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앞으로 삼 보 이동!”
“정지!”
우렁찬 고함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발길이 분주했다. 다수의 병사들과 일반 장정들로 구성된 무리는 오늘 땅굴 각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모인 토벌대였다.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밤에 활동하는 몬스터라 그런지 아직까지는 다들 대체적으로 느긋한 모습이었다. 제법 정돈된 앞 열과는 다르게 후미 쪽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줄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나와 일행들도 그중 구석진 자리에 섞여 있는 상태였다. 소녀를 돕기 위해 토벌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타는 듯이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쏟아지는 것을 한 손으로 막으며 나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마을 어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펼쳐져 있는 바위 협곡, 거기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본래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바위산에 불과했다는데, 2년 전 땅굴 각귀신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동굴이 생겨났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땅굴 각귀신의 거처인 셈이었다.
“저기가 그 몬스터의 둥지야? 정말 마을이랑 가깝네.”
옆에서 나와 같이 둥지의 위치를 확인한 시벨리우스가 왠지 감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늘의 그는 평소 바람막이를 위해 머리에 두르던 천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그의 푸른색 피부와 길게 솟아오른 두 귀가 사람들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무수한 인간들 틈에서 홀로 이종족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그는 존재만으로도 몹시 튀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따갑게 달라붙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벨리우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놈이 작정하고 습격하는 경우엔 대처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대형 몬스터면 방책으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그건 애초에 통하지도 않을걸? 땅 속으로 다닌다니까.”
“아, 하긴. 지하 몬스터라고 했었지.”
전날 들은 이야기를 되새긴 듯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정보를 준 대장장이는? 그자는 토벌에 참여하지 않는 거야?”
“오고 싶어 했는데 아내의 반대가 심해서 나오지 못하나 봐.”
“유부남이었어?”
“응, 그렇더라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다. 가정을 이루고도 남을 나이라는 데엔 부정할 수 없지만, 기혼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그가 아무리 소녀를 걱정하고 있어도, 결국 마지막에 선택하는 건 자신의 가정인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상기된 시선으로 주위를 훑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원래도 밝은 편이긴 한데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녀를 구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인 것 같았다.
“그야 여자애를 돕는 일이잖아.”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단지 그것뿐?”
“그것 외에 뭐가 또 필요해? 위기에 빠진 여성을 돕는 건 사내의 긍지라고 배웠어. 사내로 태어나 여인을 세 번 이상 구해 보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라고 했었지.”
“……대체 뭘 배우며 자라는 거야.”
“원래 우리 일족 남성이 여인에게는 친절하거든.”
“흐응~ 미혼의 처녀들한테만이 아니고?”
그렇게 말한 건 유니콘이 순결한 처녀를 좋아한다는 전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구에서나 알려진 얘기인 만큼 딱히 눈앞의 시벨리우스와 연관 지어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연히 농담으로 건넨 그 말에 시벨리우스가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아니, 그건 딱히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혹시 예전 일이 기억나기 시작한 거야?”
“……헐, 그럼 그게 진짜라고?”
경악해서 쳐다보자 시벨리우스는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냐! 으음, 뭐랄까. 인간 처녀들만이 지니는 특유의 향이 있어. 그게 우리 일족들한테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뿐이야. 보, 본능적인 이끌림일 뿐, 그렇다고 유난히 차별을 두고 대하진 않아. 정말이야.”
“처녀가 아니면 뿔로 찔러 죽인다고 하던데…….”
“뭐? 말도 안 돼! 누가 그런 짓을 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몇이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쉿 하고 소리쳤고,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런 건 절대 아냐.”
다시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시벨리우스는 볼멘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전설과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너 혹시 그 여자애한테 허튼 짓 하면…….”
“……제발 무서운 소리는 그만 둬. 나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놈 아니야. 말했잖아. 그냥 좋은 향기를 가졌다고 느낄 뿐이라고. 고작 그 정도로 문제를 일으킬 정도면 마을을 돌아다니지도 못할걸?”
