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저기, 흥분하지 말고 좀 진정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갑자기 덮쳐져서 봉인진에 갇혔지, 눈을 뜨니 4천년 이후라지! 엘은 이미 세상에 없다고 하지!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가 없고 정신이 산만한데 이제 엘이 한 일까지 아니라고 우기고 있잖아! 네가 뭔데 엘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
“……이봐요. 제가 언제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고…….”
“지금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잖아! 엘의 얼굴, 엘의 목소리, 엘의 이름까지 다 네가 쓰고 있잖아! 솔직히 말해! 네가 그에게서 빼앗은 거지?”
“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시벨리우스의 입술이 크게 비틀어졌다.
“왜,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모른 척해 봤자 소용없어. 분명 다른 정령왕이나 누군가가 그에 대해서 말해 줬겠지. 그래서 네가 부러운 나머지 그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거잖아? 엘은 모두에게 사랑 받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점은 확실히 정령왕이로군. 탐욕스럽고 뻔뻔한 게 선대를 아주 빼닮았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거든요?”
“흥, 욕먹는 게 싫으면 행실을 똑바로 하든가. 잘 들어. 네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소용없을 거야. 내가 엘의 존재를 증명할 테니까. 4천 년 전의 사람이니 흉내 내도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더 이상은 한계다. 머릿속이 울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아, 젠장! 시끄러! 이제 그만 좀 해! 뭐 이런 정신 나간 말이 다 있어?”
“……!”
그 반응이 모두에게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루카르엠은 물론 이사나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시벨리우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너, 너 방금 지금 뭐라고…….”
“시끄럽다고 했다, 왜! 소리는 너만 지를 수 있는 줄 알아? 아직은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이게 누굴 가마니로 보나!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널 봉인진에 가뒀어? 4천 년의 시간이 사라진 게 나 때문이냐고!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난리야?”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그럼 이게 억지가 아니고 뭐야? 뭐? 엘의 것을 빼앗아? 목소리든 얼굴이든 내가 똑같은지 알 게 뭐야! 난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몰라! 동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 와서 화풀이하는 것도 유분수지, 나도 참을 만큼 참았거든? 제발 적당히 좀 해!”
그 순간이었다. 머리끝까지 화난 것처럼 일그러졌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갑자기 멍하게 변했다. 마치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강?”
“그래! 한강! 왜? 이젠 한강도 엘 거냐? 그럼 서울도 엘 거겠네? 아예 지구가 전부 다 엘 거라고 하지, 왜? 그 엘은 완전 부자겠다? 그래, 그러라고 하지 뭐! 아주 부러워 죽겠네! 이제 속이 시원해?”
“너……”
“왜! 뭐! 엘한테 다 준다잖아! 여기서 뭘 또 안겨 줘야 만족할 건데? 그 엘이란 녀석 참 욕심도 많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화가 나서 마구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을 뿐인데, 왠지 그때마다 시벨리우스가 조용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조금 이상했지만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단, 넘겨받을 건 받더라도 순서는 정확히 해. 엘이란 이름을 독점할 거면 전국에 있는 모든 엘들의 이름부터 개명시키고 난 뒤에 따져. 나한테만 이러지 말고. 알았어? 그때까진 나도 절대 양보 못 해! 아니, 안 할 거야!”
“엘.”
“그래, 엘! 너 설마 이 세상에 엘이란 이름이 그 녀석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바보나…….”
뒷말은 잇지 못했다. 바로 그때, 시벨리우스가 두 팔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뭐, 뭐야! 왜 이래!”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의 품에 끌려들어 갔다. 당황해서 버둥거렸지만 꽉 붙잡은 두 팔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얌전히 안겨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몸부림치려고 했다. 바로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야! 너……!”
“엘이다…….”
“어? 뭐라고?”
“엘이다. 분명히 엘이야. 그럼 그렇지.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지. 엘이 아닐 리가 없지.”
“…….”
깊은 안도감을 담은 목소리가 조용히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잔잔하게 울리는 음성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끌어안은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다는 건 조금 나중에 깨달았다.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한순간에 식었다. 그러자 뒤늦은 후회가 슬금슬금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시벨리우스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낯선 시대에 떨어졌는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지인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알고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곳에 있는 누구도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막말을 퍼붓고 말다니. 나란 녀석도 인내심이 참 종잇장처럼 얇구나 싶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할 수 없이 나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윽고 한참 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시선이 마주쳤고,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나는 얼른 사과부터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말이 내 변명을 가로막았다.
“저기, 미안해.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다시 한 번 말해 봐.”
“으응?”
“조금 전에 나한테 이상한 말 했잖아. 뭐라고 했었지? 동대? 한강……?”
질문을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다만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가 의아해하며 답했다.
“……동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고……?”
“그래, 맞아, 그거!”
순식간에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엘도 그랬어. 화가 나면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명칭이나 비유들을 썼어. 인간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았지만 이곳에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말들뿐이었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지. 그래, 그러니까 분명히 엘이야. 응, 맞아.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뭐? 자, 잠깐만. 그건…….”
“무엇보다 이렇게 똑같은걸? 지금은 네가 잠깐 날 잊어버린 것뿐이야.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엘? 언젠가 시간이 아주 오래 흘러 전혀 다른 상황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린 여전히 친구일 거라고 했어.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아.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 거지? 그렇지?”
