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63화 (163/608)

제163화

소녀를 위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대장장이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조금 전보다 한층 굳어진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그런 것까지 아는 걸 보니 손님들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뭘요. 정령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아는 것들이에요. 지금까지 이곳을 지난 사람들 중에 정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보네요.”

“으응, 없었어. 아무래도 지방이다 보니 이능력에 관한 건 접할 기회가 드물거든.”

“그렇구나. 이 마을은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정령사들 중에서도 땅의 정령사는 특히 인기가 많아요. 머무는 곳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거든요. 지금도 식물을 잘 키운다고 했죠? 본격적으로 정령술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보다 더 굉장해질 거예요. 몇 년 후에는 이 일대에 거대한 숲이 생겨날지도요.”

내가 너무 장황하게 떠들어댄 탓일까. 자랑스러워하길 바라는 마음에 해 준 말이었는데 왠지 듣는 이의 표정이 멍했다. 그는 한참 동안 흔들리는 눈빛으로 우리를 보다가 물어왔다.

“인기가 많다는 건 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거지?”

“네? 아아, 그야 물론이죠. 굳이 땅의 정령사가 아니라도 중급 정령사쯤 되면 어느 나라를 가도 귀족으로 대우받을걸요?”

“……그래, 그렇구만? 이것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곳에 손님들 같은 사람이 진작 있었다면…….”

한탄처럼 중얼거린 그는 입술을 악물며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나와 이사나가 당황하여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대장장이가 불쑥 고개를 들고 우리를 향해 말했다.

“저기, 있잖아. 내 요청 좀 하나 들어주시지 않겠어?”

“요청이요?”

“응. 초면에 이런 부탁하는 건 미안하긴 한데, 일단 아가씨가 알아본 상대기도 하고. 왠지 손님들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야.”

대장장이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의아해하면서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일단 무슨 요청인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윽고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리사 아가씨를 구해 줘.”

* * *

대장장이 팔론의 대장간은 개인이 운영하는 것치곤 꽤 넓은 편이었다. 벽에는 수십 점의 병기들과 농기구가 걸려 있었고, 보이는 곳마다 각종 도구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작업 공간 너머에 있는 작은 휴게실이었다. 그저 문이 하나 더 달린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쉬는 공간이라 그런지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장장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많이 비좁지? 그래도 밖에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웃으며 말하자 그는 겨우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뜻밖의 요청을 한 이후로 그의 얼굴은 내내 핏기를 잃은 상태였다.

다짜고짜 아가씨를 구해 달라는 말은 뜻을 파악하기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인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라 자세한 사정을 듣기로 했다. 그 결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대장장이는 매우 긴장한 얼굴로 우리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이미 오늘의 영업은 전부 접고 온 참이었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첫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산 제물?”

동시에 외친 소리에 대장장이가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엔 그가 대접한 음료가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산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으음, 그건 그냥 비유야.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군.”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이 순간에조차 그는 망설임을 버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끼리만 알고 있는 은밀한 사정을 오늘 처음 보는 이방인들에게 말해도 좋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심을 굳혔는지 그는 이내 단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어주셨으면 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아일리아스 데바 사스라.’ 간단히 줄여서 알리사라고 불리는 소녀는 백작 가문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인 사스라 백작가는 한때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으나, 세대가 바뀔수록 차츰 위세를 잃어가면서 지금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엄연히 국가에서 하사받은 땅을 지니고 있는 귀족인지라 가세가 기울 정도로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10년 재앙을 거치면서 대다수 귀족가문들이 크게 휘청거리는 동안, 유일하게 무난히 버텨낸 덕분에 최근엔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지독한 가뭄 속에서도 기름진 작물을 키우는 가문. 더불어 소유한 농경지가 넓은 편이었기 때문에 근방의 주민들도 모두 혜택을 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알리사를 좋아했다. 식물을 잘 키우는 그녀의 능력을 칭송하고 축복의 산물이라 여겼다.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도 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은 다른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짐승들이 습격해 왔어. 멧돼지라든가 곰 같은 것들 말이야. 그 정도는 마을에 있는 경비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어서 괜찮았어. 게다가 잡은 것들의 고기와 가죽을 얻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하는 분위기였지. 하지만 오래지 않아 더욱 큰 위협이 닥쳐온 거야. ……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했거든.”

