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45화 (145/608)

제145화

“그렇게 싫은 표정 하지 마. 그 대신 연회가 끝나면 한동안 휴가를 주지. 별장이든 어디든 가서 푹 쉬고 오도록 해. 그동안의 여독을 풀 겸 말이지.”

“하지만 그건…….”

“왜, 마음에 들지 않나?”

“아직 남은 임무가 있습니다.”

“임무?”

“황제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무슨 얘긴지 알겠다는 듯 대공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말해 주는 걸 잊었군. 계획이 바뀌었다. 이 시간 이후로 황제의 추격을 전부 중단한다.”

“중단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아이가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것 같다.”

“……!”

충격적인 말에 카리브디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황제가 정령왕을 소환하다니.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전세가 단숨에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본 대공이 매우 위험한 얼굴로 웃었다.

“어릴 때부터 매우 운이 좋은 아이었지.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내가 어리석었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황제가 삼 일에 한 번씩 비를 내린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바로 눈치챘어야 했는데.”

“전하의 실수가 아닙니다. 황제에게 그런 자질이 있다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맞아. 대개 정령사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존재들이지. 헌데 그 아이는 황궁에 있을 때 한 번도 그런 진단을 받은 적이 없었어. 그런 아이가 대체 어떻게 정령왕을 소환한 걸까? 게다가 정령왕 중에서도 하필이면 물의 정령왕이라…… 참으로 공교로운 인연이란 말이지.”

카리브디스는 묵묵히 그 말에 동감했다. 선황이 10년 동안 계속된 가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황제가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지도 모른다. 황제 자신에겐 그 무엇보다 가장 잔인한 기적이 아니었을까?

여리고 순하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자 카리브디스는 잠시간 마음이 불편해졌다. 물론 그 감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적을 동정해서야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 제국에서 황제가 될 자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사람. 그의 주군, 유카르테 대공뿐. 그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사실을 새삼 가슴에 다시 되새겼다.

대공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창가 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후, 운명의 여신이 내게 반격을 걸어오는 건가. 그건 그것대로 재밌게 됐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저 혼잣말이다.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추격은 의미가 없다. 흔적이 드러날 리도 없겠지만, 소규모로 편성된 추격대만으로 사살은 더더욱 불가능할 테지. 문제는 그 아이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쯤이면 클모어 공국에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에 심어둔 간자의 말로는 아직 아무런 낌새도 없다는군. 하기야 만났다 해도 감격의 상봉은 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게 무슨…….”

“장난을 조금 쳐뒀거든.”

빙긋 웃는 얼굴을 보며 카리브디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대공이 장난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예전부터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몇 번 간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끝내 고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 이런 건 미리 말해 주시지 않으면 제가 정황을 파악하는 게 어렵습니다. 전부터 꾸준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딱딱하긴. 그냥 상황을 약간 재밌게 만든 것뿐이야. 아, 물론 이사나 그 아이의 입장에선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공작이 칩거를 풀지 않는 것도 그와 관계있는 건…….”

“글쎄, 어떨 것 같은가?”

“……전하.”

“어쨌거나 난처하게 됐어. 기껏 먹음직스러운 판을 짜놨는데 이건 처음부터 너무 잠잠하단 말이지.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설마 그 아이가 공작을 찾아 가지 않은 걸까? 제아무리 정령왕이 있다 해도 아무런 정치적 지지기반 없이 나를 칠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전쟁이 무서워 숨은 것 아닙니까?”

어차피 대공은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항의하기를 체념한 카리브디스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대공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무서워해? 그 아이가? 그대는 아직 이사나를 잘 모르는군.”

“…….”

“선황이 왜 순순히 처형을 당한 거라고 생각하나? 정말 백성들을 생각해서? 천만에. 대를 이을 태자인 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지. 유약한 인상 때문인지 다들 착각하던데 말이야. 선황이 처형당할 때 이사나 그 아이가 어땠는 줄 아나? 그 여리고 겁 많던 아이가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제 아비가 죽는 광경을 전부 똑바로 지켜보더군.”

“……!”

“그때 그 아이가 날 노려보던 증오의 눈빛을 난 지금도 잊지 못해. 어려도 사자의 새끼는 사자라는 거지. 그런 아이가 전쟁을 두려워한다? 정령왕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함께하는 상황에서?”

“……시정하겠습니다. 제 착오인 것 같군요.”

“착오이다마다. 제 손에 아무것도 없을 때야 체념했겠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그 아이는 필시 전면전을 준비하려 들 거다.”

확신에 차서 중얼거리는 대공의 두 눈은 광기에 찬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지. 군사를 집결시켜야겠다. 최대한 빠르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아직 시기가…….”

“내가 정하는 날이 곧 시기다.”

“……삼 일의 기적 이후로 여론이 황제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섰습니다. 백성들이 반발할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여론이란 건 만들어 내기 나름이다. 갈대 같은 백성들의 마음을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건 대공에게 식은 죽 먹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심드렁한 대꾸에 카리브디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두겠습니다. 황제가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건 확실한 겁니까?”

“그렇다.”

“황제가 아직 밝히지 않은 사실을 전하께서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내가 그걸 그대에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나?”

