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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70화 (170/608)

제170화

‘어?’

그러나 상황은 예상보다 더 나쁘게 흘러갔다. 내가 아무리 형체를 벗어버리려고 해도 그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운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마치 급류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흩어버리려는 순간 즉시 다시 자석처럼 달라붙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게 말씀드렸잖습니까. 불가능하다고.”

낭패감을 느끼고 있는 나를 보며 루카르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이러기예요?”

“그렇게 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도 체면이 있는데 그렇게 간단히 풀리면 서운하잖습니까.”

“이봐요, 루카르엠!”

“아, 그러고 보니…….”

발끈해서 소리치려는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시금 쏟아져 내렸다.

“정령이 역소환되면 계약자가 상당한 고통을 느낀다면서요? 상급 정령일수록 가해지는 충격도 더 크다고 하던데. 그 대상이 정령왕인 경우엔 어떻게 될는지?”

“……!”

그 순간 마치 둔기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자 루카르엠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역소환되면 당사자인 정령도 괴롭지만 계약자 쪽에는 온몸의 기류가 역류하는 충격이 가해진다. 직접적으로 마나를 제공하고 있는 라피스는 말할 것도 없고, 이사나에게까지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인간인 이사나는 그 고통을 쉽게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일전에 시큐엘이 역소환되었을 때도 피를 토했던 그다. 정령왕의 기운이 역류되는 충격은 그것의 몇 배에 달할 텐데, 과연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굳어지는 내 얼굴을 본 루카르엠이 발랄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짐작하신 것 같군요.”

“…….”

“인간은 매우 연약해서 통증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엘 님의 계약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가볍게 휘어진 적동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번들거렸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 마족이 이곳에 온 건 이사나를 죽이기 위해서였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원래 방문 목적이 떠올랐다.

‘방심했어.’

설마 기운을 빼앗아 역류시키려고 할 줄이야. 정령왕은 어지간하면 역소환될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사나가 무사히 이 과정을 넘기더라도 문제다. 일단 한번 역소환 되면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당분간은 본계에서 쉬어야 한다. 이사나 역시 몸이 성치는 않을 테니 한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즉,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상대는 마계 4대 공작 중의 한 사람. 시벨리우스 혼자서는 감당하긴 벅찬 존재다. 게다가 알리사 역시 보호해야 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 상태에서, 시벨리우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최악으로 치닫는 생각에 나는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왜일까. 분명 그를 믿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어느새 사이가 좋아졌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왕의 명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한 건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저런, 오해하시면 서글픈데요.”

“이 상황을 두고도 오해란 말이 나와요?”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냥 재밌는 시험일 뿐이라고요.”

그게 무엇을 위한 시험인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도 못할 테니까.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면서 루카르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역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또 다른 방법을 택하시면 됩니다.”

“다른 방법? ……당신 팔을 자르라는 것 말인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잘 이해하셨네요. 두 팔을 전부 다 자르셔야 할 겁니다. 두 손 다 접촉되어 있으니까요.”

“내가 그러는 동안 그쪽은 그냥 가만히 있고요?”

“아, 그렇군요. 혹시 제가 막아설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저항하지 않을 테니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왕이면 단숨에 잘라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아프니까요.”

어처구니없어서 빈정거린 말에 루카르엠은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나 신 난 표정인지 한순간 다른 사람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헷갈렸을 정도였다.

“저기,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요? 당신 팔이라고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제 팔이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 진짜 미쳤어요?”

“자주 듣는 말이죠.”

여기까지 대화하고 나니 다시금 루카르엠의 진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 마족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황망해서 가만히 쳐다보자 그는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자아,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정을 내리셨나요?”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후후, 그런 걸 물어보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러는 사이에도 힘은 계속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러다 정말로 역소환되실 텐데,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당연히 괜찮지 않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날 붙잡고 있는 양팔을 응시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뿌리쳐 보려 했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힘을 더 빨리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래. 다른 방법이 없다면 자르는 수밖에.’

