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그 하는 양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던 카리브디스는 곧 목걸이에서 손을 떼어내곤 다시 아이의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정령 역시 냉큼 품 안에 들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게 마치 그의 의도를 읽으려는 것 같아 카리브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때까지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말없이 굳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마라.”
나직한 경고에 아이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브디스는 살짝 한숨을 내쉰 다음 여전히 얼어 있는 아이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아이는 황제와 연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정령사인 모양이다. 자세한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데려가야 했다.
“주인님. 제가…….”
그가 아이를 안아드는 것을 본 마부가 뒤늦게 달려와 허둥거렸다. 카리브디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 가겠다. 자네는 사람을 불러 시신을 수습하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품 안에서 아이가 가만히 몸을 떨었다. 카리브디스는 훌쩍이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파도가 조금씩 일고 있었다.
조만간 그를 전부 집어삼켜버릴 파도가.
* * *
“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누가 누구라고?”
확연히 떨림을 담은 목소리에 나와 이사나는 서로 난처한 시선을 교환했다. 알리사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얼굴 가득 경악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진짜 정체를 밝힌 뒤부터 쭉 같은 얼굴이었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가 어느새 벗겨져 나부끼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저, 정령왕? 진짜 엘 씨가 정령왕이야? 그것도 물의 정령왕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거푸 반복하는 질문에 나는 끈기 있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함께 하기로 결정한 뒤로 언젠가는 밝힐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그 날이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 혼자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마냥 놔둘 수도 없었다.
엘이 합류한 이후 우리는 인가를 벗어나 사막으로 곧장 진입했다. 근방은 전부 이시올타의 영역권이었고, 아직 마신교의 잔당들이 근처에 남아 있을 우려가 있으니 인가 쪽은 안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이 구간을 돌파해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 황량한 풍경만이 나날이 이어지는 일정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목적지는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내 정체를 밝힌 건 이사나와 충분한 의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알리사의 추궁이 날이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상황인 만큼 조심성이 흐려진 문제도 있었다. 앞으로도 실수는 계속 늘어날 테고, 그때마다 변명하느니 차라리 미리 밝혀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알리사.”
어색하게 사과를 건네자 알리사의 눈동자가 다시금 크게 흔들렸다. 지금 그 말로 인해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굳어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고, 이렇게 되니 차라리 후련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알리사는 심경이 매우 복잡해진 것 같았다. 내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정작 인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겉모습에선 인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나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훑어보며 내 몸 여기저기를 마구 만지작거렸다.
“그, 그치만 인간이랑 똑같은데? 정령이면 뭔가 조금 더 투명한 느낌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아? 아니면 촉감이 남다르다거나. 멀든이나 시큐엘의 경우엔 딱 봐도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데 엘 씨는 그런 게 전혀 없는걸?”
“정령왕은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거든. 이곳에서 형체를 이루고 있을 땐 상처도 생기고 피도 흘려. 물론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치면 나도 역소환 되지만.”
“그, 그런 거야? 그럼 신성력은? 치유술을 썼었잖아?”
“아아, 그건 신성력이 아니라 내 고유 능력이야.”
“고유 능력? ……헉, 맞아! 내가 본 책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었어! 물의 정령왕이 치유술로 사람들을 구한 이야기. 동화라서 지어낸 설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정말이었던 거구나.”
알리사가 말한 책이란 아마 트로웰이 줬다는 바로 그 책일 것이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어. 치유술을 쓴 걸 보면 분명 마신관은 아닌데, 다른 사제를 사칭했는데도 멀쩡했었잖아? 진짜 신관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고 들었거든.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힘도 세고. 그래서 어쩌면 신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런데 설마 정령왕일 줄이야…….”
멍한 얼굴로 중얼거린 다음 순간, 알리사는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가 응시한 사람은 바로 이사나였다.
“자, 잠깐! 그럼 이사나 씨랑은 어떤 관계인 거야? 물의 정령사와 물의 정령왕이라니. 그냥 우연히 만난 사이는 아닌 거 맞지?”
“이사나가 날 소환했어.”
“헉! 역시! 한마디로 말해서 이사나 씨가 정령왕의 계약자란 말이네?”
놀란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자 이사나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알리사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그랬구나. 어쩐지 너무 범상치 않더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으음, 뭐랄까. 자랑은 아니지만 난 상대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을 대충 알 수 있거든. 사회적인 중요도나 가치? 아무튼 그런 걸 저절로 아는 편이야. 느낌이 강할수록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위도 높은 편인데, 이사나 씨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렬하더라고. 그래서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건가 싶었는데, 정령왕의 계약자라서 그랬나 봐.”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알리사가 유난히 이사나에게 관심을 보이긴 했었다. 그 행동에 대장장이 팔론이 그를 귀족으로 확신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이사나는 실제 지위도 높긴 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대신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밝힐 용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치만 좀 이상하네. 정작 특별한 걸로 치면 정령왕인 엘 씨가 더 대단한 거잖아? 근데 엘 씨를 보면서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거든. 왜지?”
“그, 글쎄?”
“그건 알리사가 인간이라서 그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엘’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자 엘은 빙긋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활기찬 첫인상답게, 그는 여정에 합류하자마자 순식간에 우리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스스럼없이 친근한 말투라거나 우리를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마치 처음부터 함께 했던 것같이 자연스러워, 일행들도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그가 지닌 지식들은 곧잘 모두의 환심을 사곤 했다.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의외로 엘은 다방면에서 견문이 풍부했다. 심지어 정령에 관해서조차 정령왕인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았다(물론 이건 내가 좀 특수한 경우인 탓도 있지만).
“내가 인간이라서?”
