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78화 (178/608)

제178화

“왜?”

“거기서 널 처음 만났었는데.”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가 한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쓰게 웃었다. 과거의 ‘엘’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다시 삼켜 버리긴 했어도, 지난번 감정을 크게 터트린 이후 그에 대해 언급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는 무작정 외면하기에만 급급했는데,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노예 경매장에서 처음 보다니. 굉장히 스펙터클한 만남이었나보네.’

사실 그 외에도 이 세계의 4천 년 전 상황이라든가 풍경 같은 것들엔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이랑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는 느낌이라 두근거리기도 했다. 아마 감정적으로 갈등을 겪는 일만 없었다면 내가 먼저 그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꺼낼 수 있는 화제가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미묘한 거리감도 완전히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심 희망찬 기분이 들었다.

“엘, 자정이야.”

때마침 들려오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하늘을 확인했다. 새벽으로 기운 달이 조금 전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이제 아이들을 구출할 시각이었다.

“좋아, 그럼 가 볼까?”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어 내자 이사나와 시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세운 작전은 대강 이랬다. 우선 나 혼자 공간 이동을 해서 지하로 들어간 다음, 감시자들을 대충(?) 처리하고 납치된 아이들을 구한다. 그동안 시벨리우스가 비밀 통로에서부터(위치는 내가 전부 알려주었다) 라무스 밖까지 이어진 퇴로를 만들기로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술법 중에 환상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것이 있는데, 이것을 활용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다만 술법을 발동시키는 조건이 조금 까다로웠다. 마법이 시전하는 사람 자체를 매개체로 삼아 발동하는 능력이라면, 시벨리우스가 사용하는 술법은 발동 조건에 맞는 매개체를 따로 지정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공간을 건드리는 진법은 그것을 지탱하는 축을 일정 간격으로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걸렸다. 때문에 그가 진을 무사히 설치할 때까지 이사나가 주위를 경계하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경비대의 시선을 돌릴 미끼 역할도 담당할 예정이었다.

실상 나보다 두 사람 쪽이 훨씬 까다로운 역할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경비대의 삼엄한 시선을 따돌리면서 장거리에 진을 설치하는 과정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정말 괜찮겠어?”

“응,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가. 퇴로를 만든 후에 우리도 바로 그쪽으로 갈게.”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꾸만 돌아보는 내게 두 사람은 태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나에 비해 정작 당사자인 그들이 더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에 뒤를 맡기고 그 자리에서 즉시 공간 이동을 했다. 가고 싶은 장소에 의식을 집중한 다음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어느새 비밀 통로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정확히는 벽돌로 막힌 벽면 앞이었다. 바로 이 안에 아이들이 갇힌 감옥이 있었다. 문을 여는 장치의 위치는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위에서 열두 번째, 오른쪽에서 세 칸. 살짝 건드려 보니 안에서 울리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가만히 의식을 집중하고 주위를 살폈다. 이렇게 큰 비밀 통로에서 감시자가 감옥 안만 지키고 있진 않을 테니, 분명 근처에도 관련자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통로 양 끝에 두 명씩,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전부 다 합쳐 열 명쯤 될까. 예상보다는 많은 숫자였다.

‘전부 죽……이지는 못하겠고 그냥 기절시키자.’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나는 눈을 감고 주위의 물을 감지했다. 슈우욱, 쏴아아아! 물거품이 이는 느낌과 함께 고요했던 주변이 순식간에 물이 흐르는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다.

지하에 흐르는 수맥의 소리,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작은 물방울들…… 그리고 누군가의 피부 속에 흐르는 뜨거운 혈액의 흐름까지. 마치 나 자신이 그 자체가 된 것처럼 모든 감각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들 중 일부만을 골라 일시적으로 흐름을 정지시켰다. 그러자 작은 신음들이 터지며 활발하던 기척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멈춘 충격으로 모두 의식을 잃은 것이다.

“후우…….”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도 한숨이 스멀스멀 밀려올라 왔다. 뒤처리를 생각한다면 죽이는 쪽이 더 나을 텐데. 아무리 악당이라도 사람을 해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이미 한 번 호된 경험까지 했는데도 망설임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문제는 내가 평생 끌어안고 갈 숙제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찝찝한 감각을 억지로 억누르며 벽을 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기절시킨 건 통로 쪽의 사람들뿐, 안에 들어가면 또 싸워야 할 상대가 잔뜩 있었다. 게다가 이제부턴 직접 싸워야 한다. 마음 같아선 그들도 전부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이곳에 있을 알리사 때문이다. 이제 곧 마주하게 될 텐데 그 앞에서 너무 튀는 방식은 피해야 했다.

우르릉! 그 순간 내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벽면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돌아보고 올 테니까 다들 자리 잘 지키고 있…… 뭐, 뭐야, 넌?”

‘……이런.’

동료들을 향해 말을 건네며 걸어 나오던 한 남자가 입구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멈춰 섰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였다. 나는 난처한 기분에 볼을 긁적거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조용히 끝낼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진 않았지만(통로 쪽의 사람을 먼저 재운(?)것도 그 때문이다) 시작부터 난타전이 될 것 같았다.

“미안해요. 실례할게요.”

“뭐…… 컥!”

사과를 건넴과 동시에 나는 있는 힘껏 힘을 실어 그의 배에 주먹을 내질렀다. 마땅한 기술은 없지만 타고난 완력 자체가 인간과 완전히 다른 몸이다. 주먹이 닿는 순간 딱딱한 갑옷이 움푹 꺼지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병사는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도 못하고 풀썩 엎어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침입자다!”

