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그러니 당연하게도 상대는 더욱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직된 몸에서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경악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후는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다. 상대는 엘이 휘두르는 검을 거의 받아내지 못했다. 속도를 못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엘의 공격 패턴이 워낙 다양해서 대응하기 힘든 것 같았다. 콰앙! 콰아앙! 두 사람의 기운이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우렁찬 소음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굉장해…….”
이사나는 물론, 이런 전투에 문외한인 알리사조차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엘을 지켜보았다. 그 옆에서 시벨리우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이 진심으로 상대하면 피할 수 있는 녀석이 거의 없거든.”
흐뭇함이 느껴지는 말투에서 그를 대견해하는 기분이 한껏 묻어나왔다.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엘은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이제 끝이군.”
콰앙! 콰지직!
그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망토를 쓴 남자가 바닥에 처박혔다. 엘의 힘에 완전히 밀려난 결과였다. 그는 바닥에 긴 자국을 남기고도 한참을 더 멀리 쓸려가서야 간신히 멈췄다.
“……크윽!”
구겨진 듯 엉망으로 웅크린 남자에게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을 잃은 것 같진 않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도 아닌 것 같았다. 둘러쓴 망토는 이미 완전히 넝마나 다름없었다. 가볍게 착지한 엘이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검을 겨눴다. 전투의 승패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후우, 하마터면 죽일 뻔했네. 아무튼 상대가 강하면 적당히 손을 쓸 수가 없어서 곤란하다니까.”
“…….”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상태에서 해봤자 상당히 효력이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엘은 마치 고전한 사람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고전의 기준이 일반인과 매우 다르단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황당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이사나와 알리사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것은 시벨리우스뿐이었다.
“이 녀석 마족인 것 같은데. 살려두려고?”
“응, 지금부터 필요할 거야.”
‘마족?’
시벨리우스와 엘의 대화를 듣고서야 나는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서 미약한 마기를 감지했다. 익숙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마족 특유의 기운이었던 모양이다.
루카르엠이 돌아간 이후로는 전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설마 그 사이 또 감시가 붙었던 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지훈, 이 녀석 치료 좀 해줘.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정도면 돼.”
“아, 으응.”
나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망토를 거둬내자 마족 특유의 새카만 흑발이 흐트러졌다.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한 눈에 준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상당히 익숙했다. 나는 치료하기 위해 손을 뻗다가 그 자리에서 잠시 굳었다.
“……데르온?
* * *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론 사막은 산지에 더 가까운 모습이 되어갔다. 평지가 사라지고 깎아지른 듯한 경사들이 나타나면서 경로는 급속도로 험악해졌다. 이미 지도란 존재는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 하다못해 나침판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앞으로 이동하는 발걸음에 망설임을 담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이쪽 방향입니다.”
단조로우면서 무뚝뚝한 음성에 일행들은 아무런 의문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 저 하나만 의지하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품을 만도 하련만, 남자는 그저 묵묵히 길을 찾는 일에만 집중했다.
새카만 흑발에 붉은색 눈동자. 후드를 쓰지 않아 훤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마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감추고 있던 마기도 이젠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무덤덤해 보이면서도 의외로 쑥스러움을 잘 타는 성격이란 건 최근 그와 어울리게 되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는 얼마 전 엘에게 호된 방식으로 붙잡힌 마족― 데르온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몸 상태가 정상이 되자마자 데르온은 침착하게 인사부터 건넸다. 엘은 적당히 치료하라고 했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대화까지 나눴던 사람을 방치할 순 없어서 완벽하게 치유한 참이었다. 혹시 다시 저항하고 도망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전에 만난 그의 성격이라면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일찌감치 체념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보다 재회가 빨랐네요, 데르온. 이런 방식을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요.”
“면목 없습니다.”
웃으며 건넨 말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하면서도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이 상황이 몹시 민망하긴 한 모양이었다. 애초부터 그에겐 호감이 더 컸기 때문에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설마 또 잠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번에도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루카르엠이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쪽 마왕님도 참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네요.”
“……왜 절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그건 제가 결정한 게 아니라서요.”
난처한 기분으로 엘을 돌아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평온하던 데르온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안녕? 난 엘이야. 과격한 방법을 써서 미안하게 됐어. 딱히 네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냐.”
“……원하는 게 뭐지?”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경계심을 드러낸 눈빛이 엘을 천천히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정령왕보다 인간을 더 견제하는 상황이라니. 내게 적의가 없다고 좋게 여겨야 할지, 인간보다 만만하게 본다고 반성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후후, 다짜고짜 본론이야? 그래도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라 다행이네. 네가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말해라.”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그저 마검 하나를 찾아줬으면 해서 말이야.”
“마검?”
엘의 말에 반문하던 데르온이 곧장 사나운 빛을 품고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봤던 그의 모습 중에서 가장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내 검은 넘겨줄 수 없다. 차라리 죽여라.”
악문 입술 사이에서 이를 가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멸과 치욕의 감정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가득 채우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서슬 푸른 반응에 나를 비롯한 지켜보는 일행들 모두가 긴장했다. 하지만 엘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하, 뭘 오해하는 모양이네. 걱정 마. 나도 마검이 귀한 줄은 알아. 마족들 중에선 제 검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녀석이 많다는 것도. 그런 걸 억지로 강탈할 생각은 없어.”
“……내 검을 달라는 게 아니란 건가?”
