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미안해. 모처럼 생각해 줬는데.”
“아, 아냐.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엘 넌 괜찮아? 먹는 게 삶의 낙이라고 했던 녀석이 맛을 느낄 수 없게 되다니……. 힘들거나 괴롭진 않아? 난 상상도 하지 못하겠어.”
“글쎄, 딱히 배고프지도 않고, 안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별로 불편하진 않은데.”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조금 이상하네. 엘퀴네스 녀석은 곧잘 식사 시간에 참여했는데 말이야. 그럼 그 녀석은 일부러 참고 먹었던 건가?”
“응?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왠지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나는 급히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설명은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네 전대의 엘퀴네스 말이야. 그 녀석은 엘이 음식을 권하면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거든. 그래서 난 정령도 다 똑같이 식욕을 느끼는 줄 알았어.”
“……엘뤼엔이?”
“응? 그게 누군데?”
“아, 아냐. 아무것도.”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마음속으로 혼란을 다스렸다. 음식을 권하는 대로 받아먹어? 엘뤼엔이 그런 성격이었나?
그의 정령왕 시절에 대해선 들은 게 거의 없다. 하지만 불쾌한 감각을 견디면서까지 일부러 인간들의 음식을 먹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만은 잘 알았다. 오히려 정령왕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퉁명스러웠다고 했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벨리우스가 말하는 전대 엘퀴네스가 정말 엘뤼엔이 맞기는 한 걸까? 왜 정보를 얻을수록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엔 같은 그림을 보며 다른 평가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지 조차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벨 님은 4천 년 동안 갇혀계셨다고 하셨죠? 그럼 지금 몇 살이신 거예요?”
때마침 건네진 이사나의 질문에 화제는 자연스럽게 전환됐다. 시벨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 당시에 천 년을 조금 넘게 살았으니까 지금은 5천 살이라고 해야겠지?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나이도 아냐. 우리 종족은 별다른 일 없으면 만 년까지는 살거든.”
“그렇군요. 그래도 거의 반평생을 잠들어 계셨던 거네요. 너무 아까워요.”
“음, 그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네?”
이사나가 어리둥절해져서 묻자 그는 자신의 몸을 가볍게 주물러 보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오래 사는 종족이긴 해도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면 피부가 노화하거나 신체 기능이 달라졌어야 하거든. 그런데 예전이랑 똑같아. 아무래도 봉인된 동안 내 몸의 시간이 멈췄던 모양이야. 하긴, 그러니 그 사이의 일이 전혀 기억에 없는 거겠지.”
“헤에, 그럼 신체 나이는 여전히 천 살이라는 건가요?”
“정확히는 1,200살 쯤 됐어.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면 정말 억울했을 거야. 솔직히 아직도 시대가 변했다는 실감은 나지 않지만. 언어나 복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
‘아, 그러고 보니…….’
그 말에 나는 새삼스럽게 시벨리우스의 옷차림을 살폈다. 깊이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과 차이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흡사한 복식이었다. 한 번 멸망했다가 다시 시작했다더니,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시벨리우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물었다.
“왜?”
“아니, 그냥 새삼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엘 너는 신기하지 않아? 4천년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거잖아. 우리 진짜 대단한 인연인 것 같아.”
“…….”
“그러고 보니 엘, 너는 어떻게 된 걸까? 너도 나처럼 시간이 멈춘 건 아닌 것 같고…… 종족이 달라졌으니 아마도 환생을 한 거겠지?”
지구에서 비과학적인 분야로 취급하던 것들이 오히려 주를 이루는 이 세상에선 사후의 세계도 단순히 막연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환생은 가장 떠올리기 쉬운 판단일 것이다. 아마 나 역시 다른 상황에서 그를 만났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령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넌 지금 상대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정령왕은 인간과 영혼의 성질부터 달라. 정령왕이 인간으로 환생할 순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해.”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잖아. 또 어떻게 알아? 인간으로 먼저 태어나 본 정령왕도 있을지.”
그래,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내가 바로 그 ‘인간으로 먼저 태어나 본’ 정령왕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번으로도 특이하다는 경험을 두 번이나 했을 리는 없었다. 심지어 4천 년 전이라니. 그렇게 머나먼 시절의 이야기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강경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절대. 무조건. 전혀.”
“……너무 단정하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 하지만, 엘. 전에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이사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남자로 산 기억이 있다고 한 고백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황급히 대답했다.
“그건 일종의 사고였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어. 저 녀석이 말하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는 얘기야.”
“그, 그래?”
“응, 그러니까 이사나 너도 저 녀석이 하는 말 너무 귀담아 듣지 마.”
“윽! 잠깐, 엘. 그렇게 무조건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어쩌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말했다시피 그럴 일은 있을 수 없어.”
암, 그렇고말고. 기억이 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비극이다. 수십 해도 아니고 몇천 년 전의 일이다. 만약 내가 그때 처음 태어난 거라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을 거듭해 왔다는 말인가. 그 까마득한 시간 동안 정체성도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고 다녔다는 소리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아 나는 끝까지 단호한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시벨리우스가 노골적으로 서운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이사나가 적절히 화제를 전환해서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저기, 그런데 시벨 님은 왜 블루 엘프로 변하신 거예요?”
“응? 왜? 이상해?”
