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60화 (160/608)

제160화

“감히 내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예?”

그의 혼잣말을 들은 천사가 반응했지만 엘뤼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이 생각으로 꽉 차 있어, 주위의 반응을 인지하지 않는 상태였다.

운명을 잘못 배정받은 영혼은 대체적으로 평탄하지 않은 삶을 보낸다. 그렇기에 굳이 일부러 엘의 전생을 알아보려 하진 않았다. 흉터는 지금도 그의 곳곳에 남아 있었고,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했으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것이 누군가의 의도적인 술수로 벌어진 일이라니.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다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금기를 저질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사실 하나만으로 마계는 징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마족이 명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도 문제였다. 사자(死者)의 영역인 명계는 대차원 중에서 가장 은밀하며, 방문이 까다로운 곳이었다. 육체를 지닌 존재는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계에 속한 신족들조차 허가를 받지 않으면 명계인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들의 몸은 영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마족의 눈에도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규칙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사를 하고 알아봐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온통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

그때 무심코 고개를 든 엘뤼엔의 시야에 한구석에 멍하니 서 있는 천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머리칼을 지닌 귀여운 얼굴의 소녀. 나드엘이었다.

“나드엘.”

“…….”

“나드엘?”

“네, 네?”

뒤늦게야 그의 부름을 들은 듯 화들짝 놀라서 대답하는 모습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정렬해 있던 다른 천사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업무 시간, 그것도 집무실 안에서 수행천사가 모시는 신의 부름에 즉각 반응하지 못한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아무리 총애받는 나드엘이라도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예? 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 아뇨. 아무 문제도 없는데요…….”

그러나 대답과는 다르게 나드엘의 두 눈은 여전히 흐리기만 했다. 본인조차 자신의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리어 주위에 있던 천사들의 몸짓만 더욱 다급해져갔다. 그 모습을 잠시간 주시하던 엘뤼엔이 곧 무언가를 떠올린 얼굴로 허공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손이 스쳐 지나가는 자리에 거대한 화면이 생겨났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엘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 위에 있더니, 어느새 장소를 옮겼는지 지금은 사막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었다.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광경에 엘뤼엔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다행히 위급한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족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감정에 강하게 교감한다. 궁처의 천사들이 서로 비슷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도 그러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드엘의 경우엔 탄생 과정에서 엘의 영향을 받은 탓에 그의 감정에도 함께 교감했다. 즉, 나드엘이 이유 없는 행동을 한다는 건 엘의 심리가 그만큼 불안해졌다는 뜻이다.

영상 가득 비치는 그의 아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제야 그 옆에 있는 낯선 존재에 시선이 미쳤다. 푸른색 피부에 은발, 불쑥 솟아오른 귀가 몹시 튀는 사내였다.

“저건…….”

사내를 발견한 엘뤼엔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정교한 변신이라도 신(神)인 그의 눈까지 속이진 못한다. 겉모습은 블루 엘프였지만, 사내의 정체는 틀림없는 성마였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편인.

‘아직 지상에 남은 성마가 있었나.’

한때 유니콘이라 불린 그들 일족은 지금은 신계에 편입한 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후에 중간계에 다시 내려간 성마는 없으니 아마도 편입할 당시에 남은 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영상에 비치는 사내는 지나치게 젊었다.

“사나엘.”

그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 하나가 조용히 나타났다. 업무에 바쁜 엘뤼엔을 대신해서 엘 일행을 간간히 살피라 일러둔 천사였다.

“저건 뭐지?”

“얼마 전부터 엘퀴네스 님의 일행에 합류한 자입니다. 시간의 봉인진 안에 갇혀 있다가 엘퀴네스 님 덕분에 최근에 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보고를 준비해 두고 있었는지 사나엘이 막힘없이 질문에 답했다. 시간의 봉인진에 갇혀 있던 성마라, 그렇다면 젊은 이유도 이해가 됐다. 엘뤼엔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성향은 어떻지? 엘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할 만한 여지는 없나?”

“성정이 나쁜 편은 아닙니다. 다만 기억에 조금 문제가 있는 자 같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

“물의 정령왕이 인간과 계약한 건 이번이 최초입니다만. 그런데 저자는 4천 년 전에 이미 엘퀴네스와 계약한 인간이 있었고, 그와 친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자가 지금의 엘퀴네스 님과 똑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얼굴?”

“네, 그래서 엘퀴네스 님을 그자의 환생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령왕이 전생을 지니지 않는다는 건 수명이 긴 종족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물며 신족에 가까운 성마 일족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엘이 조금 특별한 경우긴 했지만, 사실 그것도 기록되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에 그냥 꿈을 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4천 년 전이라면 엘뤼엔 그 자신이 엘퀴네스였을 시절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계약을 하기는커녕 소환된 일조차 없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런 사실까지 잊었을 리는 없다. 하물며 엘과 닮았다면 더더욱.

“봉인된 충격이 컸던 모양이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심리가 흐트러진 게 그 때문이었나.

대강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갔다. 아마 엘 역시 그의 주장을 듣는 순간 거짓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굳이 역사서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 정도 사실쯤은 몸에 새겨진 감각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직 정령왕의 본능을 완전히 일깨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것도,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는 것에도 조금 약한 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역사를 말하면 혼란스럽기는 할 것이다. 물론 기록된 사실이 분명하니만큼 그리 오래 휘둘리지는 않을 터였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가.’

엘뤼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금 성마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당시의 자신과도 안면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니.”

사나엘의 질문에 엘뤼엔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엘을 주시하는 시선에서 불순한 의도는 읽히지 않았다.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기록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성마라니 흥미가 일기는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다른 감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물며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아무 느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주어진 진실은 명백했다.

“난 모르는 자다.”

