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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57화 (157/608)

제157화

목을 조이는 어마어마한 악력과는 다르게 질문하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했다. 데르온은 온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놓고 말…….”

“닥쳐. 내 말에 대답이나 해. 미안하지만 난 지금 매우 화가 나 있거든. 보이는 건 죄다 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이니 방식이 다소 과격해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그게 무슨……?”

낮게 속삭이는 말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데르온은 얼굴을 굳혔다. 그가 아는 자크는 마계에서 루카르엠 다음으로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어지간한 한 화를 내는 일도,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이토록 분노할 만한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숲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 말에 자크의 눈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모릅니다. 추궁을 하시기 전에 왜 이러는 건지 이유나 말해 주시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책임을 못 질 건 또 뭡니까?”

“……하긴, 자네는 묵묵히 명령을 따르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 얌전한 사자보다는 지렁이라도 꿈틀거리는 쪽을 즐기는 더러운 취향이니까.”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대체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막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데르온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자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목을 옥죄고 있던 힘이 일시에 사라졌다. 자크가 드디어 그를 놓아준 것이다. 곧 막혀있던 숨이 트이고,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쿨럭, 쿨럭!”

“미안하군. 자네에게 딱히 유감은 없다.”

마른기침을 토하는 데르온을 향해 자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 단정한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이 오늘만큼 간절한 적은 없었다. 데르온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엉망이 된 옷깃을 정리했다.

“후우, 부디 다음번엔 언행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군요. 정말 유감이 없다면 말입니다.”

“노력은 해 보지.”

“……그래서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또 누가 숲에 침입해 알을 훔치기라도 한 겁니까?”

부화 직전의 알은 몹시 단단하여 깨트리거나 섭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침입자들이 숲을 노리는 건 대개 알이 완전히 부화하고 난 후였다. 알째로 가져가면 부화시기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데다 그 사이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무모한 마족들 중에서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을 훔쳐가는 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물론 그런 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숲에 침입한 순간 자크에게 붙잡혀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편이었다. 설령 알을 훔쳐 무사히 달아난다 해도 별로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했다. 자크의 눈을 피하려면 마계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데 마땅히 갈 만한 장소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차원 바이톤이 바로 그곳이었다.

바이톤은 수많은 중간계 차원들 중에서 마계와 연결된 유일한 세계였다. 어느 마족이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마족들에겐 일종의 휴양지와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 외의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건 공작 급이나 가능한 일이기에 대부분의 마족들은 사고를 치면 바이톤으로 도주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곳이 은신하기엔 그다지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곳은 형벌의 신 엘뤼엔의 주 관할 영역이니까.

냉혹하며 강력한 상급신. 풍문에 의하면 마신과 힘을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신이라고 했다. 특히 마족에 관한 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유명한 존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처리도 매우 빨라 방심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자의 주 관할 영역에 숨어들다니, 여우가 무서워 호랑이굴에 뛰어드는 꼴이다. 실제로 자크는 알을 훔친 마족이 바이톤으로 건너가면 그 즉시 모든 추격을 멈췄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처참하게 응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하나 있었지. 훔친 알을 바이톤에 가져가 부화시킨 멍청한 녀석이. 꼭 그렇게 생각이 모자란 놈들이 있다니까.’

데르온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회상하며 작게 혀를 찼다. 알에서 부화한 아이를 조금 더 키워서 잡아먹을 요량으로 일부러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풀어놨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오히려 죽어버리자 그에 대한 분풀이로 인근 지역을 전부 폐허로 만들었다고 했다. 마족이 배회하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형벌의 신에게 아주 정성껏 결투장을 보낸 셈이다. 역시나 그 한심한 마족은 천군에게 붙잡혀 친히 신계로 끌려갔다고 들었다. 태형 천대와 꼬챙이에 꿰이는 형벌이 내려졌다고 하니 결코 살아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데르온은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사건이 벌어진 거라 생각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자크의 입장에선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화가 난 것을 보면 이번엔 도난당한 알의 숫자가 좀 많은 걸지도 몰랐다. 그러자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크가 코웃음을 쳤다.

“훔쳐? 흥, 그 정도 장난이라면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겠군.”

“예? 그럼…….”

“알이 전부 파괴됐다.”

“……!”

한순간 데르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하던 생각을 모두 멈추고 망연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됐다고?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가 어떻게 돼요?”

“알이 파괴됐다고 했다. 그것도 전부. 이번 번식기엔 유독 강한 알들이 많이 들어와서 다들 기대가 컸었지. 하지만 지금은 단 하나도 멀쩡한 게 없어.”

“맙소사……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데르온은 한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마족의 알을 관리하는 건 자크의 역할이지만, 종족의 존속을 지키는 일은 4대 공작 모두의 공통적인 책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족이란 종족은 타고난 성질이 워낙 거친 탓에 고위급의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어느 종족보다 세대 교체가 빠르게 이뤄지는 편이지만 그에 비해 번식은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이런 실정에서 알을 모두 잃었다는 건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다.