“아뇨,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다지 흔한 종족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저희밖에 없으니 괜찮지만 인가로 들어가면 굉장히 눈에 띌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우려가 담긴 질문에 나 역시 속으로 공감했다. 지금은 눈에 익어 괜찮아졌지만 시벨리우스의 푸른색 피부는 굉장히 시선을 끄는 편이었다. 엘프 자체도 흔치 않은데 블루 엘프라고 하면 앞으로 가는 곳마다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멀뚱멀뚱하게 눈을 뜨고 물었다.
“블루 엘프가 눈에 띈다고? 그런 말은 금시초문인데. 설마 그 사이에 종족 수도 달라진 거야?”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이종족을 쉽게 만날 수 없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거든요.”
“헤에, 그렇구나. 예전에는 안 그랬어. 몬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어느 종족이든 전부 섞여 지내는 편이었지. 뭐, 그 시절에도 유니콘이나 드래곤은 정체를 감추고 다녔지만.”
시벨리우스는 그 시절이 그리운 듯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곧 쓰게 웃었다.
“내 외형 말인데, 바꾸는 건 가능하지만 너희들만 괜찮다면 난 지금 이대로 지내고 싶어. 이 모습에 추억이 많아서 애착이 좀 있거든. 그래도 될까?”
“전 괜찮아요.”
“나도 상관없어.”
“정말? 고마워.”
딱히 감사 인사를 받을 일도 아닌데 시벨리우스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런 걸 보면 타고난 성정 자체가 모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만 하지 않는다면 정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기분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그가 보내는 호의는 그저 나와 닮은 그의 친우를 향한 것일 뿐,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그저 혼란스러워서 그러려니 대강 넘어가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이런 애매한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가 현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벨리우스와의 동행에 회의적인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까진 말이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해야겠다.”
날이 저물자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동을 중지하고 밤을 보낼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숲이라곤 해도 평지가 대부분이라 자리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터를 닦기에 앞서, 나는 멀뚱히 주위를 살피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시벨리우스, 물어볼게 있는데.”
“그냥 시벨이라고 부르라니까. 본명으로 부르니까 딱딱하잖아.”
“……그럼 시벨, 너 침낭 있어?”
“침낭?”
“노숙하려면 필요할 텐데 준비한 게 우리 것밖에 없거든.”
“아, 그거라면…….”
시벨리우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막대기와 종이, 그리고 붓으로 보이는 필기구였다. 도저히 침낭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내가 의아해하자 그는 싱긋 웃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이윽고 시벨리우스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더니 바닥에 놓은 다음 막대기로 찍어서 고정시켰다. 그런 행위는 막대기가 울타리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다 됐다.”
“뭐하는 건데?”
“두고 보면 곧 알게 될 거야.”
시벨리우스는 종이에 또다시 무언가를 적고는 이번엔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갑자기 화르륵, 종이 위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더니 강한 바람이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건 시벨리우스의 모습이었다. 푸른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진한 황금색으로 바뀐 것이다. 심지어 동공마저 사라져서 완전히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다. 더불어 그의 이마에 빛으로 이루어진 금색의 뿔이 돋아났다.
“킬리다.”
그가 무언가 알 수 없는 언어를 읊자, 바닥에 꽂혀 있던 막대기들에서 전등이 켜지듯 선명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그 빛은 금가루처럼 흩뿌려지며 다른 쪽의 막대기와 서로 이어져 나갔다.
“키클로스. 그라미. 모티보. 스피라.”
시벨리우스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금빛의 가루는 점점 더 크게 주위를 가득 채워 나갔다. 바닥에 거대한 원이 그려지고 기둥이 세워지더니, 불쑥 치솟아 올라 지붕처럼 하늘을 덮어나갔다. 그동안 나와 이사나는 빠르게 뻗어나가는 빛의 줄기를 그저 망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쏟아지는 빛줄기에 갇힌 기분이었다.
“시마디.”
잠시 후 그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주위를 가득 채운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침대와 가구가 배치된 아늑한 공간 안에 서 있었다. 바닥엔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과 지붕이 단단하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여느 안락한 저택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
“…….”
장소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창문(그렇다! 심지어 창문까지 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수풀 덕분에 알았다. 나무의 모양이며 주위 광경들이 변하기 직전까지 봤던 것과 전부 똑같았다. 이사나 역시 그것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때? 이러면 침낭이 따로 필요 없지?”
이 상황에서 느긋한 사람은 시벨리우스 한 명뿐이었다. 그는 굳어 있는 우리를 향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도무지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여전히 얼이 빠진 채로 물었다.
“……마법이야?”
“아니, 그거랑 조금 달라. 우리 유니콘만 할 수 있는 고유의 술법 같은 거야.”
“술법? 그걸로 이런 것도 돼?”
“응, 간단한 진을 사용한 거라 좀 허술하긴 하지만. 그래도 임시로 쓰기엔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다니…….”
이건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잖아.
황망해서 바라보자 시벨리우스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는 그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요리도 잘하는 녀석이 이런 기똥찬 재주까지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것도 괜찮을지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 틈으로 처음과는 달라진 결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그래, 까짓 거 다른 사람으로 오해 좀 받으면 어때? 어차피 4천 년 전의 사람인데. 시간이 지나면 시벨리우스도 결국은 내가 다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때까지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덕분에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회의감을 느낀 지가 언젠데 그새 마음이 바뀌다니, 나란 녀석도 참 어지간하구나. 스스로가 한심한 기분에 저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지금 이 결정이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