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상기된 얼굴로 답한 후 직원은 한동안 창구 안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라무스 안에서 사람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삼십 분쯤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끝까지 닿는 긴 망토를 입은 선량한 얼굴의 남자였다. 급히 달려 나온 듯 그는 얼굴 가득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창구의 연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편입 응시자가 계시다고요?”
“우슬라 부조수님! 여기, 이분들입니다.”
창구 직원의 외침에 부조수라 불린 남자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라무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라무스 특별반 신학부에서 부조수로 근무 중인 마하 우슬라라고 합니다. 편입을 희망하시는 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저, 저예요.”
알리사가 자신을 가리키자 부조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귀여운 아가씨군요. 성명이?”
“아일리아스입니다. 알리사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알리사 양. 저를 따라 오시죠. 원장님께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렸다. 조금 전 창구 앞에서 퇴짜를 맞고 밀려나 있던 실종자들의 부모가 우리 쪽으로 달려든 것이다.
“이봐! 기다려! 우리도 같이……!”
“우리도 안으로 들여보내 줘!”
그러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빠르게 달려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부모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단련된 병사의 힘을 이길 리가 없었다. 결국 부모들은 그들에게 붙잡혀 멀찍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잠시간 시선을 주던 부조수가 다시금 우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자아, 이쪽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저기, 저 사람들은 저렇게 놔둬도 괜찮나요?”
“여러분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곧 진정하고 돌아들 가실 겁니다.”
내 질문에 부조수는 예언을 하듯이 대답했다. 눈앞에서 일어난 소란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라 오히려 거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 않으셔도 돼요? 사람이 행방불명된 것 같던데요.”
“아아, 뭐. 이 시기엔 흔한 일이죠.”
“흔하다고요?”
“입학 기간 때마다 늘 이렇습니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오다 보니 명부가 뒤섞여 혼선을 겪기도 하고, 또는 중간에서 사고를 겪기도 하지요. 해마다 라무스에 오는 길에 행방이 묘연해지는 사람들만 십수 명은 될 겁니다. 안타깝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요.”
난처하다는 얼굴로 부조수가 혀를 찼다. 그의 말을 들으며나는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에게 가로막힌 부모들이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보였다. 그와 반대로 그들을 막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이미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남의 아픔에 익숙해진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학술원 측에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매 시기마다 같은 일을 겪고 있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사고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저 책임을 외면하는 데 급급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거대한 손이 내 눈앞을 가렸다. 시벨리우스였다.
“저런 거 보지 마. 봐 봤자 불편하기만 하잖아.”
“시벨…….”
머뭇거리면서 돌아보자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는 보지 말라고 말했으면서, 그의 시선은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기분을 외면하는 네가 조금은 야속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아. 소중한 것을 잃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의 모습은 지켜보기가 힘들구나.”
“시…….”
“미안, 어서 가자.”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짧게 웃은 다음 서둘러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이상 대화를 잇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냐, 나는 그걸 지켜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었던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삼켜진다. 거리가 벌어진 일행들이 어서 오라고 멈춰 서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눈물을 훔쳤을지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행들 속에 섞여들었다. 시벨과 시선을 맞추고 서로 마주 웃기도 했지만 갑갑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내 자리를 빼앗길까 봐 무서운 것뿐이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마도 이 말을 할 기회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 * *
면접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슬라 부조수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설명했다. 주로 라무스의 훌륭한 교수진과 학부들에 관한 자랑들이었다.
라무스 내부는 크게 무관반과 문관반, 그리고 특별반으로 분류됐다. 무술과 전술을 다루는 것이 무관, 행정이나 법, 기타 정치 분야를 다루는 곳이 문관반이라면, 특별반은 이학(理學)관련을 비롯하여 마법이나 신성력 같은 특이 능력을 다루는 곳이었다. 정령사인 알리사 역시 이곳으로 편입될 터였다.
