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66화 (166/608)

제166화

후욱!

“……!”

그 순간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알리사의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의 빛이 꺼졌다.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병사들이 들고 있던 횃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횃불이!”

당황한 사람들이 허둥거리는 동안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절벽 위에 걸려 있던 해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날이 완전히 저문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바로 이사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사나! 조심해!”

쿠과아아앙!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사나와 알리사가 서 있는 바로 앞쪽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아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기둥이 아니라 두터운 가죽으로 된 몸체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우둘투둘한 표면에 수백 개의 눈알이 빼곡히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리엔 날카로운 긴 이빨이 수염처럼 돋아나 있었다.

‘땅굴 각귀신!’

대형 몬스터라고 하더니 실제로 보니까 정말 압도되리만치 거대한 크기였다. 불쑥 튀어나온 힘만으로 지면이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강한 충격에 사람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사이, 몬스터는 곧장 굉음을 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이사나와 알리사를 덮쳤다. 순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쿠르르릉! 콰직!

“이사나!”

다행스럽게도 이사나 역시 늦지 않게 반응했다. 커다랗게 벌려진 입이 닿기 직전, 시큐엘이 날쌔게 뛰어들어 그들 앞을 막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퍼져 나온 푸른색의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날카롭게 회전하며 둥근 장막을 펼쳤다. 이어서 두 개의 기운이 정면으로 충돌했고, 몬스터의 몸체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내리꽂힌 속도에 의한 반동 때문인지 나가떨어진 거리도 상당했다.

쿠궁! 콰아앙!

“키이이익!”

‘휴우.’

고통에 찬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위험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때까지도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몬스터의 비명을 듣고서야 겨우 사태를 파악한 듯했다. 어리둥절하던 얼굴들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몸체를 확인하는 순간 새파랗게 굳어졌다.

“히익! 나왔다! 땅굴 각귀신이다!”

“으아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겁에 질린 병사들 몇이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행렬은 마구 흐트러졌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공격을 당한 충격에는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알리사는 숨도 못 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아무리 중급 정령사라고 해도 평범하게 자란 소녀였다. 압도적인 크기를 지닌 괴물을 보면서 평정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괜찮습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걱정스러웠는지 이사나가 조심히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을 받자마자 알리사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실감한 것 같았다. 이사나는 몬스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저한테서 떨어지지 마세요. 곧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경고를 건네기 무섭게 땅굴 각귀신의 몸체가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다. 우르르 일어나는 진동에 알리사는 잘게 어깨를 떨었다. 다음 공격은 곧바로 이어졌다. 모습을 감췄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다시 지면을 뚫고 몸체가 솟구쳐 오른 것이다. 이미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는데도 타격을 전혀 받지 않은 듯, 오히려 움직임이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시큐엘!”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이사나 역시 조금 전보다 더 수월하게 공격을 막아 냈다. 빠르게 달려드는 송곳니를 쳐내는 것과 동시에 반격은 곧바로 이뤄졌다. 시큐엘이 몬스터의 몸을 가볍게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발이 닿는 부분마다 솟아오르는 물줄기가 마치 밧줄처럼 몬스터의 몸통을 휘감아갔다.

휘릭! 촤아악!

“키에에엑!”

육중한 몸체가 붙들리자 땅굴 각귀신은 마구 몸부림쳤다. 그럴 때마다 묶고 있는 물줄기가 날처럼 휘어져 가죽이 잘게 베여나갔다. 녹색의 점액과 핏덩어리가 물과 함께 섞여 사방에 튀었다.

“오오오!”

“붙잡았다!”

몬스터가 묶이는 것을 본 토벌대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울려 퍼졌다. 움직임을 제압했으니 이제 마무리는 시간 문제였다. 이사나는 가볍게 심호흡 한 다음 눈을 굳게 감았다. 그러자 물줄기가 더욱 몬스터의 몸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압력을 가하다 못해 가죽을 꿰뚫고 들어갔다.

쿠지직! 콰아아악!

‘윽…….’

파고들어가는 물줄기 사이로 붉은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몸부림치는 몬스터를 보며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물로 된 밧줄이 파고들 때마다 몬스터의 몸이 조금씩 절단되어 가는 광경이 생생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샴페인 용병단과 어울리면서 잔인한 광경에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키익! 키에에엑!”

두둑! 쿠우웅!

잠시 후 강한 소음과 함께 몬스터의 머리 부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몸이 완전히 절단된 것이다.

분리된 후에도 떨어진 부분과 남겨진 부분은 한동안 땅에서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덮쳐올 듯 위협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몸부림은 점차 눈에 띌 정도로 약해지더니 이내 축 늘어져 잠잠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모, 몬스터가 죽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모든 과정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집요하게 시달려온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죽음이었으니 믿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사이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시큐엘이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사나가 손을 내밀자 그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 칭찬을 바라듯 품속에 머리를 비볐다. 정령사가 계약한 정령과 누리는 일종의 교감 행동이었다.

이사나가 시큐엘의 털을 가볍게 쓰다듬는 동안, 알리사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듯 이사나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신기합니까?”

“……몸이 물로 되어 있네.”

“그야 물의 정령이니까요.”

“그럼 멀든은…….”

“멀든은 땅의 정령입니다. 혹시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습니까?”

“으응.”

“한 번 만져보세요. 보기만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 겁니다.”