* * *

삶은 노른자처럼 퍽퍽한 모래바닥은 제국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건조해졌다. 곳곳에 오아시스와 샘이 있긴 했지만 워낙 작은 규모라 수풀은커녕 작은 나무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국 전반을 가로지르는 큰 강줄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근방으론 거대한 숲과 평야도 곧잘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과 가까운 거리일수록 마을의 규모도 달라졌다. 성벽은 더 크고 견고해졌고 내부도 훨씬 넓어졌으며 주민들은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나게 된 소레타라는 곳은 지금까지 거친 마을들 중에서 가장 경관이 화려했다.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거리, 잘 정비된 길 위엔 거대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륙을 건너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제대로 된 마을이었다.

“꽤 큰 마을이네요.”

“그러게. 여기라면 좀 더 다양한 향신료를 구할 수 있겠는걸?”

“그럼 모처럼 온 김에 잠깐 상가를 돌아볼까? 어차피 부족한 비품들도 새로 구입해야 하니까.”

내 제안에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날 며칠 황량한 사막의 풍경만 보다가 오랜만에 번화가에 와서 그런지 둘 다 들뜬 기색이었다.

우리는 그 길로 곧장 상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마을은 주택을 비롯한 상가가 밀집된 지역과, 수풀과 경작지가 펼쳐진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각 경작지 쪽으로는 드문드문 거대한 저택이 세워져 있었는데, 아마 그곳에 소유주가 사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정경이었지만 문득 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난쟁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이었다.

“어?”

“응? 왜 그래, 엘?”

“어, 아니, 그냥…….”

난쟁이들은 싹이 자라고 있는 밭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꾼들이 본다면 기함을 할 광경이었지만 근처에 있는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마 그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땅의 정령인 ‘놈’이었으니까.

오히려 일꾼들 입장에선 놈이 뛰어다닐수록 좋은 일이었다. 땅의 정령이 발을 구르는 곳은 토지가 더 비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놈이 짓밟을 때마다 싹 잎이 더 생생하게 살아 올랐다.

경작지에 땅의 정령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내가 주목한 건 놈의 분포도였다. 보통 같은 조건의 토지라면 땅의 정령들 역시 비슷한 숫자로 골고루 분배되어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곳에선 이상하리만치 대부분의 놈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다.

‘유독 저곳에만 땅의 정령들이 많네?’

그것도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하게 많았다. 이곳보다 기후가 훨씬 좋은 스왈트 제국과 비교해도 월등할 정도였다. 그래선지 다른 곳에 비해 그 밭의 경작물만 풍성히 자라 있었다. 아마 수확물의 품질도 훨씬 뛰어날 것이다.

“특이하네. 땅의 정령들이 왜 저 밭만 편애하지?”

그때 내 옆에서 시벨리우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정령의 인장도 알아보더니 자연체 상태인 정령들도 보이는 건가 싶어서였다.

“알아보겠어?”

“정확히 정령의 모습이 보이는 건 아냐. 그냥 다른 곳보다 유달리 대지의 힘이 강하다는 것만 느낄 뿐. 게다가 저 밭만 유독 작물이 잘 잘라고 있기도 하고.”

“그렇구나. 응, 맞아. 아마 저 밭의 관계자 중에 땅의 정령사가 있는 것 같아.”

“헤에, 땅의 정령사? 이곳 타라 대륙에서?”

시벨리우스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사실 나도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으니까. 보통 정령사의 속성은 자신이 사는 곳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불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자란 정령사는 불의 속성을 갖기 쉽다.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물의 정령사가 태어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사막에선 땅의 정령사가 태어나기 힘들었다. 토지가 비옥하지 않다는 건, 땅의 정령의 숫자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었으니까.

“하긴 벌써 4천 년이나 흘렀으니까. 이제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려는 건가 보네.”

“원래대로?”

“여긴 내가 살던 시절엔 사막지대가 아니었거든.”

“그렇…… 어? 사막이 아니었다고?”

“응, 오히려 대륙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어. 유달리 바람의 기운이 강한 편이라 바람의 대륙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치만 사막이라서 알아본 거 아니었어?”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분명 처음에 그가 이 대륙을 언급했을 땐 사막이라서 알아봤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으니까. 시벨리우스 역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했던 건 아니고, 그냥 소문을 들었어.”

“소문?”

“타라 대륙이 트로웰의 저주를 받아서 사막으로 변했다는 소문.”

“……!”

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사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시벨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눈앞에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걸 보니까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싶더라고. 그 당시에도 사막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는 규모는 아니었거든.”

“진짜 원래는 멀쩡한 땅이었다고? 그런데 트로웰이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야?”

“응, 생각해 보면 이곳만 유달리 사막인 게 이상하지 않아? 자연을 관장하는 정령왕들이 있는데도 이렇게 버려진 땅이 있다는 게 말이야.”

“어, 그, 그렇긴 한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아크아돈은 사막이 없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어려운 환경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래도 흙으로 바꿀 수 있는 정령왕이 있으니까.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엔 대대적인 재생의 시기까지 거친 참이었다. 4개 속성 모든 정령들이 합심해서 아크아돈의 재건에 힘쓰던 시기. 오랜 가뭄 때문에 상당히 많은 땅들이 사막화되어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황폐한 토지들 대부분이 비옥토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이 사막이라는 건 일부러 그렇게 남겨뒀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내가 특정 지역에 물을 제한한 적은 없었다. 다른 대륙에서와 똑같이 물을 뿌리고, 강을 텄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의 토지는 대부분 습기가 없이 마르고 퍼석하기만 하다. 땅 쪽에서 물을 머금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저 사막이라서 그런 것이려니 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땅이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 사막이 된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막치고 온화한 기후도 전부 설명된다. 머리로는 모든 정황이 금방 파악됐다. 비록 심정적으론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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