“아, 그렇군요. 알리사 양은 정령사였군요.”
부조수는 예상외라는 얼굴로 눈을 크게 껌뻑였다.
“특별반 지원자는 보기 드문데, 이거 매우 놀랍군요. 그것도 중급 정령사라니. 아직 어린 나이인데 굉장한 성취입니다. 실례지만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13세예요.”
“13세!”
짐작한 것보다 더 어린 나이였는지 부조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해도 보기 드문 경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한동안 탐색하는 시선으로 알리사를 주시하더니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굉장하군요. 아주 좋아요. 그 정도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편입 말입니다. 보통 편입의 경우엔 면접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거든요. 하지만 알리사 양은 최종 회의까지 갈 필요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할 겁니다.”
“정말요?”
“물론입니다. 저희 라무스는 재능 있는 학생들을 언제나 환영하니까요.”
부조수의 대답에 알리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미 합격할 것이란 확신이 있긴 했지만, 관련자에게 확답을 들으니 더 안심한 것 같았다. 부조수 역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특별반 식구가 늘어서 매우 반갑네요. 학부가 달라서 자주 뵙지는 못하겠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혹시 학술원 생활에서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와주십시오.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슬라 부조수님은 신학부에 계신다고 하셨죠? 그럼 신관이신 건가요?”
“아뇨, 그저 평범한 신학자입니다. 신관이 되기를 꿈꾸긴 했으나 문장을 받지 못했기에 학문으로 접근했죠. 보통 학술원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같이 개인적인 흥미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신관이었다면 이미 신전에 소속된 몸이니 이곳에 있을 수가 없지요.”
“아, 그렇군요. 혹시 불쾌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신학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일들도 많으니까요. 사실 신전에서 받는 지원은 신관과 딱히 다르지 않아요. 연계된 신전으로 나가 강의를 받거나 하기도 하고, 교류도 상당히 자주 하는 편입니다.”
다부진 얼굴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더 흥미가 돋았는지 알리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신관은 모시는 신에 따라 계열이 나눠지잖아요. 신학자도 그런가요?”
“그럼요. 마법에 다양한 학파가 있듯, 신학 역시 각기 연구하는 교리에 따라 소속이 달라집니다.”
“그럼 부조수님은 어느 신전의 소속이세요?”
알리사의 질문에 내내 거침없이 대답하던 부조수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리면 다들 꺼리시던데…… 전 마신의 교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마신……이요?”
당황한 건 알리사만이 아니었다. 나와 이사나 역시 놀라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조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역시 놀라시는군요. 알리사 양도 마신이 거북합니까?”
“그거야…… 아무래도 무서운 신이잖아요.”
“하하, 마신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자녀들에겐 상당히 관대하고 많은 것을 베푸는 신이죠. 그의 창조물인 마족들이 왜 골칫덩이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마족들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마신이 그들에게 준 것이 많다는 거죠.”
“그,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마신전은 대륙의 어느 신전들보다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신전과 신도수도 가장 많지요. 그뿐입니까? 저 멀리에 있는 스왈트 제국은 건국 이후로 수백 년간 마신을 최고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불쑥 튀어나온 본국의 이름에 이사나의 어깨가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워낙 미묘한 변화라 그것을 감지한 건 나밖에 없었다. 툭 하고 가볍게 어깨를 치자, 그는 곧바로 몸에서 힘을 빼곤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중에도 부조수와 알리사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마신을 섬기고 있다는 건, 다 그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제가 너무 오해만 하고 있었나 봐요.”
“하하, 배움을 익히는 학생으로서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죠. 알리사 양이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 기쁘군요.”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것인지 부조수는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한 사람의 생각을 바꿨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한 것 같았다.
