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으으,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상황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잔뜩 굳어 있던 분위기가 전환된 건 알리사가 입을 연 덕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나와 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알겠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시벨 씨가 알던 바로 그 옛날 친구라는 거지?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고, 결국 엘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시벨 씨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뭐가?”
“알고 있는 친구가 다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찾았잖아. 이제 우리랑은 같이 가지 않는 거야?”
“……!”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문제도 있었다. 시벨리우스가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던 건 날 엘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진짜 엘과 만난 지금은 굳이 동행을 계속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상황에 나는 조금 움찔했다. 시벨리우스 역시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즉답을 내리진 못하는 모습에 알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시벨 씨. 정말 안 가는 거야?”
“아니, 으음, 그치만…….”
난처한 듯 눈을 굴리던 그가 황급히 옆쪽에 있는 엘에게 시선을 보냈다. 의견을 묻는 듯한 모습에 엘이 빙긋 웃었다.
“계속 동행해도 괜찮지 않아?”
“어? 그래도 돼?”
“어차피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우리끼리 낯선 세상에서 적응해 나가는 것보다야 일행이 많은 편이 더 재밌을 거고. 이렇다 할 목적이 생길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다니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나도 끼워 준다면 말이지만.”
장난스럽게 웃는 시선이 내게 닿았다. 노골적으로 의향을 묻는 행동에 일행들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황의 특수성 때문일까. 왠지 주위를 감도는 공기가 긴장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야, 그건 당연하지. 그치, 엘 씨?”
이번에도 분위기를 전환한 건 알리사였다. 내 옷소매를 가볍게 쥐는 손길에 시선을 내리자 흐름이 가볍게 흐트러졌다. 덕분에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난 이사나만 괜찮다면 상관없어.”
“그래? 그럼 이사나 씨는?”
“나, 나도 괜찮아.”
“좋아! 그럼 동행하는 걸로 결정!”
경쾌한 외침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알리사의 얼굴에 걸렸다.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즐겁게 만드는 미소였다. 시벨리우스 역시 그 모습에 감화한 듯 내내 불편하던 표정을 거두고 부드럽게 웃었다. 덕분에 한층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알리사는 곧장 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일행이 되었으니 정식으로 인사할게. 당신도 엘 씨라고 부르면 되지? 난 알리사야. 앞으로 잘 부탁해.”
“하하, 응, 나도 잘 부탁해, 꼬마 아가씨. 정령사인가? 아직 어린 나이인데 굉장하네.”
“헉! 맞아, 난 땅의 정령사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혹시 예지력이 있어?”
“아니, 나도 정령사거든. 아니지, 이젠 ‘였거든’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정령 계약이 끊어지긴 했어. 그래도 자질까지 잃은 건 아니라서 대충은 느껴져.”
“헤에, 아까 계약이 끊어졌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그게 그런 얘기였구나. 아, 여기 있는 이사나 씨도 정령사야. 그것도 물의 상급 정령사!”
알리사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한껏 자부심을 느끼며 소개하자 이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엘이 이채 어린 눈으로 그런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물의 정령사? 반갑네. 나도 물의 정령사였는데. 잠시 손을 잡아 봐도 될까?”
“네? 아, 예.”
뜻밖의 제안에 이사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접촉하면 기운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거든.” 씩 웃으며 설명한 엘이 이사나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곧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흠, 그냥 상급 정령사가 아닌 것 같은데?”
“예?”
이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지만 정작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나였다. 갑자기 와 닿는 시선에 눈을 깜빡이자 그는 더욱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그래, 그런 거였구나. 이제야 전부 알겠네.”
“무슨…….”
“네 머리색, 실은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내가 아는 사람이랑 똑같은 색이라서 말이야. 우연치고는 매우 흔치 않은 색이잖아?”
“……!”
“애칭이 엘이라……. 그럼 본명은?”
“…….”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건가? 딱히 숨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밝히기 전에 상대가 먼저 알아본다는 건 생각지 못한 전개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내 머리 색은 물의 정령왕 고유의 색인만큼,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알아볼 만도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 자체가 극히 드물긴 하지만.
문제는 엘이 그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야 하는데 마치 목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엘은 이미 답을 들은 사람처럼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벨리우스와 이사나 역시 서로 어색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알리사 한 명뿐이었다.
“응? 뭐야? 그걸로 끝이야? 왜 대화를 하다 말아?”
우왕좌왕하는 그녀를 향해 엘은 정황을 설명해 주는 대신 그저 빙긋 웃었다. 그리곤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지만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아, 으응.”
허둥지둥 손을 맞잡으려니 그의 몸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하리만치 다가서는 몸짓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뒤로 물러나지 못한 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거 알아? 정령왕은 소멸할 때 후임을 원하는 방식으로 정할 수 있대.”
“……어?”
“외형이라든가, 성격 같은 것 말이야. 전부 반영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선대의 바람에 따라 맞춰진다는 거지. 황제가 자신의 구상에 걸맞은 존재를 태자로 세우듯 말이야. 다음 세대를 위한 선배의 안배랄까.”