“…….”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리브디스는 기분이 가라앉는 걸 막지 못했다. 본래부터 대공은 솔직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점점 늘고 있었다. 카리브디스는 가만히 대공을 응시했다. 살짝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의 손등 위로 짙게 새겨진 마신의 문양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카리브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전부터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뭐지?”

“일부 병사들이 백성들의 아이를 납치해 전하께 진상한다고 들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런, 그런 짓을 하는 자가 있단 말인가? 난 처음 듣는 말이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태연한 답변이었다. 카리브디스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대공이 전국 각지에서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건 10년 전부터였다. 그만을 따르는 특수한 부대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카리브디스는 그 계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주군의 뜻이 워낙 강경한 데다 그 자신 또한 어느 정도는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 모아오는 아이들은 대다수가 노예거나 가난한 부모에게서 사들이는 거라는 대공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세상에 나가 접한 소문들은 그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카리브디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전하께 진상된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에서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지.”

“아직 완성이 된 자가 한 명도 없는 겁니까?”

“훈련이 너무 고되어 중간에 죽어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라더군. 실로 안타까운 일이야.”

“……사실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설마 그 술법을 쓰시는 건 아니겠지요.”

“술법? 무슨 얘기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 그대가 날 의심하는 건가?”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카리브디스는 침울하게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공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비틀어진 틈이 점점 커져서 거대한 구멍이 되어 가고 있건만 자신은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리브디스는 탄식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과의 전투 관련 보고 중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봤는데 말이야.”

“하문하십시오.”

“그대가 검을 들자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었다고 하더군. 다들 의식을 잃어 이후의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던데, 이런 건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게 좋겠지. 혹시 뭔가 특별한 힘이라도 얻은 건가?”

“…….”

말해도 될까.

대공이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정령검 블레스터,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분명했다. 카리브디스는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를 문질렀다. 예전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전부 보고했을 것이다. 신임하는 수하가 새 힘을 얻은 건 대공에게도 매우 기꺼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만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앞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건 드래곤의 힘이었습니다.”

“정말인가?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그대에게서 바람이 불었다고 하던데.”

“그자가 잘못 본 겁니다.”

“흐응, 그렇군.”

단호한 대답에 대공은 가늘게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 초의 시간이 마치 수년이라도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뱀 같은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를 압박하던 기운도 흐트러졌다. 카리브디스는 경직된 얼굴로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하명하실 것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정중히 경례를 마친 뒤 카리브디스는 몸을 돌렸다. 그가 닫힌 문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파이.”

움찔.

돌연 들려온 음성에 카리브디스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대공이 부른 이름은 이제는 쓰지 않게 된, 유소년 시절 그의 애칭이었다.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와는 다르게 대공은 매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나와 한 약속을 기억하나?”

마주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카리브디스는 속으로 숨을 골랐다. 대공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기억합니다.”

“다행이로군.”

원하는 대답을 얻은 대공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카리브디스의 앞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카리브디스는 그 자리에서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코앞까지 가까워진 대공이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앞으로도 잊지 마라. 그대가 내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 * *

피이이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높은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두 날개를 활짝 핀 거대한 독수리가 공중을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독수리의 색이 티끌 하나 없이 하얗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갈수록 점점 투명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몇 차례 공중을 회전하던 독수리가 빠르게 하강을 시도했다. 투명한 두 발이 내려앉은 곳은 누군가가 창밖으로 내민 팔 위였다. 독수리를 받아 든 사람은 창문을 닫고 빠르게 천개를 내렸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목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오오, 왔다, 왔어!”

“소식은?”

웅성거린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갈고리발톱을 한껏 움켜쥔 독수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것이다.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나 참, 나 같은 고급 전력을 고작 이딴 일에 쓰지 마.

묵직한 목소리에 몰려들던 사람들이 찔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것을 본 독수리가 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난 이래 봬도 매우 강한 존재야. 전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적들이 벌벌 떠는 존재란 말이야! 고작 상대 진영을 염탐하고 소식이나 주워 담아 오는 데 쓰라고 있는 능력이 아니란 말이야! 이런 걸 가지고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전력 낭비라고 하는 거야! 알았어? 전력 낭비라고!

쉬지도 않고 꽥꽥 울려 퍼지는 소리에 사람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번 정찰을 맡길 때마다 있는 일이다 보니 처음엔 두려웠던 잔소리도 이젠 연례행사인 양 무덤덤하게 흘려듣게 됐다. 독수리의 입장에선 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내 말 들었어, 페리스?

괘씸하다는 듯 부릅뜬 시선이 자신이 올라탄 팔의 주인을 향했다. 독수리가 보내는 힐난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페리스는 난처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진. 아시다시피 수도 쪽은 고위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어서요. 진이 아니면 맡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급 정령이라면 시큐엘도 있잖아!

“하지만 바람을 타는 일은 당신을 따라올 자가 없죠.”

―뭐, 그거야 그렇지만.

치켜세우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불쾌한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잠시 후 팔에서 훌쩍 뛰어내린 독수리의 모습이 긴 백발을 지닌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체적으로 투명한 느낌 때문에 결코 인간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신비로움이 한층 가미된 모습이었다.

바람의 상급 정령 ‘진.’

벌써 몇 번째 본 광경이지만 친위대의 기사들은 모두 탄성을 흘렸다. 볼 때마다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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