결심을 굳힌 다음 나는 공격하기 위해 기운을 집중했다. 형체를 흩어버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무언가 자를 만큼의 힘을 내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신체는 인간과 똑같이 얇은 가죽과 살점으로 되어 있을 뿐. 단순히 자르는 것만이라면 몬스터의 두텁고 질긴 가죽을 베어내는 것보다도 훨씬 쉬웠다. 비록 루카르엠은 두 팔을 잃겠지만, 지독한 장난을 친 대가라고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자업자득.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막상 붙잡고 있는 손을 보니 자를 수가 없었다. 아직 튀지도 않은 붉은 피가 벌써부터 눈앞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시죠?”

머뭇거리는 내게 루카르엠이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줄어들던 의욕이 더 빠르게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엘, 왜 그래?”

아무 말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시벨리우스가 다가섰다.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사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루카르엠의 양팔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에도 그의 손은 내 힘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잘라내자. 잘라내야 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는 빨리 끝내버리라고 외치고 있는데, 오히려 집중력은 더욱 흐트러졌다. 피가 철철 흐르는 두 눈을 부여잡고 사납게 내지르던 무스의 비명 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 울렸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가며 고통스럽게 흘리던 신음 소리도. ……루카르엠도 그들처럼 비명을 지를까?

‘……어떡하지? 못 하겠어.’

차오르는 낭패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그런 걸 연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진 어떻게든 시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내 팔을 자를까? 일단 그렇게 해도 분리는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실체가 아니니 그렇게 아프지도 않을 거고.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런 짓을 하면 마나를 제공하고 있는 라피스가 다치잖아. 게다가 지금도 빠져나간 힘이 많은데 자칫 역소환될지도 몰라.’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번민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무엇하나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말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렸을 때였다.

“역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루카르엠이 몹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예요.”

“아뇨, 그냥. 제 생각이 맞은 게 기뻐서요. 그때도 짐작하긴 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군요. 사람을 해치는 게 무섭습니까? 정령왕이면서?”

“……그게 정령왕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있죠. 대차원의 존재들도 그렇지만, 보통 정령들은 중간계의 존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거든요. 이곳은 본계가 아니니까요. 아무리 함께 어울려 지내도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구분이 명확하죠. 때문에 감정적으로 휘말리는 일이 극히 드뭅니다.”

“그렇다고 생명을 아무렇게나 해칠 수 있는 건…….”

“하지만 몬스터는 죽일 수 있잖아요.”

“……!”

“단지 대상이 사람이라서 망설이는 거 아닙니까?”

무언가 쿵 하고 마음속에서 진동했다. 아마도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온몸이 떨리는 느낌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마주친 루카르엠의 두 눈은 가볍게 휘어져 있었다. 늘 장난스럽게만 보이던 그 눈동자가 이때만큼은 조금 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촤아악!

그 순간 날카로운 공기의 흐름과 함께 무언가 뜨거운 것이 얼굴에 튀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뺨을 만지자 붉은 액체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투둑 하고 발치에 떨어져 내렸다. 시선을 내려서 보니 뭉툭한 두개의 덩어리가 내던져진 것이 보였다. 그건 잘린 사람의 팔이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전까지 날 잡고 있던 두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런, 치사하게 중간에서 끼어들기입니까?”

사태를 깨닫고 얼굴을 굳히기 무섭게, 루카르엠이 가볍게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느새 내 앞에서 훌쩍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여유롭게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두 어깨 아래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허전해진 소매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치에 떨어진 것의 정체가 더욱 분명해졌다. 정말로 팔이 잘린 것이다.

“흥, 치사한 건 함정을 판 쪽이겠지. 엘의 힘을 빼앗고 있었던 거 다 알아. 내 앞에서 감히 누구한테 수작을 부리는 거야?”

조금 전 검을 휘둘러 그의 두 팔을 잘라낸 시벨리우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궁지에 몰린 것을 보다 못해 직접 나선 것 같았다. 그의 뒤편에선 이사나가 알리사의 눈을 양손으로 가린 채 서 있었다. 어린 소녀가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었으니 당연했다.

“엘, 괜찮아?”

“아, 으응…….”