물론 나로선 전혀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학자가 될 정도로 연구를 한다는 건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신앙심이 깊다는 뜻이고, 그건 결국 형벌의 신에 대한 적의가 높을 가능성 역시 매우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부면 연구할 교리도 많을 텐데 하필 하고 많은 신들 중에서 마신일 건 뭐람. 나는 후드 끝을 잡아당겨 더 깊숙이 눌러 썼다. 어차피 서클렛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겠지만 괜히 이마에 있는 문양이 신경 쓰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말아야겠어.’
마침 부조수는 온통 알리사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 우리 쪽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누가 일부러 밝히지 않는 이상, 그가 내 신분에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들 중에선 그런 걸 언급할 사람이…….
“아참, 그렇지. 여기 있는 엘 씨도 신관이에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
그래, 그러고 보니 알리사가 있었지.
그녀에게 전후사정을 미리 밝혀둔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반색해서 돌아보는 부조수를 보며 나는 살짝 머리를 짚었다. 이사나 역시 당황했는지 완전히 얼어붙은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신관이셨군요! 어느 신의 사제십니까?”
“예? 아,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시, 실은 마신관이에요.”
“……!”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부조수는 물론, 일행들까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부조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럴 수가! 지금 마신관이라고 하셨습니까?”
‘……할 수 없지.’
낭패감이 들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막상 저질러놓고 보니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방책인 것도 같았다. 어차피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이다. 사실을 밝혀 분란을 만드느니, 차라리 가짜 호감이라도 얻어 두는 편이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알리사를 위해서라도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변변찮지만 마신을 모시는 몸이에요. 신의 문장을 보이기도 힘든 하급 신관에 불과하지만요.”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께서 내리신 일에 직함이 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제게는 다 똑같이 고귀한 신의 종이십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히 부조수는 내 말을 순순히 믿는 것 같았다. 사실 다른 사제가 마신관의 신분을 사칭했다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도 있겠지만, 신관이 모시는 신을 한순간이라도 다르게 말하는 건 일종의 배교 행위에 속했다. 보통은 신을 기만한 죄로 그 자리에서 파문을 당할 수도 있는 엄청난 중죄였다. 즉, 내가 진짜 신관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인 셈이다. 물론 신관을 사칭하는 것 자체가 종교재판에 끌려갈 문제긴 하지만. 뭐, 이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오히려 문제는 알리사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전에 내가 마신관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저기, 잠깐만, 엘 씨. 하지만 전에는…….”
“알리사.”
그녀의 입을 막은 건 이사나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어보였다. 그 모습에 뭔가 짐작한 듯 알리사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음? 알리사 양?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신 겁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자연스러운 대답이었지만 부조수는 잠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 깊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의심의 기색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범죄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부조수는 얼굴 가득 싱글벙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너무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한 게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아무튼 정말 놀랐습니다. 전부 일행이신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마신관이셨을 줄이야. 그렇군요. 이곳까지 안내역을 하신 거군요?”
“네? 아, 네. 그런 셈이네요.”
“하하, 라무스는 정말 좋은 곳이지요. 부디 알리사 양의 보호자분들도 만족하셨으면 좋겠군요.”
단지 마신관이라는 이유로, 그는 나를 나머지 일행들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나 역시 알리사의 보호자일 거란 전제는 조금도 깔리지 않은 투였다.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굳이 일행이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묵묵히 그의 말을 받아 넘겼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마신관은 일반인들과 여행을 다니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는 걸지도. 워낙 배타적인 곳이라고 하니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둬야 했다.
“아무튼 진작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기다리실 필요도 없이 제가 바로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아, 아뇨. 그렇게까지 귀찮게 해드릴 수는…….”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들 그렇게 하시는 걸요.”
“네? 다들……요?”
“매번 오실 때마다 정식 절차를 밟는 건 번거로우니까요. 사제님도 다음에 오시게 되면 부담 없이 연락 주십시오.”
“아, 네…….”
신전과 교류가 잦다고 하더니, 평소에도 신전 측의 방문이 많은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자세히 알아보려다 의심이라도 사게 되면 곤란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