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하하, 이것 참. 같은 이름이란 게 의외로 꽤 불편하네. 이게 벌써 몇 번째지?”
“으음, 그러게.”
“흠, 계속 이렇게 헷갈리는 것도 곤란하겠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내가 이름을 바꿀게.”
“응, 알았……뭐?”
마치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조였다. 덕분에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다른 일행들도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엘은 ‘그러면 됐지?’라고 말하듯이 방긋 웃었다. 황망한 기분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조치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결론을 맺을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이름을 바꿔?”
불만스러운 음성의 주인은 바로 시벨리우스였다.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엘에게 지극한 그가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잔뜩 굳어진 그와는 다르게 엘은 여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야 내가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잖아.”
“그래도 넌 본명이야. 진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어딨어? 누군가 바꿀 거라면 차라리 애칭 쪽을 바꾸는 게 낫지. 애칭 같은 거야 어차피 적당히 지어 붙이는 건데, 얼마든지 다른 걸로 해도 되잖아.”
살벌한 눈빛이 못마땅하게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의미야 뻔했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웃어주려고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명언(?)이 있기도 하고, 이왕이면 좋게좋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 들었어. 그 애칭, 트로웰이 지어준 거라고?”
“…….”
한순간 굳어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 덕분에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지만 표정이 변하는 건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내가 차분히 응시하자 시벨리우스는 더욱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차피 다 밝혀진 김에 그냥 편하게 물을게. 너, 스스로 정령왕이란 자각은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속이 없는 거냐고 묻는 거야. 설마 그 녀석이 누굴 생각하고 붙인 애칭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도 계속 그 이름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들어? 그것도 본 주인 앞에서?”
“…….”
지끈,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몸 안쪽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아릿한 감각을 의식하며, 나는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엘을 만났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 문제에 직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시벨, 그렇게 말하지 마. 그의 잘못이 아니잖아.”
오히려 상처가 된 건 나를 동정하는 듯이 감싸는 엘의 말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에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염려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속이 꼬인 탓인지 어떤 행동을 하든 전부 승자의 여유인 것처럼 느껴졌다.
“엘,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껏 해. 이름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는데 불쾌하지도 않아?”
“그래도 말이 너무 심했어.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쳤는데 그도 경황이 없었겠지. 당사자인 내가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더 야단이야?”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나서는 거잖아. 자기 권리를 찾기는커녕 네 쪽에서 이름을 바꾼다는 소리나 하고!”
“그럼 어떡해? 그렇게 하는 쪽이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은걸. 아무튼 트로웰도 참. 상황을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몰라.”
“흥, 그 녀석 속이야 뻔하지. 저 녀석을 너와 똑같이 꾸며놓고 네 대신으로 삼으려던 거 아니겠어?”
“트로웰은 그렇게 음습하지 않아. 그냥 나랑 닮아서 기쁜 마음에 무심코 붙인 거겠지. 우리들 엄청 많이 닮긴 했잖아.”
“전대 엘퀴네스의 바람에 의해서 말이지?”
“……못살아. 그것도 들었어?”
엘이 난감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한마디가 시벨리우스의 말을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숨에 기세등등해진 시벨리우스가 형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사나운 시선에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폭언을 퍼부을 기세였던 시벨리우스가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위축된 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널 탓하려던 건 아냐. 말이 심했다면 사과할게.”
“……아니, 괜찮아.”
“너도 피해자란 거 알아. 다른 정령왕들한테 농락당한 건 나 역시 유감스럽게 생각해. 아무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이제 그만 깨달아. 이게 바로 현실이야. 무작정 외면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
“…….”
“난 널 위해서 충고하는 거야. 더 창피당하기 전에 네가 알아서 제자리로 돌려줬으면 해. 설마 남의 대신으로 살고 싶어 할 만큼 자존심 없는 녀석은 아니겠지? 너도 정령왕이니 긍지 정도는 있을 거 아냐.”
이번엔 흐려지는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솟구쳐 뒤섞이는 감정들에 머릿속이 다 얼얼했다. 마치 얼음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시린 한기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나를 응시하는 시벨리우스의 시선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심각한 이야기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좌불안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새삼 시벨리우스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존심? 엘퀴네스로서의 긍지? 그런 건 몰라. 난 단지……진짜 내 자리가 있다는 게 기뻤을 뿐이야.’
명계에서 내가 잘못 태어난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안심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고. 인생을 제대로 꽃피워 보기도 전에 절명한 내게 신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실망했을 정도였다. 그럼 평범한 가족을 만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의 모든 이들이 내가 태어나길 바라고 있단 사실엔 가슴이 설렜다. 누군가 날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달콤한 일이었다. 그 기분 좋은 감각에만 취해있느라, 정작 오랜 가뭄에 시달렸다는 사람들의 고통은 크게 생각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벌을 받는 모양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대답을 잇는 것이 느렸다. 그 잠깐의 시간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엘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으음, 역시 안 되겠어. 이름은 그냥 내가 양보할게. 왠지 굉장히 못할 짓을 하는 기분이야.”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
이번에도 시벨리우스가 펄쩍 뛰어올랐다. 엘은 몹시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이름 같은 거야 아무려면 어때? 그런다고 내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뭐야, 시벨. 넌 내 이름이 달라지면 날 버릴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됐네.”
