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이상하네. 그렇게 말하니까 왜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어?”
“그렇잖아. 보통은 전생을 궁금해하면 궁금해했지, 필요 없다고 여기진 않잖아? 그런 말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건, 전생의 삶이 지금보다 나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 아니야? 혹은 그 기억이 지금의 삶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든가?”
“……!”
설마 이렇게 바로 정곡을 찔러올 줄이야. 알리사의 총기를 너무 만만히 생각했나 보다. 당황하면 인정하는 셈이라 나는 최대한 담담히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현재에만 충실하고 싶은 것뿐이야.”
“흠, 그야 물론 현생이 더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전생의 나도 나잖아. 육체가 달라도 영혼이 같으면 결국 같은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무작정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계속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진짜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나중에 그런 말을 한 자신이 용서가 안 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정말 아닌걸.”
“진짜 수상하네. 어떻게 그걸 확신하는데?”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닌 경우엔 어쩌냐는 거지.”
황급히 수습해서 돌린 말에 알리사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어쩔 게 뭐 있어? 아니면 그냥 아닌 거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일이…….”
“아니, 간단한 일이야. 어차피 그 사람이든 아니든 엘 씨는 엘 씨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
“……그걸로 되는 걸까.”
“당연하지. 왜? 아니란 게 밝혀지면 시벨 씨한테 미움 받을 것 같아서 무서워?”
“…….”
심장 한구석에서 날카롭게 찌르는 감각이 퍼졌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여겨 왔던 불안한 기분의 정체를 이제야 확실히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무서웠던 거다. 내가 ‘엘’이 아니면 태도가 돌변할 시벨리우스가. 더 나아가 진실을 물었을 때 내게 보일 트로웰과 엘뤼엔의 반응들이. 내가 가족으로 여기던 존재들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를 곁에 둔다는 사실이 언젠가 밝혀지고 말 것 같아서. ……그래서 또다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우울한 기분이 표정으로도 드러난 모양이다. 알리사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풀 죽을 것 없어. 누구나 상처받는 건 싫어하니까. 하지만 바보 같아. 왜 잃을 것만 생각해? 지금 엘 씨와 시벨 씨가 쌓아 가는 우정도 우정이잖아. 그게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단호하게 버릴 수 있는 거야? 시벨 씨가 그렇게 냉정한 사람인가?”
“그건…….”
“엘 씨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물론 처음엔 혼란스럽겠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거야. 다른 사람이면 어때? 과거의 그 사람보다 더 친하게 지내면 되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는 것뿐이야.”
나는 멍하니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 아마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한없이 침잠하고 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냥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는 것뿐이다.
단순한 이 한 문장이 진리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 전부 별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점차 맑아지는 정신을 느끼며 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아. 넌 정말 똑똑하구나, 알리사.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알았으면 됐어. 자, 그럼 시벨 씨랑은 확실히 화해해.”
“응, 그럴게.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아무튼 남자들이란, 나이를 먹어도 애 같은 건 어쩔 수 없다니까.”
마치 성인 여성 같은 말투에 나는 급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심지어 그런 행동이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실제 나이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시벨리우스가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을 정돈하러 나간다고 하더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나는 살짝 심호흡을 한 다음 용기를 내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시벨.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응? 아, 미안.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어? 아, 그, 그래.”
“미안해.”
힘없이 사과를 건넨 후 그는 터덜터덜 걸어가 자신의 침대에 곧장 엎드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이사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엘. 시벨 님도 아직은 생각할 것이 많겠지. 지금은 저래도 금방 풀릴 거야.”
“으응. 미안해, 이사나.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네.”
“아냐, 신경 쓰지 마. 사실 그동안 계속 갈등했던 일이었잖아. 언젠가는 짚고 넘어갔어야 할 일이었어.”
의젓한 대답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느끼고 있을 정도로 거북한 티가 얼굴에 전부 드러났었던 모양이다.
“시벨 님이 싫은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오히려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해.”
