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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52화 (152/608)

제152화

잠시간 멍해져 있던 시벨리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부릅뜬 그의 눈동자에 충격과 경악, 혼란의 감정이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내가 봉인된 이후로 4천 년이나 흘렀다고? 지금 그렇게 설명한 게 맞아? 몇십, 몇백도 아니고……4천 년?”

“네, 맞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말도 안 돼! 그럼 여기에 있는 엘은?”

“말씀드렸다시피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이시죠. 당신이 알고 있는 정령왕은 아마 이분의 전대에 있었던 엘퀴네스일 겁니다. 훤칠한 키, 아름다우면서 성인 남성다운 외형, 차갑고 냉정한 성품. 전대의 물의 왕이 이런 모습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아, 네에…….”

루카르엠의 질문에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4천 년 전이면 엘뤼엔이 아직 정령왕이었을 시절이다. 왜 묘사를 들었을 때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누가 보더라도 엘뤼엔의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는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 거짓말 하지 마! 누가 마족이 하는 말 따위에 속을 줄 알아? 너희 마족들이 밥 먹듯이 거짓말하는 종족인 거 다 알아!”

“이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드린 말씀은 전부 사실이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퀴네스 님?”

“네? 아, 뭐…….”

“이럴게 아니라 저 가여운 분에게 정령왕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믿으실 것 같은데요.”

“정령왕의 능력이요?”

“물의 정령왕이시니 직접 물을 다뤄 보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흠, 물이라.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두 손을 펼쳐 공중에 물 덩어리를 만들어 보였다. 쏴아아! 철썩! 눈앞에서 거대한 샘이 출렁거리자 시벨리우스의 호흡이 잠시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정령왕?”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루카르엠은 것 보라는 듯이 얼굴 가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번다더니, 마치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영 찝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탁월한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어도 요지부동이던 시벨리우스가 드디어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수가……그럼 정말로 4천 년이 흘렀다고…….”

느릿하게 중얼거린 그는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까마득하게 기나긴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린 탓인지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혼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져 있는 시벨리우스를 안타깝게 응시했다. 루카르엠 역시 그답지 않게 애석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갇힌 동안의 일은 전혀 기억에 없으십니까?”

“……없어. 아무것도. 내가 기억하는 건 봉인진에 갇혔다는 사실뿐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는 건 자각했지만 길어 봤자 몇 년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어느 정도의 시간이 몇천 년이었다니…….”

한동안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뭔가 퍼뜩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 그럼 내가 아는 엘은……? 엘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요, 전 그분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그분이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겠죠. 인간이 4천 년의 세월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루카르엠의 대답은 이미 정해진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듯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세대 교체를 한 정령왕이라면 모두가 다 경험하는 일일까? 라피스 때도 그러더니만, 만나는 사람마다 물의 정령왕을 엘뤼엔으로 알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만큼 엘뤼엔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이겠지만. 마치 그가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들이 강제로 내게 떠넘겨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랑 닮았다는 ‘엘’은 누구지? 엘뤼엔도 그 사람을 알고 있는 건가?’

왜일까.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나 스스로도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때 영원히 주저앉아 있을 것만 같았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멍해 보였지만, 충격은 많이 수습한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생각보단 멀쩡해. 기분은 더럽지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신계에 편입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유니콘, 현재는 성마라고 불리는 당신의 일족은 룬의 혈통을 잃은 덕분에 지난 시간 동안 구색만 겨우 갖추고 있었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룬의 혈통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니콘 일족에게 꽤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나 호의 어린 제안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의 제안에 기분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아니, 필요 없어. 애초에 날 봉인진에 가둔 게 바로 그 망할 일족들이니까.”

“저런, 내분이었습니까?”

“당시 신계로 이주하는 게 거의 확정된 상태였는데 내가 그걸 거부했거든. 이제 와서 그때의 결심을 바꿀 생각도,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어.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해.”

“그럼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입니까?”

“글쎄…….”

시벨리우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가볍게 주위를 훑어보는 눈동자가 낯선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듯이 보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상에서 몇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는 사람도, 익숙한 것들도 그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낯선 공간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와는 경우가 많이 다르지만, 나 역시 이곳에 처음 태어났을 땐 막막한 심정이 더 컸으니까. 그래서 아주 조금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바라봤다 느낀 순간이었다.

“너, 뭐야?”

돌연 시벨리우스가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친근하게 대하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싸늘한 태도였다. 갑작스러운 적의에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멀거니 눈을 깜빡거렸다.

“……네?”

“넌 뭐냐고. 네가 뭔데 엘이랑 똑같이 생긴 거야? 목소리도, 체향도 전부 똑같이 꾸미고! 젠장, 정령왕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거지같아! 그중에서도 넌 특히 최악이야! 남을 속이는 게 재밌어?”

“자, 잠깐만요.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제가 언제 그쪽을 속였는데요?”

“그럼 그 모습이 진짜라고?”

“당연하죠. 전 태어날 때부터 이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엘이라고 불렀을 때 그냥 가만히 있었잖아!”

“그야…… 제 애칭도 엘이니까요.”

