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페리스가 진과의 계약에 성공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명실공히 두 속성을 상급까지 마스터한 정령사가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최초였고, 드래곤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도 그다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진이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지네요.”
가벼운 감탄에 진은 두 눈을 샐쭉하게 뜨고 대꾸했다.
―변하는 게 아냐. 난 이게 본신이라니까? 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하하, 죄송합니다. 워낙 동물형에 익숙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정령이라면 당연히 동물의 모습이 본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멍청하긴. 인간 주제에 정령을 판단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런 한심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발전을 못 하는 거야.
“그러네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페리스가 순순히 사과를 건네자 진은 김샌 표정을 지었다. 상급 정령 중에서 가장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한 진은 분쟁을 매우 즐기지만 상대 쪽이 부드럽게 나오면 오히려 전의를 상실하는 편이었다.
“진,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때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친위대의 대장 케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차분함을 가장한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눈빛은 조바심이 가득했다. 채근하고 싶은 것을 자제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진은 그를 골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끌기엔 아직 페리스의 마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계약자의 얼굴을 모른 척하기엔 아무리 짓궂은 그라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짐작한 그대로야. 꽤 멀리까지 다녀왔는데 병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아마 전부 철수한 것 같아.
“벽보는?”
―그것도 수거했어.
벽보를 수거한다는 건 수배를 중단한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감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들이 추격을 피해 숨어 지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몇 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수도에 잠입한 지는 이미 오래. 신분을 위장하며 사는 것은 이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제국의 상황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적어도 수도 안쪽은 언제나 평온했다.
대공이 황성을 장악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도의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 시민에게 매우 친절했고,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고작 한 발자국 차이로 인근 지역의 백성들은 관료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수도만은 완벽한 태평성대였다.
대공이 일부러 타지의 소식을 흩트렸기에, 수도의 백성들은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대공은 좋은 지배자였고 훌륭한 군주였다. 반대로 황제인 이사나에 대한 인식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미쳐 버린 가련한 존재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최근엔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지방 쪽의 열악한 상황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하나둘씩 깨어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삼 일의 기적에 대한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는 황제에 대한 여론도 한층 호의적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친위대들의 노고가 빛을 발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들려온 이상한 소문만 아니었다면.
케이는 최근 수도에서 들썩인 소문들을 다시금 곱씹었다. 지금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화제는 단연 대공의 충실한 오른팔인 카리브디스 공작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악한 드래곤의 출몰, 그에 맞선 천재 검사가 처절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뒀다는 화려한 결말. 고서(古書)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카리브디스 공작이란 걸 알았을 때, 친위대 기사들은 모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항상 영웅의 탄생을 바라는 법. 이 황당무계한 소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급물살을 타고 퍼져 나가며 대공의 이름에 힘을 실었다. 그의 행보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마저 흠모의 서신을 보낸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러던 중 카리브디스 공작이 황성에 귀환하자 수도 전체는 완벽한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불길한 건 그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위대들을 쫓던 추격의 발길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진의 정찰 결과를 들으니 수배조차 전부 중단한 듯했다.
일반적으로 갑자기 수배를 중단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잡을 수 없다고 판단되거나, 이미 잡혀서 더 이상 수배할 필요가 없을 때.
후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카리브디스 공작이 돌아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지식한 성정으로 알려진 그는 임무를 중간에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돌아온 이후로는 마냥 수도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대공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거나, 자신의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낸다고 했다. 그저 일시적인 귀환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 클모어로 향한 황제에겐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친위대들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다못해 클모어 공국의 현지 분위기만이라도 파악하고 싶었지만,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여기서 알아보려면 최소 몇 주의 기간은 필요했다. 그것은 페리스의 정령술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정령, 특히 바람의 정령은 매우 빠르기에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지만 계약자의 곁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는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자연체의 정령에게 일을 맡기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인간사의 개입은 계약자로부터 직접 마나를 나눠 받은 상태일 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정령왕밖에 없었다.
“황성 안쪽의 상황만이라도 자세히 살필 순 없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해. 황성은 고위 마법사들이 설치한 방어 마법진이 있어. 정문을 통과하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 바로 감지할 거야.
“그렇다면 공작의 저택은…….”
―그건 더 힘들어.
“예?”
―카리브디스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 정령의 힘을 갖고 있어. 그것도 나랑 같은 힘이야.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자신도 모르게 적의를 드러낼 뻔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불쾌한 감각에 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동시에 페리스와 친위대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진이 굳이 자신과 같은 힘이라고 표현한다는 건 상대 역시 상급 정령이란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소드 마스터인 공작이 정령의 힘을…….”
“설마 그가 정령사가 됐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거랑은 좀 달라. 정령의 힘은 가졌지만 일부분뿐이야. 그러나 그 일부는 우리의 것보다 거대하고 위험해.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 어쨌든 나는 물론이고 시큐엘 역시 그 녀석 몰래 접근하는 건 힘들 것 같아. 설령 가능하더라도 난 ‘그것’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그것?”
―그건 우리 바람들에겐 아주 슬픈 기억이야. 그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아.
단호한 대답에 친위대들은 더 이상 질문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카리브디스가 가진 ‘무언가’를 진이 심하게 꺼린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이미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만으로 공작은 대공파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견제해야 할 존재였다. 그런 그가 상급 정령조차 거북해하는 힘까지 손에 넣다니. 친위대의 입장에선 매우 좋지 않은 전조였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물의 왕께서 함께하시는 이상 폐하께선 안전하실 겁니다. 대공이 추격을 포기한 건 다른 이유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층 침울해진 기사들을 위로한 건 페리스였다. 그 말에 케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면전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보는 건가?”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폐하께서 클모어 공작을 만나셨을 테니까요.”
