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어? 벌써요?”
얼결에 배낭을 받아 든 나는 안을 열어 보곤 헛숨을 삼켰다. 당연히 보여야 할 평범한 내부 대신 새카만 구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집어넣으니 허공을 더듬는 것처럼 썰렁한 느낌이 닿았다. 마치 밑바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정말 아공간이랑 연결된 거야? 그 잠깐 사이에?’
보통 마법은 수식을 준비하는 과정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알고 있다. 특히 상위 마법일수록 주문을 외우고 진을 완성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실패하기 쉬웠다. 예외라면 라피스 같은 드래곤 정도나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마족도 상당히 수준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시험 삼아 배낭 안에 옷 한 벌을 넣어 봤다. 그러자 쑥 하고 들어간 옷더미가 그 자리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둠 속에 그대로 삼켜진 느낌이었다. 팔을 집어넣고 휘저어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당황한 내게 루카르엠은 손을 집어넣고 찾는 이미지를 떠올리라며 조언했다. 그대로 따르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정신을 집중하기 무섭게 저절로 옷이 잡히는 것이 아닌가!
“우와, 이거 진짜 신기하네요.”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무척이요. 고마워요, 루카르엠. 신세를 졌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슬슬 일행으로 받아주시는 것은…….”
“이야, 오늘 날씨가 정말 맑은데요? 아하하하!”
딴청을 피우자 루카르엠은 뭐가 그리 웃긴지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거렸다. 그래도 그런 모습이 예전만큼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속물인 것 같다. 그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흘리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겠습니다. 첫술부터 배부를 순 없으니까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하죠.”
“그 말은…… 계속 따라다닐 생각이라는 건가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태연하게 대답한 후 루카르엠은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정확히는 내가 착용한 서클렛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또 무슨 흉흉한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나는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온 건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서클렛 안에도 아공간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엥? 정말요?”
서클렛 안에 아공간이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마를 더듬었다. 하지만 보석 특유의 딱딱한 감촉 외에 특이한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여기에도 물건을 넣을 수 있어요?”
“아뇨, 용도가 다릅니다. 이 아공간은 조금 특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으니까요.”
“특별한 목적?”
물건을 수납하는 것 말고 아공간에 또 다른 용도가 있나? 내가 속으로 의아해하는 동안 루카르엠은 나른한 표정으로 서클렛을 매만졌다. 긴 손가락이 보석의 표면을 천천히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에 주홍빛의 마법진 같은 것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완전한 밀봉, 밀폐된 독실, 시간의 정지, 돌아올 수 없는 이방인, 세상과의 격리, 지독한 고독이라…… 흐음, 그다지 다정한 키워드는 아니군요.”
“그게 다 뭔데요?”
“아공간을 설계할 때 성립한 조건들입니다. 아마 죄인의 영원한 형벌을 위한 독방인 것 같네요.”
“그렇다는 건…….”
“한마디로 감옥이라는 겁니다.”
“……!”
싸아악, 머릿속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루카르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었다.
“게다가 이미 그 속에 자리를 차지한 존재가 있군요.”
“그, 그 말은…….”
“4천 년 전의 죄인이 그 보석 안에 잠들어 있다는 거지요.”
으아악! 못 들었어!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
나는 발작적으로 펄쩍 뛰며 후다닥 서클렛을 벗었다. 그동안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보석의 푸른빛이 모든 사태를 파악한 지금은 기괴하게만 느껴졌다.
장물로도 모자라 죄수를 봉인하는 감옥이라니! 심지어 이 안에 사람이 갇혀 있는 상태라니! 라피스 이 자식!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날 골탕 먹이려고 준 거 아니야? 이를 갈며 서클렛을 노려보고 있는 날 향해 루카르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어차피 보석은 그저 통로일 뿐입니다. 실제로 갇힌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짙은 암흑 속이죠. 그렇게 거부감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오래된 주술이라 그런지 허점이 많군요. 조심해서 다루셔야 할 겁니다. 충격을 받으면 봉인이 깨질 테니까요.”
“깨, 깨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그 안에 갇혀 있던 죄인이 해방되겠죠.”
“…….”
갑자기 매우 울고 싶어졌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손에 쥔 서클렛을 바라보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걸 다시 아무렇지 않게 착용하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걸 새로 마련하자니 나름대로 신경 써 준(지금으로썬 그 목적이 다분히 의심스럽지만) 라피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망설이는 기색을 읽었는지 루카르엠이 아량을 베풀듯 말했다.
“정 찝찝하시면 차라리 아예 봉인을 푸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그냥 평범한 서클렛이 될 텐데요.”
“봉인이 깨지면 죄수가 풀려난다면서요!”
“나오자마자 죽여 버리면 되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귀를 의심하고 싶을 만큼 잔인한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사나도 황당했는지 그대로 얼어 버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대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길래 그 안에 영원히 갇혀 있는 건지 말입니다.”
“그딴 거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유감스럽네요. 전 궁금한데 말이죠.”
탐욕스러운 시선이 서클렛을 노골적으로 주시한다. 점점 짙어지는 눈빛을 보니 이대로 두면 정말로 일을 치를 기세였다. 아공간에 집어넣을까 하다가 나는 곧 그만뒀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배낭을 가져가 마법을 걸 정도의 수준이라면 서클렛을 훔쳐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루카르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서클렛을 착용했다. 일단 착용하고 나면 라피스가 걸어둔 마법이 발동하기 때문에 타인이 강제로 빼앗지 못한다. 게다가 아무리 손이 빠른 루카르엠이라도 내게 직접 도전할 생각은 하지 못할 거란 계산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에이, 재밌을 것 같았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 날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거잖아요.”