동료가 쓰러지자 뒤쪽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황급히 무기를 빼어 들고 달려 나왔다. 나는 그들 너머로 들어오는 광경에 흘끗 시선을 보냈다.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감옥들 안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창 자다가 깬 듯 다들 두 눈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알리사는 그들 중 가장 끝 방 쪽에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한시름 덜어진 기분이었다.

“어디에서 온 놈이냐!”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달려온 병사들이 곧장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혀를 차며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뛰어난 반사 신경 덕분에 피하는 건 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힌 적이 없다 보니 어떤 식으로 공격을 이어가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불량배한테 걸려 일방적으로 맞아본 적은 있을지언정 싸워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상대는 동네 불량배 정도가 아니라 훈련받은 병사다. 어중간한 방식으로 싸우는 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능력을 응용하기로 했다. 싸우는 척하면서 적절한 순간에 그들 몸속에 흐르는 피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걸로.

“컥!”

“허억!”

이 방법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순식간에 한 명이 기절하자 다른 쪽에서 공격하던 자들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주먹을 내질렀고, 나한테 맞고 튕겨 나간 사람에 의해 또 다른 빈틈이 만들어졌다. 다가오지 않는 쪽엔 내가 먼저 다가가 공격을 유도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싸움을 이어갔더니 어느새 상황이 말끔히 종료되어 있었다.

더 이상 시야를 가로막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자 바닥에 우수수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걸 보면 전부 의식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그 너머에서 창살에 붙어 있던 아이들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들 괜찮니?”

내 질문에 아이들은 모두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얼굴에 복면을 쓴,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어오니 겁이 난 것 같았다. 얼추 숫자를 세어보니 스무 명 남짓은 되었다. 낮 시간에 라무스 앞을 배회하던 부모들의 숫자에 비해 더 많았다. 라무스에 등록하러 온 아이들 외에도 다른 곳에서 납치한 아이들까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동그랗게 뜬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릅뜬 눈동자의 주인은 바로 알리사였다. 그녀는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는지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뻐끔거리는 입이 당장이라도 내 이름을 부를 기세라 나는 곧바로 입술 쪽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소녀답게, 알리사는 날 부르는 대신 곧장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반가운 감정까진 숨길 수 없었는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피식 웃은 다음 쓰러진 병사들의 몸을 살폈다. 감옥 문을 열 열쇠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 바로 근처에 있던 병사의 몸에 둥근 열쇠 꾸러미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빼낸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번엔 감옥 한구석에 밧줄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나는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굴비처럼 단단히 엮어 묶고는 한쪽 구석에 몰아두었다. 무기들은 전부 회수해 멀찍이 내던져 두었다. 이제 의식을 차려도 한동안은 쉽게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에 나는 감옥으로 다가가 창살의 열쇠를 전부 풀었다. 내가 다가서자 우르르 물러난 아이들이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누구도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다들 어서 나와.”

내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나를 믿어도 될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알리사 덕분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손짓한 것이다.

“으아,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무서웠어. 뭐 해? 너희들도 어서 나오지 않고. 계속 그 안에 있을 거야?”

같은 말도 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영향력이 다른 법. 아이들에게 알리사는 같은 처지에 처한 그들의 동료였다. 그녀의 부름에 그때까지 망설이고만 있던 같은 방의 아이들이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다른 방 안에 있던 아이들도 용기를 얻은 듯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중에도 아이들은 연신 쓰러져 있는 병사들 쪽을 살피며 두려운 시선을 보냈다. 의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다친 곳은 없니? 어디 아픈 사람은?”

내 질문에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영양 상태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옷차림도 다들 말끔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물로 바칠 예정이라 그런지 나름대로 곱게 관리해 온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상태를 자세히 살피려는데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말문을 트면 다른 아이들이 용기를 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 으음, 나는 아프진 않은데 멀든을 부를 수가 없어……요. 아, 그러니까 나는…… 아니, 저는 정령사거든요!”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듯 알리사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들 대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좋았는데, 표정에서 어색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 녀석도 연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아, 괜찮아. 그건 팔찌 때문이야.”

“팔찌?”

알리사는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그녀의 팔에 수갑처럼 채워진 팔찌가 흔들렸다. 알리사가 의식을 잃었을 때, 우슬라 부조수가 채웠던 바로 그 팔찌였다.

“이거……요?”

“응, 아마 그 팔찌에 마나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아. 이건 열쇠가 따로 없는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 나중에 풀어줄게.”

그 말에 알리사는 크게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닷없이 납치된 것보다 갑자기 정령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더 크게 당황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한 소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 것이다.

“저, 저는 머리가 조금 아파요.”

“그래? 어떻게 아파?”

“지끈지끈 거리고 답답해요.”

“흠, 어디 보자.”

나는 소년의 머리에 손을 댄 후 바로 치유술을 썼다. 그러자 어리둥절해하던 소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시, 시원해요!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 다행이네.”

웃으며 대꾸하자 소년은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알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머리가 아픈 것 같아……요.”

“응? 너도?”

“응, 아니, 네. 그 이상한 차를 마시고 난 후부터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차에 섞여 있던 마취 성분이 문제인 모양이다. 나는 알리사에게도 치유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앞 다투어 손을 들고 아픈 곳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두통이었고, 가벼운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도 있었다.

원인을 찾아보니 모두 약물에 의한 중독 반응이었다. 주로 아이들이 무서워서 울거나 칭얼거릴 때마다 약물을 먹여 강제로 재워왔던 것 같았다. 협박을 하자니 제물로 바쳐질 몸에 차마 상처를 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자니 귀찮아서 쓴 방식 같은데,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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