“닥쳐! 누구 맘대로 엘이야? 그건 아무나 맘대로 써도 되는 이름이 아냐! 너! 애칭 바꿔! 지금 당장!”

속사포로 쏟아지는 호통에 어안이 벙벙했다. 황망한 심정으로 루카르엠을 쳐다보니 그 역시 당황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나만 보이는 각도에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고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그의 시선에도 시벨리우스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 모양이다.

‘……왠지 골치 아픈 사람한테 걸린 것 같네.’

등장 장면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왜 만나는 이종족마다 성격이 다 이 모양인 걸까?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지금 그의 입장에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전부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 있는 탓이라 생각하니 별로 화내고 싶진 않았다.

“으음…….”

그때 마침 들려온 신음 소리가 내 신경을 한순간에 빼앗았다. 경황이 없었던 탓에 쓰러져 있던 이사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헉! 맞다, 이사나!”

화들짝 놀라서 소리치자 덩달아 놀랐는지 시벨리우스 역시 움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급히 이사나에게 다가가 몸을 부축했다. 의식이 돌아오는 중인지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사나! 괜찮아?”

“……으응, 엘?”

“그래, 나야. 정신이 들어?”

“마, 마물은?”

“괜찮아. 전부 다 죽었어. 이제 안전해.”

“정말? 다행…… 윽……!”

이사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신음을 토했다. 아직 정령이 역소환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바로 그의 몸에 치유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이런, 미안해. 많이 아프지? 지금 바로 치료할게. 곧 편해 질 거야.”

“으응, 고마워, 엘.”

“흥, 엘은 누가 엘이야?”

평화로운 분위기는 또다시 찾아든 불청객에 의해 산산이 깨어졌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시벨리우스였다. 그를 발견한 이사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 누, 누구?……블루 엘프?”

의식이 없는 동안의 일을 알 리가 없는 이사나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종족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이사나에게 친절히 정체를 밝힐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턱짓으로 이사나를 가리키며 성의 없이 물었다.

“그 인간은 뭐야?”

“제 계약자인데요.”

“계약자?”

그제야 조금은 관심이 생겼는지 시벨리우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이사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렸다.

“……정말이네. 정령왕의 인장을 가지고 있군.”

“어? 정령도 아닌데 그게 보여요?”

“유니콘 일족의 눈은 영안에 가깝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걸 듣지요.”

이번에도 반응 없는 시벨리우스를 대신해서 루카르엠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알고 보니 유니콘은 정령의 인장뿐만이 아니라 명계의 존재― 즉, 혼령이나 귀신의 존재도 감지한다는 모양이다. 심지어 죽어서 사체가 사라져도 안구만은 남는데, 그걸로 혼령을 비출 수 있다고 했다.

“헐, 혼령을 비춰요?”

“선명하지는 않지만 흐릿하게는 보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유니콘의 눈이 가진 가장 특별한 능력은 따로 있습니다. 그걸 먹으면 일시적으로 혼령과 접촉할 수 있다는 거죠.”

“네에? 먹……?”

“뭐, 맛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힘을 원했죠.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갑자기 잃은 사람이라든가. 귀신과 싸워 특정 장소에서 내쫓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든가. 가진 게 돈뿐이라 단지 특별한 경험을 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요.”

“그, 그렇군요.”

“아무튼 그래서 고대에는 유니콘의 눈이 부르는 값에 팔릴 정도로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들 일족만 노리는 전문 사냥꾼들도 있었을 정도로요. 물론 유니콘 자체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지만 말이죠. 그래도 유니콘들의 입장에선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을 겁니다. 애초에 영안 자체가 중간계에 속한 것이 아니니 이 세상에서 머무는 것이 곤욕이었겠죠.”

“그래서 신계로 이주를…….”

“거기 마족, 쓸데없는 소리는 닥쳐.”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찔끔해서 입을 다물자 그는 나를 가만히 노려보더니(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다시 심드렁하게 이사나를 살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인간 계약자라니, 별일이군. 정령왕 중에서 가장 계약이 어렵다는 엘퀴네스가 또다시 인간에게 소환되다니. 그럼 이번이 두 번째 계약자인가?”

“네? 아뇨, 첫 번째인데요?”

그러자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앙다문 입술에서 마치 씹어 발기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첫 번째라고?”

“여기 있는 이사나가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엘은 뭔데?”

“엘……요?”

“그래, 엘! 엘도 엘퀴네스의 계약자였어. 4천 년 전이니 저 녀석보다도 한참 먼저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그런데 왜 저 녀석이 첫 번째라는 거야?”

엘이란 사람이 정령왕의 계약자였다고?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라 나는 그저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루카르엠 역시 상당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요. 그럴 리 없어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오해라고?”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은 이사나가 맞아요. 다른 정령왕들에게도 확인받은 사실이고, 제 본능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맞습니다. 저도 지금 계신 분 이전에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인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내 대답에 이어 루카르엠이 바로 설명을 거들었다. 그러나 시벨리우스는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파란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흥분해서 소리쳤다.

“뭐야,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너 지금 내가 4천 년이나 갇혀 있었다고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기억은 틀림없어! 엘은 정령왕의 계약자였어! 엘퀴네스를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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