로 걷어냈다. 당연히 벽으로 막혀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뒤쪽이 텅 비어 있었다. 그 너머로 또 다른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이윽고 드러난 광경에 나는 살짝 숨을 삼켰다. 통로 안쪽 빼곡한 바위덩어리들 틈 사이에 새카만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터를 닦아 지하로 이어지는 형태를 봐선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은 아니었다. 말없이 숨만 삼키고 있는 일행들을 대신하듯, 데르온의 담담한 음성이 울렸다.

“던전입니다.”

* * *

동굴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둥그스름한 내부는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것을 증명하듯 이음새가 전혀 없었고, 표면이 매끄러웠다. 벽면 쪽엔 마름모꼴 형태의 돌멩이가 일정 간격으로 하나씩 박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희미한 빛을 품고 있었다. 마치 돌 자체가 스스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횃불도 없는 동굴 안이 환한 이유가 바로 그 덕분인 듯했다.

“이게 뭐지? 전구……일 리는 없고.”

“야명주야.”

호기심에 들여다보고 있자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야명주?”

“……몰라?”

“그게 뭔데?”

되묻는 말에 시벨리우스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보석의 일종이야. 랄케라고 하는, 주위 성질을 강하게 흡수하는 광물이 있거든. 이 광물에 벼락이 떨어지면 빛을 발하는 성질로 변해. 그렇게 변한 광물을 가공해서 만든 보석이 바로 야명주지. 랄케 자체도 구하기가 어렵고, 공정도 까다로워서 상당히 귀한 보석이었어.”

“헤에, 그렇구나.”

감탄하면서 중얼거리자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더 복잡하게 변했다.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 있냐는 의문을 담은 시선이 나를 천천히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정령왕이라면 태어난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지니는 게 당연한 지식일 테니까.

“야명주라고요? 이게 전부 야명주란 말입니까?”

뒤늦게 우리의 대화를 접한 이사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반응했다.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거둔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 게다가 빛이 일정한 걸 보니 전부 한 덩어리에서 나온 거야. 이 정도 크기면 부르는 게 값이었을 텐데, 그걸 고작 이런 구석진 던전에나 박아두다니. 이것도 청금석처럼 가치가 많이 떨어졌나?”

“아, 아뇨. 야명주라면 지금도 상당히 값비싼 보석입니다. 손톱 크기 하나면 저택 하나를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오히려 가치가 더 올랐네. 그렇다는 건 이 던전을 만든 당시에도 시세는 비슷했을 거란 말인데. ……이 던전을 만든 녀석이 누군지 상당히 돈이 썩어 넘치는 작자였던 모양이야.”

“앗, 나도 야명주 알아! 그거 굉장히 귀한 거 맞지? 귀부인들의 사교회에 어느 공녀가 야명주로 만든 브로치를 차고 나와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거든.”

아는 단어가 나와서 기쁜지 알리사가 냉큼 대화에 참여했다. 덧붙인 말에 의하면, 야명주 브로치를 차고 나온 공녀는 그 날의 주인공이 되어 뭇 여인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 몸에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그 다음 사교회에서 다른 여인이 야명주로 만든 귀걸이를 걸고 나왔고, 또 다음 사교회에서는 황녀가 야명주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나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나.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기 싸움 중에서는 역대 가장 큰 규모로, 다음 경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황녀가 구입한 목걸이가 너무 비싼 나머지 황실 재정이 휘청거리자, 분노한 황제가 야명주로 된 장신구의 착용을 일절 금지했기 때문이다. 전제왕권이라 가능한 마무리였다.

“가뭄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한심하지 않아?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진짜 예쁘긴 하네. 그냥 봐도 굉장히 비싸 보여. 이걸 내다 팔면 전부 얼마지?”

“글쎄, 작은 왕국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헉! 이런 곳에 두긴 좀 아깝다.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던전 안의 것들은 어지간하면 건드리지 않는 게 낫…….”

시벨리우스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이미 알리사가 야명주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뒤늦게 그의 말을 들었는지 알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돌아보았다. 이사나가 낭패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는 순간 조짐은 일어났다. 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동굴 전체에 큰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알리사, 이리로!”

당황한 알리사가 야명주에서 손을 급히 떼어낸 후 이사나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무사히 안착한 것과 동시에 뒤쪽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차 싶은 마음에 돌아보았을 땐 이미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까맣게 막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굴러들어와 박힌 것 같았다. 아마도 던전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면 닫히도록 설정되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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