다가오자마자 시벨리우스는 내 안색부터 살폈다.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끝내지 않으면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안도해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복잡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바닥에 늘어져 있는 살덩이에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난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건만, 정작 두 팔을 잃은 당사자인 루카르엠은 지나치리만치 태연해 보였다. 그의 표정만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흐음, 뭐, 좋습니다. 끼어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으니 제가 이해하죠. 난 참 마음이 넓어서 탈이라니까.”

“헛소리 하지 마! 이번엔 팔로 참아주지만, 또 이런 짓을 했다간 목을 날려버릴 줄 알아!”

“협박입니까? 과연 룬의 혈통.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호전적이시네요.”

“닥쳐! 더러운 마족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 없어!”

사나운 일갈에 루카르엠은 오히려 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마족이라면 모두 더럽다고 치부하다니, 확실히 성마답군요. 하기야 예로부터 당신들 일족은 유난히 흑백논리가 강한 편이었죠.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상처 입히기도 쉬운 법. 당신은 좋은 패가 될 겁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우리들 앞에서 사라져!”

“물론 그럴 겁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대로 계속 활동하는 건 힘드니까요.”

가볍게 대꾸한 후 루카르엠은 슬쩍 팔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지혈을 하지 않은 팔은 아직도 붉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단순히 베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절단된 상태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고 해서 진짜 괜찮을 리가 없었다. 기분 탓인지 안색도 많이 나빠져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단 치료를…….”

“그냥 내버려 둬, 엘.”

“하지만…….”

“어차피 저 정도는 알아서 할 거야. 네가 나설 필요까지 없어.”

“맞습니다. 이 정도는 제가 알아서 수습해야죠.”

시벨리우스의 냉정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낭랑한 루카르엠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순간 바닥에 있던 두 개의 팔이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그 상태로 천천히 루카르엠의 앞으로 이동했다. 아마도 그가 마력을 써서 옮겨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만족스럽게 웃었다.

“흐음, 싫어하는 티를 있는 대로 내신 것 치곤 아주 깔끔하게 자르셨는데요?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이 정도면 그럭저럭 봉합할 수 있겠네요.”

“다, 다시 자랄 수도 있어요?”

“물론입니다. 마족의 육체는 재생력이 좋거든요. 시일이 조금 오래 걸리긴 합니다만.”

어쩐지 이 상황에서도 느긋하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가.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드는 게 허무해서인지, 아니면 안도해서인지 갈피가 잘 서지 않았다.

“그럼 전 이쯤에서 퇴장해야겠군요. 아쉽지만 이런 식으로 뵙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마계로 돌아가는 건가요?”

“회복하려면 그 편이 빠릅니다. 어차피 슬슬 돌아갈 시기이기도 하구요.”

마지막 말에서 나는 그가 처음부터 돌아갈 예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장난의 수위가 높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조금 미묘한 기분으로 루카르엠을 바라보았다. 대면할 때는 얄밉기만 했는데 막상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미운정이 단단히 들은 모양이다. 그러자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루카르엠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얼굴이신데요? 제가 싫진 않으셨나 보죠?”

“네.”

“어, 정말요?”

그렇게 의외였던 걸까. 본인이 물어놓고도 놀란 듯 루카르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왠지 처음으로 그가 진짜 당황하는 걸 본 것 같았다.

“왜요? 왜 안 싫어요?”

“싫어해야 해요?”

“그런 건 아니긴 한데…… 그치만 저 그동안 여러분께 이러저러한 나쁜 짓들 많이 시도했는데요? 조금 전에도 진짜 위험했었잖아요?”

“그건 싫었지만, 그래도요. 왠지 나한테 해를 끼칠 것처럼 보이진 않더라구요.”

“호오, 마족 정도는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위협한다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

생각해 보면 그의 악질적인 장난에 바보 같을 정도로 쉽게 걸려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같다. 당연히 비웃을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 외로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탄한 것 같기도 한, 왠지 낯익은 눈빛이었다.

나는 곧 그 눈을 어디서 보았던 건지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서운 것이냐고 물었을 때, 나를 보았던 그 묘한 눈빛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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