“……!”
반사적으로 바라보자,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깨끗한 녹안을 마주한 순간 몸 안에서 덜컥, 무언가가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대의 바람에 따라 후임이 정해진다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내 모습은 엘뤼엔의 의지를 반영해 형성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정한 것인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선명해서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잘 지내?”
산만한 기분을 정리하기도 전,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저절로 몸이 긴장했다. 짧은 순간 수많은 감정들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었다.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반가움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전하겠지? 혹시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 트로웰과는 형제 같은 사이였거든.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 녀석도 많이 놀랐을 거야. 괜찮다면 나에 대해선 당분간 비밀로 해주지 않을래?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
“아, 으응. 그럴게.”
“고마워. 아아, 그치만 별로 놀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그 녀석이라면 내가 돌아올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나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동료도 생겼으니 이제 내 존재가 별로 아쉽지 않을 수도 있겠는걸?”
엘은 짓궂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는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왠지 이다음으로 나올 말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데 네 애칭 말이야. 혹시 트로웰이 지어준 거야?”
“…….”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맞는다. 귓가를 스치는 낮은 음성에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숙인 머리 너머에서 그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최악이다.
가장 바라지 않던 상황을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확인한 느낌이었다. 부글거리는 속을 느끼며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이냐고오!”
알리사의 외침만이 소리 높이 울려 퍼졌다.
* * *
엘의 주위가 왁자지껄한 소란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그 시각,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마왕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데르온이었다. 들키지 않도록 극도로 기척을 죽인 채 높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그는, 면밀하게 감시 대상의 모습을 주시했다.
‘정령사 소녀에…… 저건 성마인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 한 명이라. 일이 왠지 묘하게 돌아가는군.’
얼마간 보지 못한 사이 황제의 일행엔 많은 변동이 있었다. 드래곤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붉은 남자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행이 셋이나 늘었다. 루카르엠으로부터 따로 언질 받지 못한 부분이라 그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비록 지켜보기만 하는 역할이라곤 하나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마라니. 아직 중간계에 성마가 남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느껴지는 기세마저 범상치 않았다.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없단 생각 때문인지 그는 기운을 거의 갈무리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 때문에 데르온에겐 그가 가진 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정도면 최소 마계 4대 공작 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할 만큼 성마 중에서도 고위의 신분인 건 확실했다. 정령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모여드는 이마다 이렇게 특출한 존재뿐이라니. 억지로 모으려고 해도 이렇게 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거야 마치 세상이 어린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지 않은가.
루카르엠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온 것이 이상했다. 마왕의 계약자가 황제와 대립하고 있는 이상, 이곳에 모인 모두가 마왕의 정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마왕의 명이 달갑진 않더라도, 한두 명쯤은 제거해서 어느 정도는 견제를 해 두었을 것이다.
루카르엠은 왕에 대한 존경심은 개미의 눈곱만큼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거나 누군가에게 얕보이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완전히 기세를 기울게 만들어주진 않더라도 호각을 이룰 상황만큼은 마련해두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란 듯이 귀환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다친 게 분명한 상흔을 입고서.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번엔 누구의 숨통을 조여 놓으려고.’
좀처럼 안심할 수 없는 마족인 만큼 데르온은 이 순간에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아무쪼록 자신이 그의 패로써 잘 움직여주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보다 저 소년은 정말 이상하군. 엘퀴네스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인간이라니. 대체 정체가 뭐지?’
데르온은 다시금 황제 일행을 주시했다. 조금 전 새로 합류한 인간 소년은 정령왕 엘퀴네스와 놀라울 만큼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칼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판으로 찍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넘치는 인구수를 생각하면 한두 명쯤이야 우연히 서로 닮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정령왕이라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정령왕은 그 존재적 가치만큼이나 외형 역시 특별하게 타고난다. 언제나 그 시대의 기준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그런 정령왕과 똑같은 외형을 지니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거슬리는 건 소년의 힘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법 강해 보이긴 하는데 소년이 가진 힘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심지어 육체의 단련 여부조차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기세만 대단한 것일 뿐, 실제로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면서도 마치 피부 위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 봤자 인간일 뿐.’
데르온은 찌푸린 얼굴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봤자 마족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설령 저 소년이 뜻밖의 힘을 드러낸다 해도 자신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차라리 성마를 공략할 방법을 연구하는 게 더 나을 터였다. 그렇게 단정 지은 데르온이 시선을 거두려고 할 때였다.
“……!”
문득 고개를 든 소년이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단지 의미 없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가 있는 쪽으로 선명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인간의 시야로 감지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완벽하게 은신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정령왕일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 리가 없었다. 흠칫 놀란 데르온이 반사적으로 검집을 움켜쥐자 소년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조금 전처럼 다시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의 태연한 행동에 데르온은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를 향해 지은 미소는 절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데르온은 검집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