“흠, 확실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
“혹은 저희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분위기가 급속도로 굳어졌다. 저항군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한 인원이지만, 그들은 매번 대공의 추격을 깨끗이 따돌려 왔다. 지금쯤 바짝 약이 올랐을 그의 입장에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시기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대적할 시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대장?”
동료들의 시선이 닿자 케이는 자신의 거친 얼굴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친위대들은 모두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탁자에 있던 촛대들이 전부 꺼지고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들었다. 케이는 급히 후드를 눌러쓴 다음, 문 앞쪽에 바짝 붙어 섰다. 미세하게 벌어진 틈새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케이는 문고리를 잡아당겨 아주 조금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접니다.”
케이는 바깥에 서 있는 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오래전부터 그와 거래하고 있는 정보 길드의 사람이었다. 가벼운 정찰만으로는 알아 올 수 없는 것들도 많았기에 케이는 주기적으로 지하 세계로부터 정보를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의뢰를 하지 않았는데 먼저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할 것?”
반문하기 무섭게 상대가 문틈 사이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게 밀봉한 주머니였다.
“그럼 전 이만.”
케이가 그것을 받아 들자 기척이 빠르게 사라졌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케이는 주머니 안을 열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작은 펜던트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즉시 케이는 얼굴을 굳혔다. 펜던트에 새겨진 문양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건 클모어 가문의 문장 아닙니까?”
가까이 다가온 페리스가 펜던트를 확인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서둘러 뒷면을 넘겨보았다. 매끄러운 표면 위에 바늘로 새긴 듯 작은 글자가 파여 있었다.
‘별의 밤이 백수정에 깃들 때.
잠들지 않는 길고양이의 거리에서.’
시어(詩語) 같은 문장은 정보 상인들 사이에서 주로 쓰이는 은어였다. 케이는 슬쩍 창가로 다가가 천개를 들췄다. 멀찍이 떨어진 한 식당에서, 종업원 차림을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알폰프 제국 출신이라는 여인은 이곳 사람들에 비해 다소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즈문’. 그들 나라의 언어로 ‘별’이란 뜻이었다.
‘별의 밤.’
여인은 전등에 초를 넣기 시작했다. 항상 이 시간만 되면 규칙적으로 해 오는 일이었다. 알폰프 제국에선 초를 ‘밤’이라고 불렀다. 밝혀지기 전에는 어둠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의미였다. 오래전 알폰프에서 건너온 사내가 잡화점에서 ‘밤을 팔아 달라’고 말했다가, 창부를 사러 온 것으로 오해한 여주인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났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여인이 초에 붉을 밝히자 둥근 전등이 하얗게 빛났다. 멀찍이서 보면 꼭 백수정처럼 보였다.
케이는 펜던트를 자루에 넣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품 안에 갈무리했다. 옆에서 동료들이 초조한 시선을 보냈다.
“갈 거야, 대장?”
“위험할지 몰라.”
“알아. 하지만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필요는 있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다급히 내뱉은 페리스의 말에 케이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적을수록 좋지만, 한 명보다는 두 명인 편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엔 좋을 터였다. 더구나 페리스라면 일당백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존재이니 동행인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다.”
문을 열고 나서기 전, 그는 걱정을 담아 응시하는 시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기만 했다.
* * *
‘잠들지 않는 거리’는 수도 외곽에서 약간 떨어진 빈민가의 오래된 술집 이름이었다. 안주라고는 늘 차가운 소세지 하나, 음료는 싸구려 맥주밖에 팔지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 덕분에 자리는 항상 만석이었다.
“이곳입니까?”
페리스의 질문에 케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밀어닥쳤다. 가게 안은 문 앞부터 안쪽까지 거나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슬슬 날이 저물어가는 시각이었지만, 페리스는 오후부터 이런 형태였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증거로 테이블마다 가져다 둔 술독이 모두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였다.
케이는 그들 중에서 상인의 복장을 한 사람을 찾았다. 상인의 직업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흔히 길고양이라고 칭했다. 자유롭게 영역을 옮겨 다니며 마음속에 주인을 정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예상대로 약간 구석진 곳에 한 명의 상인이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하게 퍼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단정하게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케이와 페리스는 아무 말 없이 원래 동행이었던 것처럼 그 옆에 가서 착석했다. 상인 역시 놀라지 않고 친인을 반기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클리프 상단의 엘드란이라고 합니다.”
상단의 이름은 익숙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았다. 케이는 속으로 클리프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물었다.
“내가 거래하는 정보 길드는 어떻게 알았지?”
이 제국엔 수많은 정보 길드가 있고, 그중에서 케이가 이용하는 곳은 단 하나였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의뢰를 맡긴 것이라 확신했다. 만약 그 길드가 아니었다면 자신을 찾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여러 군데에 의뢰를 맡겼다면 그 과정에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자 이미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엘드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희 총수님께선 조금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죠.”
“예언의 힘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조금 비슷합니다.”
“오히려 더 수상하군.”
“믿어 주십시오. 이래 봬도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공간 이동 주문서까지 사용해서 온 겁니다.”
“……용건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케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경계를 푼 건 아니지만, 당장은 그들의 목적이 궁금했다. 일부러 클모어 공작가문의 문장을 보내온다는 건 어느 정도는 그와 관계되어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공작이나 황제 쪽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물론 상단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 순간 나직하게 이어진 말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