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67화 (167/608)

제167화

“뭐,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나는 황급히 사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분리된 두 쪽이 늘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자리에 남은 건 두 개의 거대한 구멍이었다.

‘응? 두 개의 구멍?’

의문을 느끼기 무섭게 해답이 제시됐다. 다른 쪽에서도 거대한 몸통이 솟아오른 것이다.

“키에에엑!”

“허억!”

“뭐, 뭐야!”

또다시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나는 조금 질린 기분으로 두 마리의 땅굴 각귀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에서 분리된 두 개의 몸통,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두 마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연관성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편형동물이라더니…….’

그냥 자르기만 해선 죽지 않는 거였던가. 그러고 보니 처음 것에 비해 둘 다 몸체가 많이 작은 편이었다. 갈라진 부분을 시작으로 새로 자라난 것이 분명했다. 과연 드높다는 악명답게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나마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된 상태는 아닌지, 목표를 노리는 정확도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허를 찌르는 등장이었는데도 아무것도 잡아먹지 못한 것이 그 증거였다. 속도나 파괴력도 온전했을 때에 비하면 상당히 약했다. 병사들로서는 천운인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가 방심하고 있었던 만큼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일이었다.

잠시간 포효하던 두 마리가 다시 순식간에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공격을 재시도하려는 것이다.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 사람 살려!”

병사들은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기를 잃어버린 사람은 물론, 멀쩡히 지니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대열을 지키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한 남자가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함께 뛰던 사람이 다리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봐, 괜찮아?”

“크윽! 발목을 삔 것 같아.”

“이런! 하필 이런 때에!”

혀를 찬 남자가 서둘러 넘어진 동료를 부축했다.

바로 그때였다.

“키에에엑!”

“으아악!”

요란한 진동과 함께 두 사람 앞에 거대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땅굴 각귀신이 그들을 노리고 나타난 것이다. 힘껏 벌려진 구멍이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두 사람을 덮쳐들고 있었다. 찌를 듯 울려 퍼지는 비명에 나는 서둘러 기운을 운용했다. 아무리 밉상인 사람들이라도 바로 눈앞에서 죽는 걸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일단 살리고 볼 셈이었다.

“멀든!”

그 순간 종소리처럼 고운 소녀의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알리사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바닥에서 나무줄기가 빠르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드득! 순식간에 자라난 줄기가 방벽을 만들어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쐐애액! 쿠웅! 간발의 차이로 몬스터의 송곳니는 두 사람의 몸을 삼키는 대신 나무줄기에 박혔다. 몸체가 거세게 부딪치고, 나무 방벽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면 알리사에게 전해지는 충격도 상당히 클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이기지 못했는지 알리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행히 그녀가 거기서 더 버틸 필요는 없었다. 뒤에서 솟구쳐 나온 물줄기가 곧바로 몬스터의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마침 상황을 발견한 이사나가 급히 수습에 나선 것이다. 이미 그는 다른 쪽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를 붙잡아 몸통을 결박해 둔 상태였다. 알리사보다 반응이 늦었던 건 그 때문인 듯했다.

“이사나! 얘들은 그냥 자르는 걸로 안 되는 것 같아! 완전히 회생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내 말에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윽고 마나가 응축되는 느낌과 함께, 두 마리의 시큐엘이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상급 정령을 다수로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정령왕의 계약자뿐이다. 다른 정령사가 보았다면 기함할 광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사나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정령사인 알리사는 그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시벨리우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시큐엘, 부탁해!”

이사나의 외침과 동시에 두 시큐엘이 각기 허공을 선회하며 솟아올랐다. 그러곤 묶여져 꿈틀거리고 있는 몬스터의 입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시큐엘을 완전히 삼킨(?) 직후, 몬스터들은 괴로운 듯이 몸부림쳤다. 그들의 몸통이 부글거리며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콰직! 퍼버벙!

촤아악!

곧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붉은 피와 끈적한 점액들이 튀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 형체를 이루지도 못하도록, 아예 몸 안쪽에서 터트려 버린 것이다.

‘……와우.’

그 요란한 광경엔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 내장 조각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중 일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기도 했다.

“이제 완전히 끝난 것 같네.”

시벨리우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사가 구한 두 남자는 그때까지도 멀든이 만든 방벽 안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알리사가 다가서자 방벽은 점차 허물어지더니 천천히 꿈틀거리며 본래의 나무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 광경에 두 남자가 기겁하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저기, 괜찮…….”

“히이익! 저, 저리가!”

그들은 알리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더욱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마치 귀신이라도 목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알리사는 손을 뻗으려다 말고 침울하게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과 두세 발짝 떨어진 거리. 그것이 앞으로도 여전할 그녀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사나 역시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나선 일인데 결과적으론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속이 많이도 쓰릴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고생했어, 이사나. 정말 멋있었어.”

내 말에 그는 힘없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다음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위가 많이 어두워졌다 싶더니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었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했다. 죽여서 사건을 은폐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살해하려던 사람으로부터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니 얼마나 낯이 뜨거울까. 아마 온몸의 치부를 드러낸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대처 방식이 매우 나빴다.

“나 참. 아무런 희생 없이 몬스터를 잡았는데 누구 하나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네. 하다못해 사과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직이 투덜거린 말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사과도 감사의 말도 없이, 묵묵히 자리를 정리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중 몇몇은 오히려 나를 노려보았다. 아마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혀를 찬 다음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불쾌한 곳이야. 우리는 이쯤에서 그만 떠나자.”