지난날을 회상하는 대장장이의 얼굴엔 짙은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몬스터는 워낙 강하고 빠른 데다가 소형이라도 떼로 몰려다니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문 토벌군의 입장에서도 매우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물며 경비대 수준의 병사들에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약탈이 목적인 경우엔 숨어 있기만 하면 괜찮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을 노리고 덤벼드는 몬스터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간신히 마을을 지켜내도 그때마다 입은 피해가 막심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민심 역시 점점 흉포해졌다. 가뭄 속의 풍요를 누리던 사람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자 불씨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축복의 산물이던 소녀 알리사의 능력을 거꾸로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런 능력만 없었어도 몬스터가 쳐들어올 일은 없었을 텐데!>

불만에 빠진 사람들은 과거에 누렸던 행복을 돌아보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불행만 생각했다. 그저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던 마음이 모여 만든 희생양인 셈이었다.

게다가 알리사는 너무 눈에 띄었다. 단순히 식물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의중을 꿰뚫고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대지의 기운을 지니고 태어난 소녀는 그저 타고난 힘에 눈을 떠 갈 뿐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녀가 신비한 능력을 보일 때마다 두려워하며 악귀가 달라붙었다고 떠들었다. 그런 분위기는 알리사가 멀든을 소환해 내자 최악으로 치달았다. 설마 그 정체가 정령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소녀가 괴물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믿은 것이다.

‘재앙을 부르는 소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알리사를 그렇게 칭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이사나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표정일 것이다. 설명을 잇는 대장장이의 얼굴도 심란해 보였다.

“게다가 그 시기도 별로 좋지 않았어. 아가씨가 멀든을 불러낸 날 하필 마을 근처에 대형 몬스터가 자리 잡았거든.”

“대형 몬스터요?”

“혹시 땅굴 각귀신이라고 아시나?”

“땅굴 각귀신?”

“지하 깊숙한 곳에서 사는 편형동물과의 거대 몬스터야. 평소엔 조용한데 보름밤마다 한 번씩 지상으로 올라와서 먹이를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보름 먹깨비라고도 불려.”

땅 밑에서 활동하는 몬스터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론 사막에 서식하는 지옥 땅거미라면, 땅굴 각귀신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위험성은 지옥 땅거미보다 더 높다고 대장장이 팔론은 덧붙였다. 가죽이 질겨 잘 베이지도 않을뿐더러,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땅굴 각귀신은 원래 사막 한가운데서 서식하는 종이야. 그런 무시무시한 녀석이 왜 인가까지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게 아가씨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몬스터가 멀든을 소환한 날 나타나서요?”

“맞아. 아가씨의 특별한 힘이 몬스터를 끌어들인다고 여기는 거지.”

맙소사.

저절로 흘러나오는 탄식을 삼키며 나는 머리를 짚었다. 따지고 들 부분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때 이사나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몬스터는 잡혔습니까?”

“아니, 아직. 잡으려고 시도는 해 봤는데 우리 힘으론 불가능했어. 둥지야 찾았지만 그 밑에 숨어 있으니 끌어올릴 방법이 없더군.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냈지. 보름마다 놈의 둥지에 먹이를 갖다 두는 쪽으로 말이야. 소나 돼지들 같은 거.”

“그게 효과가 있나요?”

“보시면 알잖아? 지금 이 마을이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는 게 효과가 있다는 증거지. 다행히 땅굴 각귀신은 필요한 먹이만 챙기면 얌전하더라고. 게다가 이곳이 놈의 영역이 된 탓인지 다른 몬스터의 습격도 거의 사라졌어. 덕분에 마을 분위기도 안정된 편이지.”

하긴 이곳을 처음 봤을 땐 매우 활기찬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이런 어두운 사연을 지니고 있을 만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 얼굴에도 수심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적어도 최근에 시작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장이는 벌써 2년이나 됐다고 말했다.

“잘 버티고 있네요.”

“그치? 사실 그 방법도 아가씨가 생각해 낸 거야. 아가씨가 고안해 낸 생각을 백작님에게 알렸고, 백작님이 영주님에게 제안해서 성사된 거거든.”