데르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것과 더불어 나 역시 의아해하며 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그가 데르온의 검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검을 찾는 상황에서 마족을 붙잡은 만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연상일 것이다. 엘은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물론 네가 준다면 일이 더 편해지긴 하겠지만 그걸 바라는 건 아냐. 그냥 말 그대로 찾아달라는 거야.”
“그게 무슨…….”
“이 지역 안 어딘가에 주인 없는 마검이 봉인되어 있대. 하지만 위치를 전혀 알 수가 없어. 마족은 다른 마기와 공명한다지? 너라면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때서야 나는 엘이 굳이 그를 생포한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마검을 찾기 위한 길잡이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데르온 역시 의미를 파악했는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만 하면 되나?”
“응, 해 줄 거야?”
“마치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물론 이것도 강제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널 살려둔 보람 정도는 느끼게 해주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
“……좋아, 해 보지.”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찌푸린 데르온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탐탁지 않은 기색이긴 했지만 이 상황에 순응하기로 한 것 같았다. 역시나 체념이 빠른 사람이었다.
이후로의 상황은 일사천리였다. 엘의 예상대로 데르온은 근방에 있는 다른 마기를 감지해 냈다. 다만 근방이라는 건 그저 에두른 표현일 뿐이고, 실제론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기척 또한 매우 희미한 편이라 정확히 찾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백지에 가까운 지도에 비하면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존재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때요, 데르온?”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 즈음 나는 다른 일행들과는 동떨어져 데르온과 동행하는 일이 더 잦았다. 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에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질렸고, 달리 교감할 만한 화제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썬 그들 사이에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에 끼어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
데르온은 그런 면에서 나와 합이 잘 맞는 동지였다. 살벌한 첫인상 탓인지 그는 유달리 엘을 꺼렸으며,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매시간 엘과 함께 하는 다른 일행들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 입장에선 편하게 어울릴 수 있어 좋았지만 말이다.
“이 여정에도 드디어 고지가 보이긴 하는군요. 전부 데르온 덕분이에요.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일을 강제로 떠넘긴 셈이라 미안한 마음이 더 크지만요.”
“괜찮습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제와 새삼스러운 질문이긴 합니다만, 마검은 왜 찾으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 때문에 착취당하고 있는(?) 입장에선 당연히 품을 만한 의문이었다. 별로 숨길 만한 일도 아니라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예요.”
“마신관의 저주입니까? 마검을 필요로 하시는 걸 보니 꽤 강력한 저주인가 보군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흐음, 저주를 푸는 용도라면 마검이 통째로 소비되겠군요. 재활용은 힘들겠네요.”
중얼거리는 데르온의 얼굴이 흐려졌다. 한눈에 봐도 마검을 아까워하는 기색이라 나는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족에게도 마검이 귀한가요? 마계에선 흔한 건줄 알았는데요.”
“드문 건 아니지만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닙니다. 마검은 마신의 힘이 서린 특별한 광물로만 제작이 되는데, 이 광물 자체가 구하기 어려운 편이거든요. 저희 마족들이야 좋은 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혈투도 감수하는 종족이니, 마검의 가치가 높긴 합니다.”
“그렇구나. 몰랐어요. 루카르엠은 굉장히 선뜻 건네주려고 했거든요. 아, 물론 계약서를 제시했으니 선뜻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습니까. 전 그 남자가 마검을 갖고 있단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좀처럼 무기를 소지한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굉장히 많던데요? 단검으로도 있고, 장검으로도 있고.”
“……빌어먹을 마족.”
“네?”
“아뇨, 별거 아닙니다. 그저, 제 검을 볼 때마다 자신에겐 좋은 무기가 없어서 부럽다며 비아냥거리던 어느 밉살맞은 얼굴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루카르엠 얘기구나.
나는 그가 이를 가는 상대를 단번에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왠지 지극히 루카르엠답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얄미운 성격은 만인 공통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루카르엠은 괜찮나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돌아가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아, 오해할까 봐 말해 두지만 그 부상엔 이유가 있었어요.”
“압니다. 어차피 자업자득이었겠죠. 본인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상대방을 골탕 먹이기 위해선 제 목숨도 내놓을 작자입니다, 그는.”
“……이런 말하기엔 좀 미안한데요, 루카르엠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남자의 생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정상입니다. 앞으로도 쭉 이해하지 않으시려고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굳이 납득함으로써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대놓고 독설에 가까운 말이라 나는 다시금 식은땀을 흘렸다.
“루카르엠을 굉장히 싫어하나 봐요?”
“제가 루카를 말입니까? 설마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오히려 존경하는 편입니다.”
“어? 그래요?”
의외의 대답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앞선 대화만 봐서는 개인적인 유감이 많은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데르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대를 홀리는 마력을 가진 존재죠. 그의 진가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를 흠모하게 될 겁니다. 그 재수 없는 빈정거림과 사람 좋은 척하는 얼굴이 무척 짜증나긴 하지만요. 그래도 시선만으로 소름을 돋게 하는 힘은 저절로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물론 그걸 악용하는 걸 볼 때면 가끔 죽여 버리고 싶을 때도 있긴 합니다만.”
……아니, 지금 하는 말들이 다 서로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왠지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선 느낌이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그쯤에서 얌전히 침묵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엘이란 자가 더 거슬립니다.”
“…….”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는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데르온의 시선이 뒤쪽의 무리를 흘끗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