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금발의 소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역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어라?”
그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뭔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내리는 눈길에 저절로 몸이 긴장했다.
“……나한테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이 있단 얘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이거 뭔가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뭐, 뭐야. 엘 씨가 두 명?”
그때쯤 일행들도 소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당혹감을 드러냈다.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알리사가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소년은 조금 전보다 더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 씨? 설마 그쪽 이름도 엘이야?”
“……비슷해. 이름이라기보다는 애칭이지만.”
“어쨌든 엘이라고 불린다는 거지? 거참, 정말 신기하네. 얼굴도 같은데 이름도 같다니. 지금 나이가 몇이야? 왠지 그것도 나랑 비슷할 것 같은데.”
스스럼없이 물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행동에 오히려 나는 뒷걸음 쳤다. 그런 내 모습에 소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지금 그쪽 입장에서 내가 상당히 수상해 보인다는 거 아는데,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줘. 나도 지금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거든. 이렇게 말해봤자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알아.”
“응? 안다고?”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문제였다.
“엘……?”
그 순간 바로 옆에서 꺼질 것처럼 작은 음성이 울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시벨리우스가 멀거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넋을 잃은 것 같은 얼굴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엘이야?”
동요를 담은 목소리에 소년의 시선이 나를 떠나 그에게 닿았다. 이번에도 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를 향할 때와 조금 다른 건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는 것이다.
“……시벨, 무사했구나.”
안도감을 담은 목소리는 벅찬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두 눈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거렸다.
“너, 정말……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던 소년의 눈빛이 돌연 사납게 변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단순한 눈의 착각이었고, 실제론 시벨리우스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강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퍼억!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을 땐 시벨리우스는 이미 날아가다시피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소년이 그의 배를 걷어찬 것이다.
“큭! 무, 무슨……!”
“이 망할 자식! 내가 가지 말라고 했었지! 내 말은 곧 죽어도 안 듣더니 결국 사지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서 납치나 당해? 내가 너 찾느라 얼마나 개고생 했는지 알아? 덕분에 나까지 잡히게 만들고!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혼란스러운 얼굴로 반응하던 시벨리우스는 이어진 폭언들에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쓰러져 있는 그의 위에 올라타다시피 걸터앉아 덥석 멱살을 붙들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만 있어?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보시지?”
“……엘.”
“내 이름 말고! 내 이름이 엘인 건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소년의 몸짓에 따라 그의 꿀처럼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소년의 뺨을 만졌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환상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나 손이 닿아도 소년이 사라지지 않자, 그는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부에 닿는 감촉에 놀란 듯 흠칫 손을 떼어낸 그가 이번엔 두 손으로 힘주어 소년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말도 안 돼……. 너……너, 진짜 엘이야?”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럼 내가 가짜 엘이겠냐? 왜, 이제 친구 얼굴도 못 알아보겠어?”
“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듯 쏘아붙인 말에 시벨리우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충격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시선이 나를 흘끗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내내 엘이라고 믿어왔던 내 앞에 또 다른 엘이 나타났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흥분한 소년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너 진짜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 네 부주의한 행동에 대한 건 물론이고, 네 일족들이 내게 한 짓까지 전부 사과를 받아야겠어! 사람을 다짜고짜 가둬 버리다니!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야? 아무리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강하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가, 갇혀 있었다고?”
“그래! 네 일족의 장로인지 뭔지 하는 영감님 말이야! 네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니 멋대로 이상한 주술진에 가둬 버렸다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그 뒤로 아무 기억도 안 나!”
“……!”
설마 그 팔찌가 봉인구였던 건가? 이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됐다. 아무래도 그 역시 시벨리우스가 당한 것과 같은 수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판단한 상황을 시벨리우스가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시벨리우스는 투덜거리는 소년을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어딘지 넋이 나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소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뭐?”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엘이야?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한, 내 유일한 친구인 엘 맞아?”
“뭐야, 뜬금없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
피식 웃으며 묻는 말에 시벨리우스는 어린아이처럼 도리질을 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소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엘! 엘이다. 진짜 내 친구 엘이야.”
“켁! 뭐야, 너. 다 큰 사내자식이 징그럽게 어울리지 않는 응석을 부리고.”
투덜거리는 소년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벨리우스는 그의 목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소년 또한 별로 싫은 건 아니었는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어루만졌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익숙한 모습이었다.
“미안해. 날 많이 찾았던 거지? 걱정 끼쳤었던 모양이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시벨리우스가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매달려 울기 시작하는 그를, 소년이 꼭 끌어안아 다독였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후에야 이뤄진 재회다. 그래서일까. 이 넓은 공간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벨리우스는 간신히 눈물을 멈췄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들썩이던 공기가 차분해지자 그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소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좀 진정했어?”
“……응.”
“그보다 시벨, 좀 궁금한 게 있는데.”
“으응?”
“나 왠지 정령 계약이 끊어진 것 같거든.”
“…….”
가만히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의 눈빛을 주시했다.
“표정을 보니 이유를 아는 것 같네?”
“어? 아, 그게…….”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야? 왠지 너희 마을로 보이진 않는데. 게다가 갇힌 뒤로 꽤 시간이 흐른 느낌이 드는데 말이지. 그저 몇 년 정도가 아닌 것 같은 건 단순한 기분 탓인가?”
질문이 한 마디씩 이어질 때마다 시벨리우스의 얼굴은 점점 핼쑥해졌다.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그를 향해 소년은 화사하게 웃었다.