그 말에 알리사는 자신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멀든을 돌아보았다. 기둥 가운데 거멓게 박힌 두 눈이 느릿하게 껌뻑이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분 좋은 듯 멀든의 잎사귀가 파르르 흔들리더니, 가지 사이에서 오색빛깔 꽃들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녹색 잎만 가득하던 가지들이 총천연색의 꽃잎으로 뒤덮이는 광경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활짝 만개한 꽃잎에선 꿀처럼 달달한 향기가 진동했다.

“아……!”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알리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돌아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세상에 그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주위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뻣뻣한 것을 강제로 당길 때 나는 소리였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활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쥔 화살촉은 전부 이사나와 알리사를 향해 있었다.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이사나가 서둘러 알리사를 자신의 뒤에 서게 했다. 그제야 활을 든 병사들을 발견한 듯 알리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공기가 팽팽해졌다.

“잠깐만요! 지금 뭐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나는 당황해서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내 앞에 있던 병사들이 검과 창을 빼어 들었다. 그들이 겨눈 무기가 나와 시벨리우스의 주위를 빙 둘러 에워쌌다. 마주치는 눈빛마다 희미한 살기가 느껴졌다. 명백한 적의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질문을 한 건 이사나였다. 그러자 병사들 앞에 서 있던 지휘관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군. 개인적인 유감은 없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게 몬스터를 잡아준 답례입니까?”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몬스터만 죽었지.”

“……?”

이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휘관은 쓰게 웃으며 알리사를 가리켰다.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엔 두려움과 증오심이 가득했다.

“오늘 저 아이의 역할은 이 자리에서 몬스터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어. 즉, 이 마을에 서려 있는 재앙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거다. 이 마을이 온전히 평화로워지려면 저 아이가 죽어야 해.”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설마 아직도 재앙의 소녀 운운하는 겁니까? 알리사 양은 그저 정령사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물론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담담히 내뱉은 대꾸에 이사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동요를 비추고 있는 그를 보며 지휘관은 히죽 웃었다.

“정령사건 아니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저 아이가 재앙의 원흉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다는 거지.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저 아이가 지닌 능력 때문에 이 마을에 몬스터의 습격이 시작된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다.”

“……궤변입니다. 그 능력 덕분에 풍요롭게 살았을 땐 오히려 기뻐했을 것 아닙니까?”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지독한 가뭄은 이제 끝났지. 우린 안정을 원할 뿐이다.”

“무고한 소녀의 피 위에 세운 안정 말입니까? 지금 당신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무지해 보이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세간엔 그녀가 몬스터와 싸우다 죽은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두세 명 더 죽었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지. 이렇게 거대한 몬스터를 잡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살인 멸구하겠다는 말을 뻔뻔하게 돌려 말하는 모습에 나는 잠시간 어이를 상실했다. 시벨리우스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병사들 중에서 지휘관의 뜻에 반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미안해하거나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었던 것이다.

의기양양한 병사들을 보며 이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굉장히 간단하게 생각하시는군요. 설마 저희 쪽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흥, 네가 강하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정령사라도 이만한 숫자를 상대로는…….”

하지만 지휘관은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수십 개의 물 덩어리가 비눗방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병사들이 들고 있던 활을 덥석 삼켰기 때문이다. 물방울에 갇힌 활은 주인이 들고 있던 그 상태에서 그대로 파사삭 바스러졌다.

“어? 어어어?”

순식간에 벌어진 현상에 병사들은 모두 자신의 손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지휘관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시큐엘에게 내린 지시 한 번으로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이사나가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숫자가 많긴 하군요. 그래서요? 무기도 없이 싸울 겁니까?”

“…….”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고요히 얼어붙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얼굴이었다.

“끝났군.”

하품을 한 시벨리우스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바보들. 대형 몬스터를 단숨에 해치우는 걸 봤으면서 어떻게 덤빌 생각을 하지? 너무 한심해서 동정도 못하겠네.”

그가 어이없어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쓰게 웃었다. 사실 정령은 개인전보다 다수와 싸울 때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중급 정령사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집단쯤은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령사란 존재 자체가 워낙 드물다 보니 알려진 정보 역시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곳에 있는 자들 중 대부분은 시큐엘이 상급 정령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물며 이사나는 정령왕의 계약자. 검술로 표현하자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존재다. 그쯤 되면 상대가 다수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도 제대로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낮은 수준의 병사들이라면 더더욱.

“우릴 어쩔 생각이지?”

굳은 얼굴로 묻는 지휘관의 말에 이사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협박을 한 건 당신들 쪽입니다. 난 사람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얌전히 놓아주겠다는 건가?”

“당신들이 이대로 그냥 물러난다면요.”

한동안 팽팽한 공기 속에서 무언의 시선이 오갔다. 하지만 이미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모두 철수한다.”

결국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지휘관의 침울한 음성이 울렸다. 주저하던 병사들은 곧 우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말없이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던 이사나가 겨우 미소 지으며 알리사를 돌아보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

그의 다정한 말투에 알리사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떠난 후에 혼자 남겨질 알리사가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겠지만,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한 분명 어떤 식으로든 해코지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사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콰직! 촤아앗!

“으아아악!”

“……!”

느닷없이 거대한 소음이 울리더니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닥 속에서 땅굴 각귀신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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