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또 만나네, 데르온.”
마왕성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음성에 데르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그 머리칼만큼이나 검은 드레스가 그녀의 풍만한 몸매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세르피스. 자주 보는 군.”
데르온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원래도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지난 번 임무 실패 이후로는 대화를 섞는 일조차 없었던 참이었기에 인사를 주고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마왕 전하를 뵈러 왔나 봐?”
“병력 사용을 허가 받으러 왔다. 최근 경계 쪽의 치안이 엉망이라서.”
“호호, 여전히 바쁘네. 동쪽 영토의 주민들은 좋겠어. 주인이 이렇게 부지런해서.”
“너는 뭘 하고 있지?”
“응? 나?”
“서쪽 영토에서도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던데. 그런 것치곤 매우 한가해 보이는군. 자신의 영토보다 마왕성에 더 오래 머물고 있는 것 아닌가?”
“어머나, 동쪽 영토의 주인님은 참 자상하기도 하지. 다른 구역의 사정에까지 관심을 다 가져주시고 말이야.”
능청스러운 대답에 데르온은 더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문득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그녀의 손에 들린 은쟁반이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다 마시고 비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이 있었다. 코끝까지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아니었더라도, 그 안에 담겼을 내용물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데르온의 눈빛이 더 낮게 가라앉았다.
“마왕 전하의 것인가?”
“맞아.”
“마왕성에 있는 수많은 시종들은 전부 뭘 하고 공작인 네가 직접 전하를 수발하는 거지?”
“후후, 전하가 요즘 많이 예민하셔서 말이야. 내가 직접 하는 편이 더 안심이 되시나봐. 그만큼 날 신뢰하고 계신다는 뜻 아니겠어?”
자부심을 가득 담은 말에 데르온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마왕에게 신뢰라니, 거리를 방황하는 들개가 들어도 비웃을 이야기였다. 그는 경멸이 섞인 눈으로 세르피스를 훑어 내리며 말했다.
“요즘 전하와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군.”
“그렇게 보여?”
“그래,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마왕이 되지 못할 것 같으니 그의 비(妃)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시간을 오래 끌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작위를 반납해 줬으면 좋겠군. 그래야 서쪽 영토의 주민들도 새 주인을 맞이할 것 아닌가.”
“……정말 너무하네. 나 말고 어느 누가 서쪽 영토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이야?”
“글쎄, 누가 되든 지금의 너보단 잘 이끌어 나갈 것 같은데.”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세르피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지워졌다. 그녀는 분한 얼굴로 데르온을 잠시 노려보고는 이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참, 마왕 전하를 뵈러 왔다고 했지? 안됐네. 오늘은 알현하기 힘들 거야.”
“왜지?”
“조금 전에 막 잠드셨거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
“……요즘 부쩍 수면 시간이 늘지 않았나?”
마족은 원래 깊은 잠을 자지 않는다. 잠든다 해도 그 시간은 길어 봤자 한두 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 습격을 당할지 모르기에 고대로부터 몸에 각인된 습관이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마족일수록 사방에 적이 많기 때문에 일평생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물며 마왕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왕 카류안은 수시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번 잠들면 한동안 깨어나지도 않았다.
“긴장이 풀린 게 아닐까? 루카르엠이 마계에 없으니까.”
“루카는 왕좌에 관심이 없어.”
“하지만 신경 쓰이긴 하잖아. 지금의 마왕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걸. 오죽하면 감시 명목 하에 본토에서 살게 해 놨을까. 덕분에 그가 관리하는 남쪽 영토는 주인이 없는 땅이 된 지 오래지. 그럼에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분쟁이 일어난 적이 없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이 무서워서 주민들이 모두 얌전히 살아간다고. 하루라도 조용히 지내면 좀이 쑤시는 게 특성인 마족이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난 마왕 전하를 이해해. 나라도 그의 존재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전하는 왕이 된 이후론 선잠에 든 적도 없다고 들었어. 이참에 푹 쉬고 싶겠지. 오랜만의 자유를 어떻게 보내든 그건 자기 맘 아냐?”
“……네 입에서 마왕을 두둔하는 말이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군. 정말 그에게 빠지기라도 한 건가?”
세르피스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데르온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아는 세르피스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였다. 그녀에게 타인은 그저 이용할 수 있는 수단과 무기에 불과했다. 허술한 듯 웃는 얼굴도, 유혹하는 듯한 몸짓도 전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연기일 뿐.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를 홀릴지언정 대상에게 빠지진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공작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녀가 마왕을 알고 지낸 세월만 햇수로 벌써 4백 년이 넘었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둘 사이에서 애틋한 분위기를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기심으로 인한 반감이 더 큰 편이었다. 굳이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왕에게 반하다니.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세르피스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더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익숙지 않은 광경이건만 이어진 말은 데르온을 더 큰 충격에 빠트렸다.
“좋은 향기가 나.”
“하?”
“진짜 향기를 말하는 게 아냐. 특유의 체취라고 해야 할지, 마력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순 없는데, 왠지 갈수록 점점 더 근사해지는 것 같아. 그의 곁에 있으면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져. 굉장히 황홀하고, 동시에 무서우리만치 오싹한 기분이야.”
“……완전히 맛이 갔군.”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네게 이해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무튼 난 전하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 곁을 지킬 거야. 누구든 왕좌를 노리려면 나부터 먼저 상대해야 할걸?”
뚜렷한 호선을 그린 입술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소리였다. 데르온은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전하가 드시는 그 피 말인데. 그건 어디서 나는 거지?”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넌 뭔가 알고 있나 보군.”
“알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내가 전달자인걸.”
“네가?”