“자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다 설명해 보실까?”
* * *
설명은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대부분 시벨리우스 혼자 떠들었고, 엘은 얌전히 듣기만 했다. 나와 이사나, 알리사는 마치 재판을 경청하는 배심원처럼 한쪽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그렇구나. ……4천년이란 말이지.”
자신이 봉인된 이후로 엄청난 시간이 지났음을 알게 된 엘은 예상외로 덤덤하게 반응했다. 물론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닌 듯 한참 동안 머리를 붙잡고 심호흡을 가다듬긴 했다. 그래도 시벨리우스 때에 비하면 상당히 침착한 편이었다.
“그럼 엘퀴네스는 세대교체를 했겠구나. 그래서 나와의 계약이 끊어진 거고.”
“아, 알겠어?”
“이미 그 당시에도 소멸할 시기가 다가온다고 했는걸. 아무리 정령왕의 수명이 길다 해도 그 이후로 몇천 년이나 더 살았을 리가 없지.”
한숨을 토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시벨리우스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소년, 엘이 쓰게 웃었다.
“뭘 그렇게 풀 죽어 있어?”
“미안, 나 때문에…….”
“사과하지 마. 네 탓이 아냐.”
꺼질 듯한 목소리로 건넨 사과에 엘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깐 감정이 격해져서 화부터 내긴 했지만 이런 걸로 널 탓할 마음은 없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잖아. 어쨌든 내가 행한 일의 결과고, 그건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야.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건 아쉽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들도 이해했을 거야.”
“……미안해.”
“나 참, 그러니까 사과하지 말래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시벨리우스의 두 눈이 울 것처럼 빨개지자 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지금 가장 많이 힘들 사람은 그일 텐데도, 오히려 상대를 위로하는 모습에서 흔들림 없는 강단이 느껴졌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햇살처럼 밝고 강한 사람.
언젠가 시벨리우스가 표현했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시벨리우스를 달래고 있던 ‘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쪽도 이름이 엘이라고 했었지? 그쪽이 시벨의 봉인을 풀어준 거라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구나.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네. 혹시 시벨이 그쪽을 나라고 착각하진 않았어?”
건네는 말은 의문형이었으나 이미 확신을 담고 묻는 말투였다. 그러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기대 있던 시벨리우스가 화들짝 고개를 들고 변명했다.
“네, 네가 환생한 거라고 생각했어!”
“아, 역시. 착각한 거 맞구나?”
“그, 그치만 너무 똑같아서…….”
“으음, 그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군. 보는 순간 심장이 다 철렁할 정도였어. 나한테 잃어버린 쌍둥이 형제가 있는 줄 알았다니까?”
충격을 받았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불만을 쏟아낼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튼 미안해. 아무래도 그동안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대신해서 사과할게.”
“어? 아, 아니, 괜찮아.”
“아냐, 안 봐도 뻔해. 이 녀석이 무작정 귀찮게 굴었겠지. 뭐 해, 시벨? 너도 얼른 사과하지 않고.”
그 말에 시벨리우스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힐끗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잠시 흔들렸으나 그 표정은 금세 불퉁하게 변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게 없긴 왜 없어? 다른 사람을 나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거잖아.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환생했다 착각이나 하고 말이야.”
“그, 그건 확실히 내 실수긴 하지만…….”
“그것 봐. 너한테 내 존재감이 그것밖에 안 된다니 서운한데?”
“아니, 그런 건…….”
“하하!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새파래지자 엘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노, 농담?”
“당연하지. 난 그 정도에 꽁해질 만큼 속이 좁진 않아. 세월이 그렇게 오래 흘렀으니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 게다가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환생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심지어 이름까지 같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인연이지?”
흥미로운 듯 부담스럽게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그 순간 시벨리우스가 발끈한 얼굴로 외쳤다.
“이름 아냐! 저 녀석은 애칭이라고!”
“응? 아, 그렇다고 했지. 하지만 애칭도 이름은 이름이잖아?”
“아니, 전혀 달라! 정식 이름과 남들이 적당히 지어 붙인 호칭이 어떻게 같아?”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은 언젠가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 나를 경계했을 때와 똑같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걸 견디지 못하겠다는 모습이다.
어떤 의미에선 참으로 한결같은 녀석이랄까.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돌변한 태도를 보니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내가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시벨리우스가 경직된 얼굴로 쏘아붙였다.
“뭐, 뭐야! 넌 애칭인 거 맞잖아!”
“……그래, 맞아.”
“나, 난 틀린 말 한 거 없어. 애초에 네가 헷갈리게 한 탓이야. 그렇게 똑같이 생기지만 않았어도……!”
“나도 알아. 별로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어. 어쨌든 찾았던 친구를 만나서 다행이네. 축하해, 시벨.”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이었는데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졌다. 이어진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이야?”
“어?”
“네가 엘이 아니란 걸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답하자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술을 악물었다.
“……하긴, 넌 내가 널 엘로 여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었지. 잘됐네. 이제 더 이상 오해 받을 일 없어서. 귀찮은 녀석이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니 그저 시원하기만 하지?”
“뭐? 아니, 그건…….”
“시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해해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저기, 미안해. 이 녀석이 워낙 귀하게 큰 편이라 예전부터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너무 나쁘게 듣지 말아 줘.”
반박하려는 찰나,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찝찝한 여운이 남았다. 마치 시벨의 주장에 긍정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낀 건 시벨리우스도 마찬가지인 듯, 그는 훨씬 더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