“카르텐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금역 아닙니까? 자크가 하루 종일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말에 자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데르온은 애써 충격을 다스리며 간신히 물었다.

“마왕은, 전하께선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 알고 있지 않겠나? 아마 나보다 먼저 알았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의아해하던 데르온은 곧 얼굴을 굳히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에 감춰진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마왕 전하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스스로 내뱉고도 심장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자크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마계에서 루카르엠 님의 자리가 공석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왕이 굳이 그 분을 중간계로 내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의 눈이 없는 사이에 처리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 하지만…… 그건 너무 심한 억측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지만 난 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말이야.”

“그럴 리 없습니다. 마왕은 단지 루카가…….”

“내 앞에서 그 분의 존함을 함부로 줄여 부르지 마라.”

젠장,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서릿발 같은 경고에 데르온은 입술을 악물었다. 자크가 루카르엠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건 마계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이런 말을 실제로 쏘아붙일 용기는 없었기에 데르온은 그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광기에 찬 자크를 상대하는 건 루카르엠과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피곤하다는 진리를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기 때문이다.

“……네, 아무튼 마왕이 루카르엠을 중간계로 보낸 건 단지 그가 제일 강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다름 아닌 물의 정령왕인걸요.”

“글쎄, 상황을 낙관하고 싶은 기분은 모르는 건 아니다만. 그러기엔 정황이 너무 확실하지 않나? 자네도 알다시피 부화 직전의 알은 매우 단단하지. 그것들을 전부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가 마계에 몇이나 될 것 같은가? 만약 루카르엠 님이 마계에 있었다면, 그래도 알이 파괴됐을까?”

“……그건…….”

“아, 그러고 보니 이번 번식기에 들어온 알을 보며 루카르엠 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었지. 이들 중에서 차기 마왕을 넘볼 만한 아이가 나올 것 같다고 말이야.”

“……!”

그 말에 데르온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카르엠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현 마왕인 카류드리안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루카르엠에게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라 마왕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귀에 이번 루카르엠의 발언이 들어갔다면? 결국 데르온은 자크의 추측을 인정하기로 했다. 카류드리안, 그가 차기 마왕의 탄생을 저지하기 위해 알을 전부 파괴한 것이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카르텐은 마신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마왕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유일한 땅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금역을 침범한 마왕은 예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왕좌는 4대 공작들을 비롯하여 주위를 끊임없이 견제해야 하는 위치다. 하물며 미래에 있을지 모를 새로운 도전자를 사전에 제거해두려는 욕심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사를 진행한 마왕들은 전부 현장에서 루카르엠에게 발각돼 실패했다. 설령 운이 나빠 소실된 알이 있더라도 그건 수많은 알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모든 알이 파괴된 것도, 현장에서 범인이 발각되지 않은 것도 마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데르온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여 마왕 앞에 설 생각이라면 그만두십시오. 증거도 없이 나섰다간 역으로 당신이 위험해질 겁니다.”

금역에 침범한 마왕은 ‘마신의 순리를 거역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마계의 규율에 의거, 4대 공작의 심판 아래 죽임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아무리 사태가 위중하다 해도 마왕은 단지 심증만으로 추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을 담은 충고에 자크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나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아. 루카르엠 님이 묵인하신 일을 굳이 들춰내 봤자 나만 개죽음당하겠지. 단지 자네도 마왕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닌 것 같으니 이제 됐어. 자넨 내가 키워낸 아이 중에서 가장 아끼는 아이였거든.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야.”

“……과분한 칭찬 감사하군요. 그런데 방금 전에 하신 말은 무슨 뜻입니까? 루카…… 아니, 루카르엠이 묵인 했다니요?”

어리둥절해져서 묻는 말에 자크는 돌아서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데르온. 모든 비극적인 사건은 결코 우연히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잘 생각해 보게. 루카르엠 님이 고작 그런 명령 따위에 순순히 마계를 떠나신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자, 잠깐만요, 자크! 그럼 루카르엠은 이미 이 상황을 전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이 마계 안에서 그분이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것 같은가?”

“…….”

데르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하기엔 그의 본능이 먼저 인정하고 있었다. 루카르엠은 단 한 번도 정해진 자리를 이탈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모든 일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파악하고 움직였다. 세르피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아마 그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마왕이었더라도 루카르엠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었으리라. 살다 보니 그녀의 말에 공감을 할 때가 올 줄이야. 데르온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가 왜 이런 일을 묵인한 겁니까? 이번 알에 차기 마왕이 있을지도 모른다면 더더욱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 그것까진 나도 알 수 없지. 다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자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곳에 펼쳐져 있는 건 여느 때와 똑같은 정경들뿐이었다.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데르온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자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 단단히 먹게, 데르온. 아무래도 이 마계에 곧 큰일이 벌어질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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