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51화 (151/608)

제151화

1초가 영원 같은 침묵이 흘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었을 뿐, 정작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인 남자는 이 순간이 마냥 기쁜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기대감으로 휘어진 눈빛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색하다.

사람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저쪽인데, 왜 내가 민망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에서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다시금 천천히 훑어 내렸다. 외형은 어디를 봐도 엘프가 틀림없는데 피부색이 특이하리만치 파랗다. 달빛을 곱게 빻아놓은 것 같은 은발은 이사나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못지않게 화려한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이런 존재들을 부르는 호칭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음, 그러니까……블루 엘프……?”

분명 바다에 사는 엘프 일족이 이런 외형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내 말에 남자는 즉각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어진 대답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 유희용 모습이 뭐냐고 묻는 거야? 맞아, 블루 엘프.”

“네? 유희?”

“응, 알다시피 본신은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럼 조금 전에 본 말의 모습이 본신이에요?”

“새삼스럽게 당연한 걸 왜 물어? 하지만 말(馬)이 아니라 일각수야.”

“일각수?”

“다른 말로 유니콘이라고도 불리지. 말이랑 외형은 닮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혀 다른 존재야. 그러니 앞으로 언급할 때 조심해 줘. 원숭이랑 인간이 닮았다고 인간을 원숭이라고 부르진 않잖아.”

“으음, 네,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요. 유니콘이 어떻게 사람으로 변신해요?”

“어떻게냐니……변신할 수 있으니까?”

……제발 누가 나한테 이 상황 좀 알아듣게 설명해 줘!

나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나 보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진 남자―이름이 시벨리우스랬던가?―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섰다.

“왜 그래, 엘? 어디 아파?”

“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나는 남자가 다가선 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애먼 양심이 찔려올 만큼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엘, 너 혹시 아직도 날 못 알아보는 거야? 이 모습을 봤는데도?”

“어,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나는 당황해서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만이 아니라 블루 엘프를 보는 것조차 처음이라고 당당하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봤자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 예전부터 불길한 예감은 정말 잘 맞는 편이다.

그때 무언가 덜그덕거리는 것이 발에 밟혔다.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린 나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마물의 잔해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 타고 잿더미만 남은 상태라곤 하나, 한때는 인간이었던 것의 잔해다. 나는 기겁해서 황급히 발을 치웠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내 발밑에 붙어 있던 것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동그랗고 딱딱한 황색의 물체였다. 전부 다 새카만 가루가 되었는데, 유일하게 그것만이 온전한 색과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뭐지?’

순간 치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몸을 굽히고 앉아 물체를 가만히 살폈다. 표면은 단단했지만 예상 외로 무게가 가벼웠고, 무엇보다 생김새가 매우 익숙했다. 나는 곧 어렵지 않게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씨앗?”

그런데 왠지 평범한 씨앗치고는 느낌이 이상했다. 보통 식물들은 생명의 기운을 강하게 품고 있는데 비해 이건 오히려 정반대의 기운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죽은 것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씨앗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손에서 씨앗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훼방한 사람은 바로 블루 엘프의 모습을 한 유니콘―이라고 자신을 주장한―남자, 시벨리우스였다. 황당해서 쳐다보자 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 엘. 이건 이곳의 것이 아니야.”

“그게 무슨…….”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마기를 품고 있어. 보아하니 마목의 씨 같은데, 왜 마계에 있어야 할 게 이곳에 있는 거지?”

“……!”

마목.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주위를 훑자 울창한 삼림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 사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루카르엠! 거기에 있죠! 당장 나와요!”

고함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바람 소리 때문인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살랑거렸다. 하지만 당연히 돌아와야 할 화답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더 발끈해서 외쳤다.

“얼른 나오지 못해요?!”

쏴아아

그 순간 유리가 우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안에서 새카만 마기가 뱀처럼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윽고 한데로 뭉친 기운이 물감을 들이붓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쏟아져 내렸다. 그 기괴한 현상은 이내 새카만 머리칼을 지닌 한 남자의 모습을 완성했다. 루카르엠이었다.

“……뭐야, 저거?”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놀랐는지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루카르엠은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이런, 아름다운 물의 왕께서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요?”

여전히 태연하고 밉살맞은 말투였다. 나는 루카르엠을 힘주어 노려본 다음 시벨리우스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있던 씨앗을 다시 빼앗았다. 안 그래도 당황한 상태였던 그는 내 행동에 무척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루카르엠에게 씨앗을 내보였다.

“이거, 당신 짓이죠?”

내 질문에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자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기억에 의하면 루카르엠은 분명 다양한 종류의 마목을 키운다고 했다. 그런 취미 자체도 흔치 않은 것이 분명한데, 때마침 우리를 공격한 사람에게서 마목의 씨앗이 발견됐다? 누가 보기에도 우연으로 치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그는 순순히 자백했다.

“아수라라고 불리는 나무의 열매죠. 피를 먹여 각인시킨 후에 숙주의 몸에 넣으면, 그 속에 가만히 잠복해 있다가 주인이 원할 때 숙주를 마물로 변화시키는 마목입니다.”

“당신…….”

“아아,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오해십니다.”

“오해라고요?”

이렇게 뻔한 정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황당해서 쳐다보자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전 단지 그의 고민을 들어줬던 것뿐입니다.”

“고민?”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몇 마디 주고받고 보니 인간을 넘어서는 강한 힘을 얻고 싶어 하더군요. 그래서 방법을 알려줬죠.”