“응, 다행이야. 나도 시벨 님이 좋아.”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드문 그로서는 최대의 찬사였다. 나는 다시금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나는 살짝 혀를 찬 다음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사나가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그 엘이란 사람 말이야.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
“그냥. 그렇게 똑같다니 신기해서. 외모는 닮을 수 있어도 성격까지 똑같은 건 흔치 않잖아.”
“응, 그러게.”
사실 그건 나도 의문이긴 했다. 이름이 왜 엘이었을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나를 닮았던 걸까? 인연이 미치는 곳마다 그 사람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엉겨 붙으니, 마치 누군가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머나먼 과거의 사람. 이런 식으로 고심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 * *
마왕성은 때 아닌 소란을 맞고 있었다. 마왕의 임무를 받고 중간계로 내려갔던 공작 루카르엠이 부상을 당한 채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평소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적은 없었으나 어쨌거나 공작의 직함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그의 부상 소식은 그의 진짜 힘을 아는 자는 물론, 그렇지 못한 자들까지 모두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벅저벅저벅. 주위에 가득한 술렁임 속에서 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걸었다. 등 뒤로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차림을 한 흑발의 남자는 마계 4대 공작이자 동쪽 영토의 주인 데르온이었다.
그의 다급한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지붕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한 문 앞이었다. 그곳엔 그보다 먼저 온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무료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유난히 튀는 남청색의 머리칼을 발견하자마자 데르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크!”
“……여어.”
먼저 와 있던 남자는 북쪽 영토의 주인 데자크 룬이었다. 그가 보내는 가벼운 눈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데르온은 덮쳐들 듯이 앞으로 다가섰다.
“소식이 사실입니까? 루카가…… 아니, 루카르엠이 귀환했다고요?”
그의 과격한 행동에 자크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딱히 나무라진 않았다. 그 역시 비슷한 심정으로 찾아온 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군. 지금 마왕 전하를 알현하고 있는 중이신 것 같다.”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하던데 사실일까요?”
“나도 그게 궁금한 참이다. 하지만 그분이 남에게 당하실 분인가? 잘못 알려진 거겠지.”
“여, 역시 그렇겠죠?”
“나도 몰라.”
무심한 표정만큼이나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그래, 원래 이런 성격이지. 데르온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체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루카르엠이 알현을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소식을 들었을 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루카르엠은 4대 공작 중에서도 월등히 강한 존재였다. 어쩌면 마왕보다 더.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귀환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입술을 악문 채 굳게 닫힌 알현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높게 치솟은 거대한 문을 볼 때면 평소에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루카…….’
* * *
마왕 카류드리안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얌전히 부복하고 있는 남자의 몸엔 두 팔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지혈되지 않은 어깨에선 붉은 핏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상당히 처참한 모습이로군, 루카르엠.”
그의 입에서 낮게 떨어지는 음성에 얌전히 부복하고 있던 루카르엠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나쁘지 않다. 두 팔을 잃은 마신의 대리인이라. 꽤나 진귀한 광경이야. 영상석으로 찍어서 남겨두고 싶을 정도군. 짜증 날 때마다 보면 유쾌해지겠어.”
누가 보기에도 일부러 자극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루카르엠은 그저 빙긋이 웃었다. 습관이나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카류드리안이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드린다면 그것도 영광이겠군요.”
“언변만 좋은 건 변하질 않는군.”
“이왕이면 언변도 좋다고 해 주십시오.”
술술 내뱉는 대답은 태연하다 못해 능청스러울 정도였다. 카류드리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튼 그 꼴을 보니 임무는 실패한 건가.”
“실망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역시 정령왕이라서 그런지 만만한 상대가 아니더군요. 친근하게 접근해서 방심을 유도하려 했는데 도저히 틈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적당히 한 게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곧게 바라보는 시선엔 흔들림이 없다.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정직한 눈이었다. 하지만 설령 정곡을 찔렸다 해도 그는 지금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카류드리안은 굳이 그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뭐, 좋다. 그대가 순순히 내 명에 따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으니. 이번엔 시늉이라도 하고 왔다는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하지.”
