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54화 (154/608)

제154화

“자, 이 문제는 여기서 끝! 더 이상 생각하지도, 논하지도 말자. 사촌 형이 마신관에게 적의를 보였다고 했지? 그 정도면 상태가 썩 나쁜 편은 아냐. 주기적으로 마신관이 방문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지. 감시인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저주가 불완전하다는 소리거든. 그리고 저주는 원래 고통을 주는 게 주목적이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진 않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족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마검을 구할 시간은 충분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

“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깨우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사나가 호응까지 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를 틈도 없이 그대로 결론을 맺었다.

나는 조금 허무한 기분으로 배낭을 다시 바라보았다. 물론 좀 더 고민한다 해서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마족의 위험성은 둘째 치고, 그들의 배후엔 마왕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왕은 현재 대공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마족들과는 가능한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게다가 루카르엠처럼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불안해서라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최종적으로는 나도 시벨리우스와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차례가 정해진 것도 아닌데 괜히 순서를 빼앗긴 기분이랄까. 그 순간에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 잘 해결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능력도 생각보다는 쓸 만할 거야. 나 이래봬도 세라핀이었거든.”

“세라핀이요?”

“우리 일족 최고의 전사에게 내려지는 칭호야. 오십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무술 대회의 승자만이 받을 수 있지. 난 열 번 연속 세라핀이었어.”

“우와, 굉장해요. 그럼 시벨리우스 님은 어떤 무기를 다루세요?”

“그냥 시벨이라고 불러. 무기는 딱히 정해진 건 없어. 검도 다루고 창과 활도 다룰 수 있고, 권법도 조금 할 줄 알고, 그 밖에 이것저것……?”

“그렇게나 많이요?”

“우리 일족에서 태어난 사내라면 모두 그 정도는 할 줄 알아. 어릴 때부터 그런 것만 배우고 자라거든.”

씩 웃은 시벨리우스는 설명을 빙자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풍문에 의하면 유니콘은 원래 정의와 분별의 신이 신계의 문지기로 만든 전투 종족이었다고 해. 그때만 해도 마계와 신계의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몰래 들어와서 분탕질을 치는 마족들이 많았던 모양이야. 이후 통로가 닫히면서 더 이상 문지기가 필요 없어지자 자유롭게 살라며 중간계로 내려 보냈다고 하더군. 하지만 애초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종족이라 몸을 단련하는 습관이 계속 이어져 온 거지. 뭐, 결국 이곳의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신계로 돌아갔지만.”

“헤에, 그렇군요.”

직후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유니콘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우선 그들 일족이 드래곤만큼이나 마나가 풍부하다는 것, 더불어 술법이라고 불리는 특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시벨리우스는 어릴 때부터 인간 세상에 대한 동경이 강해서 일찌감치 출가했고, 그 덕에 모험을 비롯한 여행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종족의 언어도 익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내게 그는 갑자기 늘어난 덩치 큰 군식구 한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능력만으로 따지면 마족인 루카르엠도 못지않게 대단한 존재다. 강하다고 해서 무작정 좋아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물론 이사나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런데 정작 엉뚱한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 * *

“이게 뭐야?”

해가 오후로 접어들 무렵, 내가 건네주는 것을 빤히 응시한 시벨리우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표정이 너무 미묘해서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본 다음 대답했다.

“뭐기는. 빵이랑 육포잖아?”

“……설마 이게 식사라고?”

“응.”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뭐야, 설마 이 녀석도 라피스랑 같은 과였나? 나는 어디를 가도 고급만을 외쳐대던 붉은 용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동행하지 않으면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 바로 그놈의 고급 타령을 듣지 않는 것이었는데, 앞으로 또 시달릴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불편해도 한동안은 참아. 마을에 들어가면 제대로 된 음식을 실컷 먹게 해 줄 테니까.”

“자, 잠깐만. 마을에 들어가면 이라니. 그럼 노숙하는 동안엔 내내 이런 걸 먹는 거야?”

“할 수 없잖아. 그럼 여행하면서 호의호식할 줄 알았어?”

사실 나라고 이런 편협한 식사가 좋을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한창 성장기인 이사나에겐 질과 양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런 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건 우리 둘 다 요리에 별로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황제로서 살아온 이사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이 세상은 음식 재료도 조리 방식도 한국과는 다른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도 못했다.

물론 마음먹고 연구하면 못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문제는 내가 시장기를 전혀 못 느낀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어도 그 맛이 그 맛처럼 느껴져서 적정량 이상을 삼키지도 못하는데, 적극적으로 요리를 연구해 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길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을 텐데. 이사나를 위해서라도 요리를 배워 봐야 할까.’

앞으로는 마을보다 밖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매번 형편없이 끼니를 때우게 하는 건 이사나에게 매우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속으로 조금 자책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혹시 식재료는 전혀 없어?”

“으음, 저녁에 수프나 끓여볼까 해서 몇 가지 사둔 건 있는데…….”

“그래?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었기에 나는 바로 배낭을 열어 재료들을 꺼냈다. 설탕과 소금을 비롯한 조미료 몇 가지와 말린 과일들, 그리고 약간의 채소들과 얼린 생고기 두 덩이였다. 시벨리우스는 그것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이 정도면 될 것도 같은데.”

“뭐가?”

“잠깐만 기다려 봐.”

짧은 대답과 함께 그는 자신의 허리에 찬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 하나씩 커다란 것이 잡혀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 역시 아공간 안에 있었던 물건인 듯했다.

잡혀 나오는 것들은 국자와 냄비를 포함한 갖가지 조리 도구들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수북하게 쌓인 도구들을 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갑자기 이게 다 뭐야?”