“…….”
꽉 잡은 두 손등 위에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약속을 한 건 내가 아니라고, 네가 상대를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확실히 말해 줘야 하는데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설이는 기색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언젠간 너도 날 기억해 낼 거야. 설령 끝까지 알아보지 못해도 상관없어. 백지가 됐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내가 많이 노력할게.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날 책임져.”
……뭐?
단호한 요구에 한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굳어 있는 내 뒤편에서 이사나가 헛숨을 삼키는 소리와 루카르엠이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클모어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두 달여. 뜻밖의 동행인을 얻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나를 멋대로 ‘엘’이라고 인정한 뒤부터 시벨리우스는 나와 이사나에게 무척 자상해졌다. 표정이나 말투가 부드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쪽의 입장을 배려하고 적극적으로 맞춰주려고 했다. 다만 그게 원래 인성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루카르엠에겐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불청객인 건 본인도 마찬가지인 주제에 마족과 함께 다닐 수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결국 루카르엠은 예전보다 더 먼 거리까지 떨어져야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좋아하는(또는 잘 해줘야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상대한테만 호의를 베푸는 성격인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행으로 받아들인 후에도 나는 그를 대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지금이야 날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잘해 주겠지만, 또 상황이 달라지면 어떻게 튈지 모른단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나도 인지하는 경계심을 시벨리우스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선지 그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이사나와 친분을 쌓으려 들었다. 이사나가 자신을 잘 따르게 되면 내가 차마 내쫓지는 못할 거라고 계산한 게 틀림없었다. 순수한 이사나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시벨리우스에게 금방 마음을 열었고,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흐음, 네가 이 제국의 황제라고?”
“아뇨, 여기가 아니라 바다 건너 스왈트라는 제국이에요.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지금은 잠시 황성을 떠나 있는 상태지만요. 그런 도중에 엘을 만나게 됐죠.”
“헤에, 황제가 제국을 떠날 만한 사정이라면 내란 같은 것밖에 없잖아. 그럼 도망자 신세에서 하루아침에 정령왕의 계약자가 된 건가? 너 굉장히 운이 좋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작부터 가볍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사나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들려주었다. 황성에서 도망친 후 기사들과 헤어져 사촌 형을 만나러 갔다는 것이나, 대공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것, 내가 신관으로 위장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되어 버린 웃지 못 할 여담 등. 대부분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사안들이었다. 또한 이곳에 오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사촌 형이 마신의 저주에 걸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밝혔다. 평소에 워낙 신중한 편이고 개인적인 일이라도 남에게 함부로 발설할 성격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이종족이다 보니 경계가 쉽게 풀어진 듯했다. 하기야 이미 내 정체를 밝힌 시점에서부터 숨겨 봤자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고 있구나. 그래서 이곳엔 마검을 찾기 위해 온 거란 말이야?”
“네, 맞아요. 형님에게 걸린 저주를 풀려면 그게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흠, 따라다니는 마족 녀석이 하나 있잖아. 그 녀석한테는 마검이 없나?”
“아……?”
아차, 그러고 보니 루카르엠이 마족이었지? 그제야 떠오른 사실에 나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심지어 그냥 마족도 아니고 마계에 4명밖에 없다는 공작 신분이었다. 그 정도라면 마검 한두 개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사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표정에 기대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다. 그 녀석한테는 신세를 지지 않는 게 낫겠어. 행여나 부탁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
“네? 왜요?”
생각지 못한 경고에 이사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탕을 받았다가 다시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시벨리우스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왜긴. 믿을 녀석이 따로 있지, 다른 것도 아니고 마족을 어떻게 믿어? 예로부터 마족이 끼어들어서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어. 그놈들은 절대 공짜로 거래를 하지 않아. 그걸 빌미로 뭘 요구할지도 모르고, 자칫하면 오히려 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어.”
“으음…….”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일이 벌어진 후에는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어. 도박이 위험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애초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아. 그리고 마족과의 거래는 도박보다 더 위험하지. 괜찮을 거라고 정말 장담할 수 있겠어?”
하긴,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세간에 익히 알려진 악명만 봐도 마족은 절대 유순한 종족이 아니다. 특히 루카르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번에 겪은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인간에게 마목의 씨앗을 건네줬고, 그 때문에 무고한 희생자가 생겼는데도 자책감조차 갖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런 존재를 안전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아직 루카르엠이 마왕을 배신했다는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설령 지금은 그렇다 해도 나중에 다시 마음을 바꿀 것 같았다.
‘……그래도 배낭에 아공간은 그냥 걸어줬는데.’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내가 메고 있는 배낭끈을 만지작거렸다. 마법을 걸어 줬을 때 루카르엠이 꿍꿍이를 감춘 기색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기척을 감추지 않겠다는 약속 역시 잘 지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마목의 씨앗을 줄 때도 사전에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하던데, 그 정도라면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클모어 공작에게 걸려 있는 저주를 풀려면 한시라도 빨리 마검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기한이 촉박한 일정이다 보니 저절로 마음속에 번민이 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벨리우스가 단호한 말로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