“오해를 살 말씀이십니다. 감히 어느 누가 마왕 전하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재밌군. 그럼 계속 일을 맡아 보겠나?”
“계속이라고 하심은…….”
“적어도 아직은 엘퀴네스 쪽에 감시의 눈을 뗄 때가 아니라 말이야. 내가 따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그들의 동태만이라도 파악해 줬으면 하는데.”
“받은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한 제게 다시 기회를 주려 하시다니, 역시 전하께선 마음이 넓으십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 달리 적임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한 입으로 두 말할 생각인가?”
“아하항,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야 당장 전하의 명을 받들고 싶지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꼴이 이래서 말입니다.”
능청스럽게 웃으며 몸을 빼는 루카르엠을 보며 카류드리안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정말로 재밌어서 지은 미소라기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미소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 팔은 언제쯤 회복할 것 같은가?”
“붙인다 해도 최소 한두 달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긴 힘들 겁니다. 다시 자라는 걸 기다리려면 십 년은 걸릴 거고요.”
“그런 점은 다른 마족이랑 비슷하군.”
“저 역시 마족입니다, 전하.”
“흥, 마신의 대리인도 고작 육체의 제약을 받는 존재일 뿐이라는 건가? 의외로 별거 아니군.”
“…….”
이번에도 루카르엠은 조용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반응하지 않는 상대를 자극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는 법. 카류드리안은 이내 심드렁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그 일은 데르온에게 맡기겠다. 명렁서를 적어줄 테니 그대가 가는 길에 전해 주도록 해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종이가 펼쳐지고 글이 적혀가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루카르엠은 여전히 부복한 상태에서 카류드리안이 느긋하게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사실 절단된 팔을 생각하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치료가 늦어져서가 아니라 재생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 문제다.
재생력이 좋다는 건 그만큼 아무는 것이 빠르다는 뜻이고, 한 번 아물어버린 피부는 다시 봉합하지 못한다. 이 상태라면 꼼짝없이 새로 팔이 자라기를 기다려야 할 판국이었지만, 루카르엠은 이만 자리를 물리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마왕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대가 없는 사이에 일이 하나 있었지.”
“무슨 일 말입니까?”
“무슨 일이었더라. 아아, 그래. 이번 번식기에 태어난 알들이 전부 파괴됐다고 하더군.”
마치 점심식사에 나온 음식 종류를 읊기라도 하듯 단조로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카르엠은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그라도 이번만큼은 웃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알이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루카르엠은 누구의 짓이냐고 묻지 않았다. 애초에 이 마계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에서도 그런 일을 시도할 이유가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카류드리안 역시 그가 묻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대도 이럴 땐 말을 아끼는군. 데자크 공작도 마찬가지였지. 분명 범인이 누군지 아는 얼굴임에도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더군.”
“……증거가 없다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야. 섣불리 의심을 했다간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될 테니.”
“…….”
“이번 알에서 차기 마왕을 기대할 만한 아이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대 입장에선 새 주인을 맞이할 기회를 잃었으니 꽤나 아쉽겠어. 나와 반목하는 것도 슬슬 지겨울 텐데 말이야.”
“……오해십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인가?”
“맹세코 정말입니다. 게다가 마왕의 자리는 도전을 통해 차지하는 것.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알이 부화했다 해서 차기 마왕이 될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단지 이번 번식기가 이렇게 끝나버렸다는 것이 매우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족은 태어나는 숫자보다 죽는 숫자가 더 많은 종족인데, 앞으로 100년간은 유입이 없이 손실만 있을 테니 매우 타격이 클 겁니다.”
“그럼 그대가 마신에게 전하면 되겠군. 번식기를 한 번 더 달라고 말이다.”
“그건 마신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번식에 관계된 부분은 명계와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건 또 처음 알았군.”
카류드리안은 정말로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유쾌한 얼굴이었다. 루카르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앞에 두루마리 하나가 떨어졌다.
“데르온에게 줄 명령서다. 따로 알현할 필요는 없으니 곧바로 내려가도 좋다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루카르엠은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 이상 이전처럼 밝지만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카류드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