“그 알려준 방법이란 게 사람을 마물로 만드는 씨앗을 준 거예요?”

“강해지는 건 사실이니까요. 무엇이든 힘을 얻는 것엔 대가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물론 전 사전에 이 모든 사실을 전부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선택한 것은 그 인간이죠. 솔직히 말해서 저도 설마 그가 정말 그 방법을 실행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가끔 마족보다 잔인할 때가 있다니까요. 그래도 물의 왕께는 나쁜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인간보다는 마물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해 보이시던데.”

“…….”

마치 허를 찔린 기분에 나는 이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루카르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싱글 웃었다.

“게다가 뜻밖의 수확도 얻으셨군요. 서클렛의 봉인이 풀렸으니 이제 더 이상 찝찝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셔도 되시겠어요. 더구나 그 속에 들어 있던 것이 설마 성마일 줄이야. 기껏해야 등급이 조금 높은 마수쯤이나 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성마?”

“한 때 유니콘이라 불리던 일족이죠. 지금은 신계에 귀속되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는 존재가 되었지만요.”

그 말에 시벨리우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뭔가 불쾌한 과거를 떠올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루카르엠은 기괴할 정도로 들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날개를 달고 있는 성마라니. 끊어진 줄 알았던 룬의 혈통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넌 뭐지?”

“루카르엠 이라고 합니다. 마족이죠.”

“마족이란 건 그냥 보면 알아.”

정중한 인사에 시벨리우스의 눈이 차게 식었다. 그는 잠시 루카르엠을 노려본 다음 나를 향해 물었다.

“엘, 너 마족과도 인연이 있었어? 대체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네? 아니, 뭐…….”

“아무튼 엘은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그래도 마족이라니, 너무 수상한 녀석이잖아. 아무나 함부로 만나고 다니면 안 돼. 넌 사람을 좀 경계할 필요가 있어.”

……그러는 그쪽은 언제부터 날 봤다고 친한 척인가요.

나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짐짓 엄격하게 훈계하는 시벨리우스를 어이없어하며 바라봤다. 네가 지금 자각이 전혀 없는 모양인데, 지금 이곳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은 바로 너거든?

“호오, 벌써 애칭을 허락하실 만큼 친해지신 겁니까? 전 그렇게 쫓아다녀도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시더니, 이거 좀 서운한데요?”

황당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루카르엠이 얄밉게 말했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그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애칭?”

“네, 방금 물의 왕을 엘이라고 부르셨잖습니까.”

“엘은 그냥 엘이야. 오히려 너야말로 왜 아까부터 엘을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거지? 물의 왕이라니?”

“엘퀴네스 님을 물의 왕이라고 칭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엘퀴네스?”

“네, 지금 당신의 앞에 계시는 분 말입니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이시니까요.”

“그게 무슨…….”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이 나를 향했다. 충격과 혼란이 가득한 두 눈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는 정령왕이고, 정식 이름은 엘퀴네스라고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 넌 인간이잖아. 인간인 네가 대체 왜 정령왕이라는 거야?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 게다가 엘퀴네스는 너랑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역시나 이번에도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사실과 전혀 다른 주장까지 설파하려고 하니 답답함을 넘어 불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반대로 무슨 생각인지 루카르엠은 그의 말에 매우 흥미를 보였다.

“흐음, 당신이 아는 정령왕 엘퀴네스는 이분과 다른 모습이라는 겁니까?”

“그래. 전혀 달라. 그 녀석은 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머리도 더 길었어. 기분 나쁠 정도로 예쁘장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다고. 게다가 시니컬하고 재수 없는 성격이었지. 엘과는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단 말이야.”

“하지만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똑같지 않나요?”

그 말에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정곡을 찔린 듯 흔들렸다. 그는 찝찝한 얼굴로 날 살피고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내가 지금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그거야. 엘은 원래 금발에 녹안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녀석과 같은 색으로 바뀐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

“그 녀석이라…….”

“그 망할 정령왕 말이야. 그 녀석이 엘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엘?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보다 내가 봉인진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난 거지?”

당연한 일이지만 난 그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조차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루카르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그 의문은 왠지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네가 안다고?”

“대충 짐작 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해가 언제입니까?”

발랄하게 묻는 말에 시벨리우스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내키지 않는 어조로 대답했다.

“……세이크 제국력, 445년.”

“호오, 아산트라 대륙의 세이크 제국 말입니까? 정복왕 라비올스가 건국한?”

“그래, 맞아.”

시벨리우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들은 적이 없는 명칭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역시 그렇게 된 거였어.”

루카르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루카르엠?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아아, 그저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엘퀴네스 님. 시간의 편차가 발생한 것뿐이죠.”

“시간의 편차?”

“조금 전에 제가 드린 말씀 기억하십니까? 유니콘 일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유 말입니다.”

“신계로 갔다고 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유니콘이 중간계와는 걸맞지 않는 종족이라는 판단을 내린 신들이 그들을 신계로 받아들였죠.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말입니다.”

“……네?”

마지막으로 이어진 말에 나는 한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시벨리우스 역시 선뜻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4천 년?”

“아산트라는 고대에 쓰던 대륙 명칭 중 하나죠. 4천 년 전, 지금의 인간들이 황금기라 부르는 시절 말입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제국들 중에서 가장 부강했던 국가의 이름이 바로 세이크 제국이고요.”

“그게 무슨……그럼 지금이 그때로부터 4천 년 이후라는 소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