“어? 지금?”

“웬만하면 날이 밝을 때 나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 마을에서 밤을 보내면 꿈자리가 엄청 사나울 것 같아. 어차피 짐도 다 챙겨 나왔으니 들를 것도 없이 바로 출발하자.”

“……그냥 떠나버려도 괜찮은 걸까?”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사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대강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짐작했다. 알리사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우리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번쯤은 멋대로 행동해도 좋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이런 모습도 이사나다워서 좋았다. 나는 살짝 머리를 긁적인 다음,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음성을 높여 말했다.

“저기, 시벨. 너 요리하는 거 좋아하지?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많으면 더 좋지 않을까?”

“응?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엘?”

“아니, 왠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사실 셋이란 숫자가 조금 심심하긴 하잖아? 모름지기 모험이라면 인원이 짝수인 편이 더 정감가고 좋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아.”

어리둥절해하던 시벨리우스가 그제야 내 말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피식 웃었다.

“물론 일행이 늘면 좋지. 하지만 남자만 넷이면 재미없으니까 이왕이면 여자였으면 좋겠어.”

“그래? 하긴, 아무래도 한 사람쯤은 여자가 있는 편이 좋겠지? 여자애들은 섬세하니까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 같은 것도 알아차릴 거야.”

“응, 맞아. 역시 엘이 뭘 좀 안다니까.”

“이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 으응.”

이사나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씨익 웃어준 다음,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알리사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는데, 거기 너! 이름이 알리사라고 했지? 어때?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

어디선가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주인공은 뻔했다. 이사나였다. 그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깜짝 놀란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정령사로서는 냉정하리만치 의연하게 행동하면서도, 이런 점에선 여전히 순진한 소년다웠다.

오히려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알리사는 평온할 정도로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의 동요도 비추지 않는 눈동자라 나는 약간 긴장했다.

솔직히 반쯤은 충동으로 내뱉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막상 데리고 나가자고 생각하니 결심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정령의 힘을 지닌 자는 비록 인간일지라도 정령계에 속한 존재다. 이런 불쾌한 장소에 정령의 아이를 계속 방치해 두는 건 정령왕으로서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당신들이랑?”

“응! 아, 딱히 수상한 뜻이 있는 건 아냐. 그냥 여기보다 다른 곳이 너한테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우린 한동안 이 대륙을 여행할 예정이거든. 이런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마을보다 더 큰 세상을 만나고 싶지 않아?”

“더 큰 세상…….”

“그래, 더 큰 세상. 우리가 데려다 줄게. 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

알리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거절할까 싶어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만약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설득할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소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런데 이어진 건 수락도 거부도 아닌, 전혀 엉뚱한 대답이었다.

“난 이상할 정도로 감이 매우 좋아.”

“……으응?”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랬어.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지. 그것을 무시하면 늘 안 좋은 꼴을 겪었기 때문에 갈수록 내 감을 맹신하게 됐어. 지금까지 가출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야. 이 마을을 떠나면 위험할 거란 감이 왔거든. 토벌에 나가 몬스터한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할 거란 예감이.”

“아, 그런…….”

“그런데 그게 전부 오늘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야.”

마지막 말의 의미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알리사가 피식 웃었다.

“물어봐 줘서 고마워. 덕분에 새로운 예감이 들었어. 그동안 수차례 마음속에서 똑같은 질문을 해 왔는데 괜찮다는 느낌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럼, 같이 가겠다는 거야?”

“응!”

힘찬 대답에 마음속이 단숨에 가벼워졌다. 알리사 역시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면서, 생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모습 같았다. 멀든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실은 어제 당신들을 만난 순간부터 내내 두근거렸어. 내 앞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여기서 당신들을 발견했을 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내가 살 거란 걸 확신했어. 혹시 처음부터 날 구하러 왔던 거야?”

“맞아, 부탁을 받았거든.”

“누군지 알 것 같아. 팔론이지?”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 순간 커다랗게 깜빡이는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구슬처럼 흘러나왔다.

“알리사?”

“아, 미안. 왠지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알리사는 서둘러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냈다. 분명 울고 있건만 그다지 안타깝지 않은 건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동안 웃으며 울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몹시 허둥거리며 물었다.

“저기, 근데 괜찮은 거야? 나 어쩌면 엄청난 민폐일지도 몰라. 어릴 때부터 쭉 이 마을 안에서만 자라서 여행은 다녀본 적이 없거든. 체력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어서 당신들을 힘들게 할 거야.”

“응, 괜찮아.”

“정말? 그래도 같이 가도 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둥그렇게 쳐다보면서 묻는 말에 나와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모두를 대신해서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알리사는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감상하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행동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알리사가 겨우겨우 내 손을 맞잡았다. 하얗고 작은 손이었다.

“……말 안 들으면 중간에 버리고 가도 돼.”

손을 꽉 붙든 채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와 일행들은 다시금 웃었다. 문득 우리들의 정체에 대한 것이라든가, 여러 가지 의논해야 할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잠시 동안은 잊기로 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엔 그녀를 만남으로써 얻은 가치들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이 오늘따라 푸르스름해 보였다. 왠지 이 소녀와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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