“정령왕은 거의 준 신(神)이나 다름없어서 인간보다 상위 존재거든. 그래서 인간의 예지력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거야. 특히 정령왕 쪽에서 정체를 감추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지.”
“흐아아, 그렇구나.”
한숨 같은 탄성을 내뱉은 후 알리사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야 내가 정령왕이란 사실을 실감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며 나를 힐끔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왜, 알리사?”
내가 반응을 보이고서야 알리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한 어조로 말했다.
“어, 저기,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응? 뭘 어떻게 해?”
“정령왕이잖아. 내가 엘 씨한테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 이젠 존댓말 써야 하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평소처럼 해.”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알리사는 좀처럼 불편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 정체를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하, 알리사도 참. 그렇게 하면 엘이 더 곤란하지 않겠어? 엘은 알리사를 신뢰해서 정체를 밝힌 거잖아.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
“그치만…….”
“괜찮아. 정령왕이라고 해서 알리사가 아는 엘이 사라진 건 아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봐, 우리도 엘의 정체를 알지만 이렇게 편하게 대하고 있잖아? 엘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이야. 그치, 엘?”
능숙하게 동의를 구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엘은 그것 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알리사는 정령사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들 정령사는 정령을 너무 어려워하기만 해선 안 돼. 우린 가족 같은 사이니까.”
“가족……?”
“그래, 가족. 참고로 난 선대 엘퀴네스의 계약자였어. 정령사의 계보로 따지면 이사나의 직계 선조인 셈이지. 모르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엘이 장난스럽게 으스대자 알리사도 겨우 긴장을 푼 듯 웃었다. 덕분에 굳어 있던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단숨에 기세가 올랐다. 화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엘이 중심이 되어 이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엘 씨는 다시 계약 못 해?”
“정령왕과 말이야? 자격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의 엘하고는 불가능해. 이미 이사나가 있으니까. 정령왕은 각자 한 명하고만 계약할 수 있거든. 즉, 먼저 소환에 성공한 사람이 독점하는 구조인 셈이지.”
“그렇구나. 한발 늦은 사람은 굉장히 억울하겠다.”
“하하,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거야. 사실 지금이 워낙 특수한 상황이라 그렇지, 정령왕은 아무나 소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은 몇 세대에 걸쳐서 겨우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걸. 나만 해도 원래대로 치면 4천 년 전의 사람이잖아?”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럼 정령왕들은 그동안 계약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야?”
“아니, 드래곤들과 계약하지.”
“드, 드래곤?”
“응. 조금 전 말한 제약은 인간을 비롯해서 비슷한 수준의 인종 기준이고, 드래곤은 예외야. 몇 명하고든 원하는 만큼 전부 계약할 수 있어. 나랑 계약했을 당시에도 선대 엘퀴네스에겐 이미 다수의 드래곤 계약자가 있었지. 그들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기도 했어.”
“그럼 드래곤을 만나 봤단 말이네?”
“당연하지. 정령왕의 계약자 정도 되면 인맥이 굉장히 화려해진다고.”
“우와아! 부럽다. 나도 드래곤 보고 싶어!”
‘실제로 보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을 텐데 말이지.’
나는 까칠하고 거만한 어느 붉은 용을 떠올리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중에 만나게 될 테니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깨달을 일이었다. 지금만큼은 마음껏 환상을 품도록 내버려둬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별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알리사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그녀의 진짜 나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엘 역시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은 없지만 그만큼 대단한 녀석이 이 자리에 있잖아?”
“어, 누구?”
“시벨, 이 녀석 말이야. 그냥 평범한 엘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굉장히 고귀한 종족이거든.”
“헉! 유니콘? 그럼 시벨 씨도 위장한 거였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자부심으로 삼아도 돼. 어떻게 보면 드래곤보다 더 굉장한 존재니까.”
“에, 엘.”
추켜세워 주는 말이 쑥스러운 듯 시벨리우스는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주위의 공기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명랑하게 웃고 있는 알리사는 이미 내 정체에 대한 거부감 따윈 깨끗이 잊은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녀에게 정체를 밝힌 건 나로서도 조금은 모험에 가까웠다. 굳이 숨길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될까 봐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우려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아주 틀린 짐작도 아니었다.
이대로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엘의 유려한 화술 덕분에 무난히 넘어가는 듯했다. 특히 시벨리우스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밝힌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충격이 겹쳐지면서 오히려 상쇄된 것이다.
엘에게 고마운 시선을 보내자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시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마치 전염된 것처럼 내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 가진 복잡한 감정과는 별개로,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참, 그런데 엘 씨!”
“응?”
“어?”
그 순간 들려온 부름에 나와 엘이 동시에 응답했다. 그러고 나자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부른 사람―알리사의 시선이 엘에게 향해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알리사도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미안. 인간 쪽 엘 씨 말이야.”
“아아, 그래.”
머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주위가 썰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떠 있던 공기가 한순간에 식고,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나는 속으로 나직이 혀를 찼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겪는 일이었다.
엘과 함께한 후로 불편한 일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런 점일 것이다. 거울을 보는 것같이 똑같은 얼굴은 지니고 있는 색이 다른 탓인지 정작 착각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같은 호칭만은 자주 문제가 됐다. 내가 실수하지 않을 땐 엘이, 엘이 실수하지 않을 땐 대체로 내가 실수를 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내 판단에 따라 갈리는 편이었다. 엘은 누가 부르든 무조건 일단 반응부터 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사나의 경우엔 나와 알리사를 제외한 사람에겐 전부 경어를 쓰는데도, 그의 부름조차 헷갈려하는 일이 많았다.
서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상관없겠지만 그럴 때마다 일행들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당황해서 곤란했다. 이번에도 빠르게 굳어진 표정들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괜히 나 때문에 좋은 분위기를 망친 것 같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엘 역시 난감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