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저도 애칭으로 불러도 됩니까?”
“……? 마음대로요.”
뜬금없이 허락을 구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요, 엘 님. 상냥하고 마음이 여린 당신께 한 가지 충고를 드리죠.”
“충고?”
“당신의 다정함은 당신이 지닌 가장 큰 무기입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의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독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지금 저주하는 거예요?”
“글쎄요, 어떨는지?”
그래, 그러고 보니 이런 마족이었지. 내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마족과 계속 말을 섞고 있었던 걸까. 덕분에 확실히 알았다. 싫은 것과 짜증 나는 건 전혀 별개의 감정이란 걸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얼른 가버리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루카르엠은 웃음을 크게 터트리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한 틈의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다. 비록 잘린 두 팔이 인사하는 동작에 맞춰 움직이는 광경은 기괴에 가까웠지만.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고 있겠습니다, 엘 님. 부디 안녕하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카르엠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주위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늘 묵직하게 퍼져 있던 마기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그것을 느끼고 나니 그가 정말로 돌아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간 거야?”
조금 멍하게 서 있는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나였다.
“응, 갔어. 좀 특이한 마족이었지?”
“응.”
“아무튼 다행이다. 이제 기습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웃으며 건넨 말에 이사나 역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던 알리사가 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왜 눈을 가리나 했더니…… 아까 그 마족, 팔이 잘린 거야?”
“어떻게 알았어?”
“팔로 참아준다느니, 봉합이 어쩌느니 했잖아. 그것만 들어도 뻔하지 뭐. 그 마족이 엘 씨를 공격했던 거지? 그걸 시벨 씨가 막은 거고?”
“응, 비슷해.”
“뭐야, 되게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깜빡 속았어. 역시 마족은 믿으면 안 되는구나. 책에서도 그랬어. 마족은 진심을 교묘하게 감추는 종족이라고.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히 신뢰하면 안 된다고 말이야. 아무튼 이사나 씨도 참. 뭘 그 정도 가지고 눈까지 가리고 그래? 난 봐도 괜찮았는데.”
한껏 투덜거린 알리사가 가볍게 눈을 흘기자 이사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사나 편을 들어주었다.
“아냐, 안 보길 정말 잘했어. 별로 유익한 광경은 아니었거든.”
“엘 씨는? 다친 곳은 없는 거야?”
“응, 보다시피 멀쩡해.”
“그렇구나, 다행이다.”
안도하며 미소 짓는 얼굴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는 항의가 있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때 비딱한 자세로 서 있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불퉁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시벨?”
“아깐 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응? 아까?”
“그 녀석이 널 잡고 있을 때 말이야. 네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잖아. 잘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그냥 내버려 뒀어?”
그 말에 나는 약간 낭패감을 느꼈다. 정신없는 와중이었으니 얼렁뚱땅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저 희망사항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팔이 다시 자랄 수 있는 줄은 몰랐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시 안 자라더라도 그런 건 그냥 베었어야지! 하마터면 네가 다칠 뻔했잖아!”
“안 다쳤으니 됐잖아.”
“그런 문제가 아냐. 하아, 엘 넌 정말 변한 게 없구나. 네가 그럴 때마다 난 정말 슬퍼져. 조금이라도 널 아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네 몸을 좀 생각했으면 좋겠어.”
“으응, 미안.”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하는 거 맞아? 늘 알겠다고 하면서도 자기 몸을 돌보질 않잖아.”
순간 그런 적이 있었나 싶었다가 나는 쓰게 웃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엘’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행동이 과거의 후유증 같은 것을 건드린 모양이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왠지 죄지은 기분이라 나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타박을 묵묵히 들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의외로 시벨리우스에겐 잔소리꾼의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넌 특히 아는 사람은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어. 상대가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물론 너의 그런 점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진짜 배신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으음, 그러게?”
“그러게? 가 아니야, 엘. 인지하고 있으면 제발 경계를 해 줘. 그때도 그랬지. 트로웰이 죽이려고 해도 몇 번이나 웃으면서 받아주고…….”
“아, 그랬…… 뭐?”
건성으로 대꾸하려다 말고 나는 황망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살벌한 단어와 함께 트로웰이란 이름이 들렸었다. 동요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시벨리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기억 안나? 트로웰이 널 얼마나 괴롭혔는지.”
“괴, 괴롭혀? 친했던 거 아니었어?”
“친하긴 했어. 하지만 동시에 그는 널 죽이고 싶어 했어.”
“……왜?”
“왜긴. 그 녀석은 인간을 싫어하니까. 그 녀석에게 인간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터부 같은 존재였어. 오죽하면 인간을 이 땅에서 멸족시키려고까지 했을까.”
멸족(滅族). 그 짧은 단어 속에 담긴 무게에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대륙에 저주를 내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그의 심정에 공감했기에 이해했다. 하지만 온 세상의 인간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다는 건 상황이 달랐다.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는 트로웰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인간을 싫어해도 그렇지, 트로웰이 왜 그런 짓을 해?”
“역시 믿지 않을 줄 알았어. 하지만 정말이야. 그때 그 녀석은 진짜 위험했으니까. 트로웰이 얼마나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미 여러 차례 나를 심란하게 했던 말이 또다시 이어졌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나는 묵묵히 시벨리우스의 말을 들었다.
“트로웰이 그 당시에 다른 인간들보다 널 특별하게 대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어. 꾸준히 교류를 했던 건 네가 그와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를 했기 때문이야.”
“거래라니?”