“직접 구하는 건 아냐. 그냥 전하의 계약자에게서 받아와서 전해드리는 것뿐이니까.”
“계약자라면 그 대공이라는 인간 말인가? 계속 그자한테서 받아왔다고?”
“그래.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데르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령왕 엘퀴네스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의 계약자가 아이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던가. 아마도 그 피는 그 아이들의 피일 것이다.
‘내 생각대로다. 역시 제대로 된 제사가 아니었어.’
정말 마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중간에서 피를 빼돌렸을 리가 없다. 아마도 그 제사는 마왕과 계약한 대가일 것이다. 전달된 피는 마왕이 직접 마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수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아 어쩌면 그 피 자체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 파악했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데르온이 기억하기로 마왕이 피를 마시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렇다는 건 대공이 인간을 죽여 온 것도 그 정도 기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같은 인간을 희생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장기적으로 일을 꾸리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마족과의 계약은 반드시 소원을 동반하고, 치르는 대가가 클수록 계약의 보상도 커진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또한 마왕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데르온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럼 난 돌아가도록 하지.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그때 다시 오겠다.”
“좋을 대로. 나도 이만 전하께 가봐야겠어. 잘 가.”
세르피스는 가벼운 대꾸를 마치곤 날듯이 몸을 돌렸다. 데르온은 총총 걸음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왕이 잠들었다. 항시 왕좌를 탐하는 공작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루카르엠은 공석이었고, 또 다른 공작인 자크는 매우 바쁜 시기라 얼굴을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르온 역시 최근 영토에서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한 분쟁들 때문에 정신을 다른 데 둘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탐욕스러웠던 세르피스는 오히려 왕의 파수견을 자청하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상황이기에 마왕이 안심하고 잠이 든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의도에 맞춰 전부 안배된 것은 아닐까?
데르온은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카르엠을 중간계로 보낸 건 확실히 짚어볼 만한 문제였지만, 다른 부분은 강제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특히 세르피스가 왕에게 반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왕이 대단한 존재라 해도 그렇게까지 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뿌리를 내린 불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심을 틔웠다.
‘마왕,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한동안 굳게 닫힌 정문을 노려본 데르온은 이내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그때 문득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복도 건너편에서 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발끝까지 늘어진 로브위에 붉은색 망토를 걸친 장신의 남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흑발로 보이는 머리칼은 사실 자세히 보면 마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짙은 남청색을 띄고 있었다. 데르온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좀처럼 마왕성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자를 만나게 되어 놀란 탓이었다.
“……자크?”
“오랜만이군, 데르온.”
미형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낮은 음성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식 이름 ‘데자크 룬’. 4대 공작의 한 사람이자 마계 북쪽 영토의 지배자였다.
헛숨을 삼킨 데르온은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크였다.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머리색이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증거였다. 남청색 머리칼은 오직 북의 주인만이 지닐 수 있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역대로 북쪽 영토를 지배했던 마족은 전부 남청색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영향이다. 즉, 누구든 북의 주인이 되면 머리칼이 남청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자크 역시 한때는 다른 마족들과 똑같은 흑발이었지만 북쪽 영토를 소유하면서부터 색이 변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이유는 북쪽 영토만이 가진 특별한 역할과 관련이 있었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북쪽 영토는 마족의 생명이 시작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곳에 마족의 알이 부화하는 장소인 탄생의 숲 ‘카르텐’이 있기 때문이다.
마족 여성은 백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번식기에만 알을 낳는데, 이렇게 태어난 알은 그저 마력 덩어리일 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화하지 않는다. 제대로 부화하기 위해선 카르텐 깊숙한 곳에 있는 마력의 샘에서 마신의 정수를 받아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누구나 그 샘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마족이 사용하면 그저 평범한 물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마신의 정수는 오직 북의 주인이 지닌 마력에만 반응하여 만들어지게 되어 있었다. 마신이 정해 둔 마계의 규정 중 하나였다. 남청색 머리칼은 그 자격을 드러내는 일종의 표식인 셈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특징 때문에 마계에선 번식기가 되면 마족의 알을 전부 북쪽으로 보내 일괄적으로 관리해 왔다. 어차피 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북의 주인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정수를 받은 알은 이후 숲에서 마력을 공급받으며 성장하고, 부화한 후에도 성체가 될 때까진 북의 보호를 받는다. 데르온 역시 성체가 되기 전까지 자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같은 공작이면서도 그를 대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지금은 알이 부화할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이런 때에 자크가 자리를 비우다니……?’
백년에 한 번이라는 기나긴 간격의 번식기. 게다가 모정(母情)이 없는 마족의 특성상 알은 수거율 자체가 별로 높지 않았다. 운 좋게 카르텐에 들어간다 해도 전부 성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한 알은 조금만 관리가 부족해도 부화를 하지 못하거나 태어나더라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호시탐탐 아이를 노리는 침입자들이었다. 갓 태어난 어린 마족은 약하면서도 마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성인 마족들에겐 최고의 먹잇감이다. 그래서 자크는 알이 부화하는 시기엔 늘 극도로 예민해졌다.
“자크, 당신이 이 시기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숲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왕 전하를 뵈었나?”
얼떨떨해하며 묻는 말에 자크는 도로 질문으로 답했다. 데르온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예? 아, 아뇨. 잠이 드셨다고 해서 뵙지 못하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때였다. 갑자기 목에 가해지는 악력에 데르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크가 그의 멱살을 움켜쥔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데르온은 미처 저항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벽면에 떠밀렸다.
쿠웅!
“윽! 큭! 자, 자크?”
“한 가지 묻지. 최근 카르텐에 들어간 일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