“으음, 하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향기에 영향을 받는 건 인간을 전혀 접해 보지도 못한 숙맥들뿐이야. 난 이미 진한 향에 익숙해져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 것도 있지만 너와 함께 지낸 덕분이지.”
“엥? 나?”
“너한테서도 좋은 향이 나거든.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땐 여자애로 착각했…… 미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매서웠는지 그는 신 나게 얘기하다가 시무룩해져서 사과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곧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뭐라고. 그건 과거의 엘 이야기지? 나한테 한 말인 줄 알았잖아.”
“응? 아니, 지금도 별로 다르진 않은데? 지금 너한테서도 같은 향이 나니까.”
“뭐? 지금도?”
황망히 되묻기 무섭게 문득 처음 그와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짜고짜 내 냄새를 맡았었지. 그리고 내가 ‘엘’과 동인인물임을 확신했었다.
얼굴은 몰라도 체취까지 똑같을 수 있는 건가? 나는 손목을 들어서 잠시 코에 가져다 대어 보았다. 하지만 좋은 향기는커녕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아, 그럴 거야. 그건 우리 일족만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일종의 파장 같은 거랄까? 그게 우리들에겐 향기로 느껴지는 것뿐이야.”
“흐음. 그것도 영안이랑 관계 있는 거야?”
“비슷해. 그리고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여자애로 오해한 건 아주 잠깐이었어. 분명 좋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향이거든. 너한테서 나는 건 정령의 향기야.”
“정령?”
뜻밖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자 시벨리우스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방긋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기쁜 것 같았다.
“실체화한 정령들에게도 각자 고유의 향이 있어. 하급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상위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지. 특히 정령왕 정도 되면 계약자들에게까지 그 향이 배어나는 편이야.”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엘’도 엘퀴네스의 계약자라고 했었지.”
정령 고유의 향기라면 그때의 엘이 지닌 향은 엘뤼엔에게서 받은 영향이었을 것이다. 현재 엘퀴네스인 나와 똑같은 향기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지당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예전엔 인간 특유의 체취가 섞여서 지금보다 좀 더 독특한 느낌이 있었어. 지금은 너무 그 녀석 같아.”
“그 녀석?”
“전대 엘퀴네스 말이야. 너도 지금은 엘퀴네스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럼 이사나는?”
“응? 이사나?”
“이사나 역시 엘퀴네스의 계약자고, 또 인간이기도 하잖아. 조건만으로는 지금의 나보다 그때의 엘이랑 더 똑같아. 그럼 체취도 같은 거 아니야?”
이런 질문을 내뱉은 건 다분히 심술적이었다. 아직도 날 철석같이 ‘엘’이라고 믿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혼란을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주장하는 나와 엘의 공통점 같은 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엘에 관해서는 전혀 타협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만큼, 난 이번에도 그가 발끈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시벨리우스는 의외로 진지하게 이사나를 응시했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이사나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흠, 확실히. 향기 자체만으로 따지자면 그렇긴 해.”
“그런가요?”
이사나가 이채 어린 얼굴로 자신의 냄새를 맡았다. 유니콘만 감지하는 향이라는 걸 듣긴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응, 근데 엘에 비하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냄새가 약해. 그래서 그런지 딱히 비슷한 건 잘 모르겠어. 아마 이쪽이 정상이겠지. 엘은 배어 있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꽤 향기가 진했거든. 정령왕인 지금이랑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거 정말 인간이었어?”
말이 좋아 향기지, 달리 말하면 정령왕과 똑같은 파장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평범한 인간이 아닌 줄이야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특이하다는 게 말이 되나? 얼굴을 찌푸리는 나와는 다르게 시벨리우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반색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치? 그치? 나도 늘 엘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다음 세대의 엘퀴네스로 내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인간이면서도 정령의 향기를 강하게 품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생각해, 엘?”
“글쎄…….”