“나도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 그를 설득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는 것 같아. 그래도 정히 인간을 멸망시켜야겠다면 자신부터 죽여 달라고 했다나?”
“……!”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속이 탔는지 알아? 뭐, 결국 트로웰도 끝까지 널 죽이지 못했지만. 덕분에 지금 인간들이 무사히 명맥을 잇고 있는 거야. 이 땅의 인간들은 모두 너한테 감사해야 해.”
“말도 안 돼…….”
“그치? 말도 안 되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네가 했다니까?”
옛이야기에 신이 난 듯 시벨리우스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하지만 그때쯤 나는 그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을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더 복잡해졌다.
시벨리우스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엘이란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트로웰의 죄를 막았다는 소리였다. 그만큼 트로웰을 좋아하고 신뢰했다는 거겠지. 한낱 인간이었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던 거다. 만약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마치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엘’에게 유대감을 한껏 과시당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것 말고도 네가 한 무모한 짓이 얼마나 많은데. 솔직히 말하면 생존 본능이 결여된 사람 같았어. 뭐, 그런 점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네가 변하지 않아서 안심이야. 이럴 때마다 역시 내가 아는 엘이 맞구나 싶다니까.”
흐뭇하게 응시하는 두 눈은 친구를 향한 애정으로 충만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아니다. 그 사실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른 때라면 그저 웃으며 넘겼을 말에 나도 모르게 반박하고 만 것은.
“……내가 아니야.”
충동적으로 중얼거리자 시벨리우스가 곧장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응? 뭐라고 했어, 엘?”
“내가 아니라고!”
한번 내뱉은 말이 마치 도화선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난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그 사람이 아냐! 난 네가 아는 그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고, 네가 아는 사람들을 알지도 못해! 내가 아니란 말이야!”
“엘, 왜, 왜 그래?”
퍼붓듯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시벨리우스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내가 갑자기 발끈하는 것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수시로 다른 사람으로 오해 받는데 내 기분이 좋겠어?”
“다른 사람이라니. 네 전생이잖아.”
“나한텐 그런 거 없다고 했지!”
“하지만…….”
“제발 적당히 좀 해줘, 시벨리우스. 그래, 네 말마따나 나한테 전생이 있었다 치자.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태어난 시기가 다르고 살아온 세월이 다른데.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야. 환생을 했다 해도 그 삶이 다시 이어질 수는 없다고!”
“……!”
말하면서도 내가 조금 심하다는 건 알았다. 그저 엉뚱한 화풀이를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착각하게 내버려 두었다간 내가 먼저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는 그가 내 기분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벨리우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해?”
“……뭐?”
꺼질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혼란한 정신에 보지 못했던 그의 상태가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세상이 전부 달라졌어.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전부 사라지고, 내가 아는 세상의 지식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변했어. 유일한 내 친구는 날 전혀 알아보지 못해.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
“그래, 네 말이 맞아, 엘. 환생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사람일 뿐,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진 거겠지. 나도 다 알고 있었어. 지금의 너한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설령 그렇다 해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것조차 안 되는 거야?”
담담한 말투와는 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내내 불안해해 왔음을 깨달았다. 느긋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사실은 갑자기 변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빠르게 흥분이 가라앉고 머리가 식었다. 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또 이런 식이다. 뒤늦게 밀려드는 낭패와 자책감에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미안, 시벨. 방금은 내가 너무 지나쳤어.”
“아니, 사과하지 마. 네 말이 전부 옳아. 내가 너무 내 입장에만 취해서 미처 네 기분을 생각하지 못했어.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를 계속 언급했으니 마치 비교당하는 기분도 들었겠지. 네가 불쾌해하는 게 당연해.”
“시벨…….”
“미안해. 잠깐만 혼자 있을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허무하게 웃어 보인 뒤 시벨리우스는 그대로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나는 탄식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내 옆으로 알리사와 이사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심각하게 얘기하는 것 같더니. 둘이 싸웠어?”
“그런 거 아니야, 알리사.”
“아니긴. 시벨 씨 표정이 잔뜩 굳어 있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 얼핏 들으니 트로웰이 어쩌니 전생이 어쩌느니 하는 것 같던데. 트로웰은 땅의 정령왕 이름이잖아? 엘 씨도 트로웰을 알아?”
“……과거의 이야기야.”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려는데 알리사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도저히 그대로 물러날 기세가 아니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풀어낸 사연에 알리사는 매우 흥미로워했다.
“그러니까 먼 옛날에 엘 씨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는 거지? 그래서 시벨 씨가 엘 씨를 그 사람의 환생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응, 맞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오해를 해 왔는데, 난 그게 싫었거든. 아니라고 말해도 믿질 않아서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심하게 해버렸어.”
“그랬구나. 근데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벨 씨가 괜히 착각할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진짜 엘 씨의 전생일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헤에, 엘 씨는 윤회를 안 믿는 사람이야? 신관이면서?”
이 세계는 지구보다 신의 간섭이 많은 편이라 그만큼 주어진 정보도 많다. 특히 신을 섬기는 사제들은 당연히 4대 차원의 존재와 윤회를 믿었다. 그러니 단호하게 부정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긴 할 것이다.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얼굴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단지 나한텐 전생이 없었을 거라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게다가 있었다고 해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난 전생 같은 거 필요 없거든.”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내게 전생이 있다고 한다면 지구에서의 기억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소중한 경험이었고, 그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은 존재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추억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운명이 없는 아이. 과거에 사로잡힌 미숙한 정령왕. 난 그저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아 혼란스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