“헤에, 그래요? 2년 전이면 지금보다 더 어릴 때인데 굉장하네요. 똑똑한 아가씨군요.”

“아무렴, 운명의 별을 타고난 분인걸.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 마을은 보름마다 한 번씩 실종자가 생기는 곳이 됐겠지.”

언뜻 듣기엔 별거 아닌 듯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자 섬뜩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정도 공헌을 했는데도 평판엔 전혀 영향이 없었던 건가요?”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아가씨에게 고마워하지 않아. 그들에겐 이 모든 일이 생긴 게 전부 아가씨 때문이니까. 도움을 줘도 그저 원망스럽기만 한 것 같아. 심지어 이제 살 만해지니 가축들을 아까워하기 시작하더군. 애초에 아가씨가 몬스터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가축을 잃을 일도 없지 않냐는 거야.”

“으음, 그렇군요.”

“웃기는 놈들이지. 그 가축들을 키워낼 수 있던 게 누구 덕분인데? 아가씨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진작 다 굶어죽었을 놈들이!”

나는 대장장이의 분노에 충분히 공감했다. 동시에 그나마 한 사람이라도 소녀를 위해 화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봤던 소녀의 첫인상이 떠올랐다. 귀여운 얼굴만큼이나 다부지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싸늘해도 소녀에게선 조금도 위축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아마 그럴 수 있었던 건 눈앞에 있는 대장장이의 공헌이 컸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달리 해코지하는 사람은 없나요?”

“일단은 백작가의 핏줄이니까. 게다가 말했다시피 다들 아가씨를 무서워하거든. 그냥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함부로 건드리는 녀석은 없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갈수록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이상한 분위기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내가 손님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도 그게 원인이 된 거나 다름없고.”

“그게 무슨…….”

“생각해 보셔. 이곳 사람들에게 재앙이 일어나는 원인은 단 하나야. 그럼 다들 무슨 생각을 하겠어?”

그는 금기를 범하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아가씨가 죽으면 이 모든 불행이 끝날 거라고 생각해.”

“……!”

그 순간 이사나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나 역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이 기나긴 이야기들이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지.

“설마 산 제물이라는 게……!”

“일단 표면적으론 몬스터 토벌이야.”

대장장이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불끈 움켜쥔 두 주먹은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파란 핏줄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토벌이요?”

“영주님이 다시 한 번 땅굴 각귀신의 토벌대를 구성하셨어. 그러곤 아가씨더러 토벌대의 선봉에 서라고 했다더군. 괴물을 부리는 재주를 지녔으니 그 능력을 마을을 구하는 데 쓰라고. 고작 13살짜리 여자아이한테 말이야.”

“……!”

말이 좋아 토벌이지, 가서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대장장이의 표현이 정확했다. 이건 그저 산 제물일 뿐이다. 목적이 이렇게 훤히 들여다보여서야 음모라고 칭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이었다.

“가족들은 뭘 하고…….”

“아가씨를 서녀라고 무시하는 그 잘난 귀족 나으리들 말이야? 백작님이 그러셨다는군. 몬스터를 없애서 가문에 쓰인 불명예를 벗기라고.”

“…….”

“아가씨는 그러겠다고 했어. 어차피 거절했어도 강제로 끌고 갈 분위기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몸을 지킬 힘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덕분에 지금도 평소처럼 지내고 계시는 거야. 싫다고 했으면 저들이 어떻게 나왔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신음을 흘리며 의자 안쪽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심장에 나쁜 얘기들을 연달아 들었더니 십 년은 한꺼번에 늙은 기분이었다.

“토벌일이 언젭니까?”

질문을 건네는 이사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많이 낮아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음색이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는 대장장이는 화색을 띠고 반응했다.

“아가씨를 도와주시는 거야?”

“토벌일이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응? 아, 그, 그게 말이지.”

딱딱한 대응을 받고나서야 대장장이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사나가 굉장히 화가 났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다음 보름날 밤이야. 땅굴 각귀신은 보름에만 모습을 드러내니까, 잡을 기회는 그때밖에 없거든.”

“그게 언젠데요?”

이번에 질문한 건 나였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대답할 것 같았던 그는 잠시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내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