“어휴,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라니까.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 엘은 내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결국 이번에도 똑같은 결론이다. 각오하긴 했어도 이럴 때마다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이 녀석은 언제쯤이면 내가 다른 사람이란 걸 인정하게 될까? 나는 소득 없이 끝난 대화를 외면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왠지 시벨리우스를 만난 뒤로는 두통이 가실 날이 없는 것 같았다.
“정렬! 모두 정렬하시오!”
때마침 이어진 호령 소리 덕분에 불편한 화제는 바로 종결됐다. 날이 저물어 감에 따라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배열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나와 일행들도 대열에 맞춰 섰다. 한구석에선 횃불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야 나타난다고 했나?”
시벨리우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게다가 굉장히 빠르다나 봐. 먹이를 잡으면 그대로 땅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놓치면 그걸로 끝이래.”
“그럼 일단 움직임부터 봉쇄해야겠네.”
당연한 결론을 도출했을 때 근처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옆쪽에 서 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더러 들으라는 듯이 떠들었다.
“다들 들었어? 움직임을 봉쇄하면 되겠단다. 이게 무슨 사냥터에서 사슴 잡는 일인 줄 아나? 잡는다고 잡히면 그게 몬스터야?”
“내버려 둬.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잖아. 땅굴 각귀신을 실제로 볼일이 있기나 했겠어?”
“하기사. 호기심에 토벌에 참여하는 것 같은데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노골적으로 비웃는 말투엔 우리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타지인인 데다 연령대가 어려서 그런지 딱히 전력으로 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반응에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방적인 적의를 상대할 필요도 없었고, 일일이 발끈하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이사나 쪽이었다. 시벨리우스가 평소보다 들떠 있다면 그는 유난히 기운이 없는 상태였다. 여느 때처럼 대화도 하고 반응도 곧잘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 소녀가 처한 상황을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과 겹쳐보고 있는 거겠지. 그에게 아버지는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일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둘까 하다가 나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걸고 말았다.
“이사나.”
“응?”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작게 속삭이자 이사나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곧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응.”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던 공기가 약간이나마 가벼워졌다. 너무 빤한 위로라서 건네는 나조차 민망했는데, 다행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동안 어수선하던 행렬은 어느 정도 정돈을 마쳐 가고 있었다. 해가 떨어져 가는 것이 눈에 보일 때쯤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의아해져서 돌아본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토벌대의 지휘관과 함께 작은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알리사였다.
활기차 보이던 어제의 모습과는 다르게 알리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가냘픈 몸엔 그 흔한 방어구 하나조차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퉤, 왔군. 재수 없는 년.”
근처에서 험악한 욕설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욕을 내뱉은 건 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병사들 역시 모두 싸늘한 눈초리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케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따라왔네.”
“흥, 저 저주받은 몸으로 어딜 갈 수 있겠어? 그나마 이 마을 사람들이 착하니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던 거지, 다른 마을 같으면 진즉에 목숨 부지하기 어려웠을걸? 아마 화형을 당했을지도 모르지.”
“저 낯짝 보는 것도 지겨운데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이런 고생도 더는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저도 눈치가 있는데 선두에 서는 의미를 모르진 않겠지. 양심이 있다면 몬스터와 싸우다 같이 죽어주지 않겠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수군거리는 소리마다 하나같이 저주에 가까웠다. 어린 소녀를 향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악의였다.
‘뭐 저런 사람들이……!’
순간 발끈해서 나서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시벨리우스인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은 이사나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저런 생각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사람들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엘. 여기서 나서 봤자 오히려 괜한 빈축을 살 뿐이야.”
“그치만…….”
“지금은 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이방인을 경계하고 있는데 토벌 작전에서 쫓아낼지도 모르잖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불만을 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새삼 이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는 어제부터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지금 상황에선 나보다는 오히려 그가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담담한 표정과는 다르게 이사나의 눈빛은 싸늘히 가라앉아 있었다. 달달한 벌꿀처럼 늘 따스해 보이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느껴지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