엘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짓자 시벨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울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바뀌어도 내가 아닌 건 아니다, 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당연하게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세상의 누군가에는 간절하게 쫓아도 닿을 수 없던 것이라는 건?
다시금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벨리우스는 대체 뭘 견제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나는 절대 그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을 잃는 건 무섭다. 나는 이미 과거에 한 번 내 이름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17년. 치열하다면 치열하게 살아온 그 삶 속에서 단 석 자의 이름은 내가 지닌 유일한 것이었다. 오직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처음부터 그 삶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멋대로 결론을 내리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애초에 가진 것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엘퀴네스란 낯설디낯선 이름을 받았지만, 직함이란 의식이 더 강해서인지 온전한 내 것이란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럴 때 엘이란 애칭이 생겼다. 내게는 처음으로 주어진, 제대로 된 이름이나 다름없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붙여준 것이었을지라도, 아니 정말은 누군가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던 거라고 해도. 내겐 그 이름이 마치 이곳에 존재해도 되는 자격처럼 느껴졌다. 내내 지니고 있던 전생에 대한 미련을 처음으로 끊어낸 날. 이 세상에서의 첫 발걸음을 응원해 준 사람에게 받은 이름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나한텐 몹시 특별한 의미였다.
“그냥 내가 바꿀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이런 말을 뱉어야 하는 것이 매우 힘겨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 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내 것이 아닌 건 붙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무시한 채 억지로 쥐려고 하면 내 손에 상처만 날 뿐이다. 전생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반응은 곧장 돌아왔다. 무리하지 말라는 듯한 시선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행히 목소리도, 표정도 전부 멀쩡했다.
“시벨의 말대로 내 쪽은 애칭이잖아. 게다가 네가 먼저 쓰던 이름이니까 바꿔야 한다면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미안해. 진작 이랬어야 하는 건데.”
“아냐, 나야말로 강요한 꼴이 된 것 같아서 오히려 미안하네.”
“어차피 나도 불편하던 참이었어. 계속 같은 이름을 쓸 순 없었을 테니 결국 어떻게든 동일한 결론이 났을 거야.”
“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긴 한데……그럼 정해 둔 이름은 있어?”
“아아, 그건…….”
그 순간 퍼뜩 떠오른 이름에 쓴 웃음이 지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 발전이 없는 모양이다.
“……지훈. 지훈이라고 불러.”
내키지 않은 걸 억지로 뱉으려니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다.
“지……훈?”
이곳에선 약간 생소한 억양 탓인지,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의미를 알려주는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이름을 입에 담는 데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는 걸. 내가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였으니까.
지저분한 고수머리에 못난이. 물거품 같았던 강지훈.
버렸던 이름을 다시 주워 삼킨 날이었다.
* * *
저녁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모처럼 실력을 발휘한 시벨리우스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한가득 내왔지만 모두 내 눈치만 보느라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나름대로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던 모양이다. 이러다 체하게 만들 것 같단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긴장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음, 그럼. 식사들 맛있게 해.”
“어? 엘 씨……아니, 지훈 님은 안 먹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알리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앞에선 적당히 먹는 시늉을 해 왔으니 당연했다.
“앞으론 내가 식사 자리에 함께 하는 일이 더 드물 거야.”
“왜, 왜? 우리랑 같이 먹기 싫어?”
“뭐? 아니, 그런 게 아니라……안 먹어도 되거든.”
볼을 긁적이며 말하자 알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답을 들은 사람 같았다. 그러다 곧 이유를 깨달았는지 이채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정령이라서…….”
“응, 뭐, 그런 셈이지.”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다시 한 번 내 정체를 실감함과 더불어,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단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먹었잖아? 그럼 계속 같이 식사해도 되는 거 아냐? 이제 와서 자리를 피할 것까진…….”
“으음, 그건 실은 일부러 참고 먹은 거야. 솔직히 말하면 안 먹는 게 제일 편해.”
“그, 그래?”
“응, 애초에 영양 공급이 필요한 몸이 아니라서 먹는 즐거움이란 걸 못 느끼거든.”
“먹으면 과식하는 기분이 들지?”
불쑥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엘이었다. 시선을 보내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미각이나 식감이 없는 건 아닌데 단순한 정보로서 받아들이는 정도일 뿐이고. 먹으면 속이 매스껍거나 답답한 기분이 들고. 더 나아가서는 몸이 오염된 것 같은 껄끄러운 기분까지 들고 말이야.”
“……응, 맞아.”
“헤헤, 역시. 아버지한테 들었거든.”
낯익으면서도 낯선 단어에 몸이 움찔했다. 방심하다 갑자기 허를 찔린 심정이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