“내 보물들이야.”

“보물?”

요리 도구가 보물이라고? 황당해서 반문한 말에 시벨리우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매우 들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디 보자…….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거긴 하지만 워낙 시간이 오래 지나서 불안했는데 다행히 다 괜찮은 것 같네.”

“그걸로 뭘 하려고?”

“뭘 하긴. 음식을 만들어야지.”

그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한 심정으로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훤칠하게 큰 키, 단단한 근육이 잡힌 팔과 다리. 어디를 봐도 주방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흐음, 역시 기억 못 하는 구나. 요리는 내가 가장 즐겨 하는 취미이자 특기야. 예전에 너한테도 해 준 적 많았는데?”

“그, 그래?”

“그랬어. 너 내가 만든 요리 되게 좋아했잖아. 맛있다면서 매일 해 달라고 했었는데.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

당연히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없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아는 엘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만 선명해질 뿐이었다. 내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시벨리우스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뭐, 할 수 없지. 일단 잠시만 기다릴래? 적당히 먹을 만한 걸 만들어볼게.”

시벨리우스는 그 즉시 재료를 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요리가 특기라는 말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그의 분주한 손길만큼이나 음식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만들어졌다. 콩을 갈아 넣어 달달하게 조리한 수프는 물론 채소와 함께 알맞게 익힌 감자볶음, 다양한 소스를 곁들인 고기찜 등등이 차례차례 접시에 담겼다. 식탐을 거의 느끼지 않는 나조차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음으로 시벨리우스는 식탁과 의자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식탁보와 천막을 치고 식기를 나란히 늘어놓고 나니 순식간에 그럴 듯한 캠핑장이 만들어졌다. 아공간을 이런 식으로 알차게 활용할 수도 있구나 싶어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자, 먹어 봐. 맛있을 거야.”

시벨리우스는 완성된 요리를 차례로 배치한 다음 자랑스럽게 말했다. 육포 따위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느 고급 식당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풍성하고 화려한 식탁이었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재료들로 이런 식단이 만들어질 줄이야.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조리 과정을 직접 지켜보지 않았다면 음식을 만드는 마법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가장 크게 반긴 사람은 이사나였다. 식탁에 앉자마자 조심스레 한 입을 먹어본 그는 바로 감탄을 연발했다.

“우와, 굉장해요, 시벨 님! 정말 맛있어요!”

“후후, 그렇지? 내가 이래봬도 왕성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력도 있거든. 귀족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어.”

“정말 그러실 것 같아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봐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붉게 상기된 두 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사나는 평소에 음식을 가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흡족한 감정을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크게 감탄할 정도면 굉장히 맛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벨리우스 역시 그 반응에 매우 만족한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넉넉하게 만들었으니까 많이 먹어. 한창 잘 먹어야 할 나이에 부실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면 쓰나. 이제부터 식사는 내가 전부 책임질게. 맛있는 거 잔뜩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정말이요? 하지만 준비한 식재료는 이게 전부인걸요?”

“없으면 찾으면 되지. 다행히 조미료는 충분하더라고. 아마 근처를 좀 돌아보면 먹을 만한 것들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번거로우실 텐데…….”

“뭘 그 정도 가지고. 아, 그렇지. 혹시 달콤한 거 좋아해? 말린 과일이 좀 남았거든. 다 먹고 나면 후식도 만들어 줄게.”

“와아, 고맙습니다!”

기뻐하는 이사나만큼이나 나도 속으로 감탄했다. 사람을 겉으로만 봐서는 모른다더니, 설마 시벨리우스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머릿속에 완고하게 잡혀 있던 부정적인 인식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리며, 그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요리를 배워 볼까 고민하던 차에 전문가 수준의 요리사가 나타나다니, 의외의 횡재를 한 기분이랄까? 만약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한 평가를 군식구에서 ‘썩 나쁘지 않은 동행인’쯤으로 상향 조정하고 있을 때였다.

“엘, 뭐해? 너도 어서 먹어 봐.”

“응? 아, 나는…….”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먹을게.”

안 먹어도 괜찮다고 하면 서운해 하겠지?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 모처럼 정성껏 만든 음식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식기를 들었다. 가장 만만한 수프부터 한 모금 삼키자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입 안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머리로 인지되는 정보일 뿐, 실제로 식감이나 미각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음, 맛있네. 의외다. 너 정말 요리 잘 하는구나.”

“정말? 그게 입맛에 맞아?”

그러자 조금 전까지 자화자찬을 늘어놓은 사람답지 않게 시벨리우스가 크게 반색해서 물었다. 이사나가 칭찬했을 때 당연하다는 식으로 반응하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라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기쁨과 설렘,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을 담은 눈빛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기분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봐?”

“헤헤, 실은 그거 다 네가 좋아했던 것들이야.”

“……어?”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기억은 나지 않아도 입맛은 그대로구나. 다행이다.”

……또 그거냐.

한창 좋았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이 녀석은 아주 조금이라도 나와 ‘엘’이라는 사람을 연결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응? 왜 더 먹지 않고.”

“저기,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한동안 동행한다고 하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요리를 해 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앞으로는 내 건 만들지 않아도 돼. 난 별로 음식이 필요 없거든.”

“……뭐? 필요 없다니?”

“정령이잖아. 맛에 대한 정보는 인지하지만 미각이 선명하진 않아. 실제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종이를 삼키는 기분이야. 억지로 먹으려면 먹을 순 있긴 한데, 굳이 편한 장소에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

“그런……. 그게 정말이야?”

되묻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당혹감과 실망감으로 일그러진 시벨리우스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자꾸만 내가 악역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