“설마요. 그저 당황하시는 모습을 즐기는 겁니다.”
그게 그 말이거든?
황당해서 노려보자 루카르엠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시선은 여전히 서클렛에 고정된 상태였다. 돌아갈 때까지 그는 끝내 아쉬운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집착의 눈길엔 불길한 기운마저 느꼈다. 그래선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나는 계속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왠지 한동안은 꿈자리가 매우 사나울 것 같았다.
잠깐이나마 고맙다고 생각했던 거 전부 취소다. 역시 마족은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종족이었다.
* * *
남부의 숲은 전혀 개간되지 않은 온전한 밀림 지대였다. 스왈트 제국령에서 봤던 숲과는 기후도, 규모도, 동식물과 곤충의 종류까지 전부 완전히 달랐다. 이동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걸어가는 방향에 곧 길이 생기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걷는 게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약을 대비해 내가 앞에서 가고 이사나에겐 뒤를 따라오게 했다. 고국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도 다행히 그는 군말 없이 적응해나갔다. 확실히 인내심 하나만큼은 발군인 녀석이었다.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 느낌을 받은 건 숲에 들어선 지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일부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루카르엠의 기척과는 확연히 다른, 낯설고 수상한 기운이 우리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엘.”
어깨를 움츠린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 역시 뒤쫓는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정령술에 익숙해지면서 이사나는 날이 갈수록 주위를 읽는 눈이 밝아지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내딛던 걸음을 완전히 멈췄다. 동시에 풀벌레 소리로 진동하던 숲 안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 왜 몰래 따라오는 거람?”
“…….”
주위를 돌아보자 빼곡한 나무 군락이 펼쳐졌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환경만 그랬다. 나는 한숨을 뱉은 다음,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숨어 있어 봤자 이미 다 들켰거든요? 용건이 있으면 이만 나오시는 게 어때요? 저희가 갈 길이 좀 바빠서 오래 상대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높게 솟은 나무 기둥들 뒤에서 그림자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수상한 사람들 아니랄까 봐,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검은색 복장에 얼굴엔 복면까지 쓰고 있었다.
순식간에 둥근 포위망이 형성됐다. 얼추 가볍게 센 숫자만 스무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얼굴을 살짝 찌푸렸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마 이 무리를 지휘하는 자인 듯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복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난 그를 이곳에서 처음 본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시죠?”
“그대가 형벌의 교황이 맞는가?”
“…….”
불쑥 건네진 질문에 나는 속으로 살짝 숨을 삼켰다. 설마 교황에 대한 언급을 듣게 될 줄이야. 배 안에서 정체를 밝힐 때 어느 정도 소란을 각오하긴 했다. 누군가는 소문을 퍼트릴 거란 것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상황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교황이라고 추격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당황한 내 모습을 보며 무슨 판단을 했는지 남자가 보란 듯이 큰 동작으로 자신의 망토 자락을 들쳤다. 그 사이에서 드러난 붉은색의 휘장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저것과 똑같은 모양의 휘장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클모어 공작가의 저택 앞에서 스쳐봤던 마신관. 그가 두르고 있던 바로 그 휘장이 틀림없었다.
흘낏 이사나를 보니 그 역시 알아본 듯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 반응을 통해 나는 더더욱 내 판단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마신의 교단에서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죠?”
“그건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무뚝뚝한 대꾸에 나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마신의 교단에서 날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형벌의 교단을 압박할 생각이라면 나만큼 완벽한 인질은 없을 테니까.
“이런 시기에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여행이라니. 참 태평하신 교황님이시군. 아니면 형벌의 교단에선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비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들은 이사나를 그저 일개 수행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마계로 돌아간 데르온이 어디까지 보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사나의 변한 외형까진 알려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우리와 함께 가 줘야겠다.”
“싫다면요?”
“윗선에선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고 했다.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듯 포위하고 있는 자들의 기세가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나는 살짝 혀를 차며 주위를 경계했다. 상대 쪽에서 나를 교황이라고 알고 있는 이상 그들 앞에서 정령의 힘을 쓸 순 없었다. 문제는 그것 외에는 달리 방어할 방법이 없단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펑펑 남는 시간에 검술이라도 배워둘걸. 정령계에서 하릴없이 소환만 기다리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어차피 그 정도 기간으로는 수준급의 검술을 익힐 순 없었겠지만.
‘으음, 어떡하지. 안됐지만 전부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는 게 나을까?’
내키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선 다른 수단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지그시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육체는 70프로가 수분으로 이뤄져 있고, 물은 전부 나의 영역이다. 그것을 이용하면 동시에 심장을 멎게 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배에 있을 때도 굳이 신벌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내 선에서 적당히 꾸밀 수 있었던 일이었잖아? 뒤늦게 자각한 사실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뤼엔이 바로 대응해 주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즉시 실행을…….’
“으아아아아! 내 눈! 내 눈이!”
“……!”
그 순간, 언젠가 들었던 비명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흠칫 놀라 집중하던 기운을 흐트러트렸다. 잠깐 사이 등허리에 식은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엘?”
“어? 어, 아니……아무것도 아냐.”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사나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슬쩍 소매 안으로 집어넣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절한 비명과 끔찍하게 흘러내리던 붉은 피가 눈에 선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때의 광경이 트라우마가 됐던 모양이다.
이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트로웰과 함께 다닐 땐 그보다 잔인한 장면도 얼마든지 봤었다. 적어도 샴페인 용병단은 몬스터를 깨끗하게 도륙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내가 직접 몬스터를 죽인 적도 있다. 그런데 고작 대상이 인간으로 바뀌었단 이유만으로 벌벌 떨다니, 말도 안 되는 이중성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이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