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나와 이사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만히 고심하고 있던 카이테인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지금까지 병을 보인 신전이 몇 군데인지, 그 신전의 이름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응? 아, 합쳐서 전부 네 곳이었어. 정화의 신전과 치유의 신전, 그리고 의술의 신전이랑 평화의 신전이었나?”
“형벌의 신전엔 가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으응.”
“그렇군요. 그럼 아직 마속성의 치유력은 시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이네요.”
“무슨 차이가 있어요?”
어차피 치료하는 건 둘 다 매한가지 아닌가? 의아해져서 묻자 카이테인이 나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것 같은 인자한 얼굴이었다.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방식?”
“가령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에 따라 누군가는 달래기도 하고, 누군가는 윽박지르기도 하잖습니까? 치유하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천의 속성이 병마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도록 자체적인 회복을 돕는 구조라면, 마속성은 강제로 쫓아내죠. 사실 그래서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도리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헤에, 그렇구나.”
독초를 잘 쓰면 치료 효과를 내는 것과 비슷한 건가? 생각해 보니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마속성은 타고난 성질 자체가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니까. 똑같은 치유력이라도 온순한 천의 속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게 있는 치유력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테인이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에게서 이어진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지요. 제가 엔딜 군과 함께 가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카이 씨?”
엔딜과 가겠다는 건 결국 우리와 헤어지겠다는 뜻이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답했다.
“두 분이 다녀오시는 동안 제가 먼저 그곳에 가서 환자분을 돌보고 있겠습니다. 천의 속성의 신성력이 일시 호전을 보였다면, 마속성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완치까지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희박한 확률이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설령 안 되더라도 엘 님이 오실 때까지 시간을 버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만. 어떻습니까, 엔딜?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으응? 나, 나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긴 한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는지 엔딜은 몹시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그 말에 카이테인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보시다시피 괜찮다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카이 씨, 그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어차피 저는 마검을 찾는 일에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좀 더 효율적인 부분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
정중한 요청에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망설여지긴 했지만 사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카이테인이 가 준다면 그쪽에 관한 일은 한시름 덜어도 된다. 내게는 나쁠 것이 없다 못해 고맙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결국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카이 씨. 염치없지만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사과하지 마십시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게다가 저 역시 환자분의 병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홀로 여행 중이었다 해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그는 웃었지만, 그게 날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른이라고 해야 할까. 엘뤼엔의 사제가 이렇게까지 성격이 좋을 수 있다니. 가끔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자, 이거 받으세요.”
리튼 항에서 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로 갈 길이 바쁜 처지였기에 우리는 항구에서 바로 헤어지기로 했다. 떠나는 길에 앞서 나는 카이테인에게 자루 하나를 내밀었다. 정령계에서 가져온 보석 꽃들과 금덩어리들을 담은 자루였다. 의아한 얼굴로 받아 든 카이테인은 자루 안을 살펴보고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에, 엘 님?”
“제가 갈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요. 그 사이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해 봤는데,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들밖에 없더라구요. 필요하실 때 쓰세요.”
“그런……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경비도 충분합니다.”
“카이 씨의 경비는 신전에서 받은 공금이잖아요. 그건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시고 이것도 받아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게다가 엘 님도 쓰셔야 할 텐데…….”
“전 그런 거 많아요. 이래 봬도 정령왕인걸요.”
생글거리며 말하자 카이테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 님.”
“뭘요. 이 정도는 동료로서 당연한 일이죠. 엔딜, 카이 씨를 잘 부탁해.”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내는 동안 불편한 일 없게 제가 잘할게요.”
당부의 말에 엔딜은 활기찬 얼굴만큼이나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동생에게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는 몹시 들뜬 기색이었다. 배를 타고 있을 때보다 정작 항구에 도착한 지금이 더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전혀 내색하지 않더니, 사실은 혼자 있을 여동생이 많이 걱정되고 그리웠던 모양이다.
왕복 시간을 계산하면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놔두는 셈이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 먼 길을 가시겠군요. 사막의 몬스터는 매우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지킬 테니까요.”
“부디 두 분의 여정에 엘뤼엔 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카이 씨도요.”
돌아가는 배는 며칠 후에나 있을 예정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마을에서 머물며 필요한 약초와 비품들을 구비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제 한동안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헤어짐이 많이 아쉬웠다.
그때 문득 한 광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이었다. 순간 추격대인가 싶어 경계했던 나는 이곳이 타지(他地)임을 상기하고 다시 긴장을 풀었다. 아마 이 지역의 치안대인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이며, 장비들도 전부 낯선 것들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다른 나라로 건너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들은 창살이 있는 수레에 죄수로 보이는 남자를 싣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밧줄에 묶여 있는 남자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무스였던 것이다.
“감옥으로 이송되는 중인가 봐.”
이사나도 현장을 발견했는지 옆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스가 창살 안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며칠 새 그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다. 이미 멀어 버린 눈뿐만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인 걸 보면, 그 사이 또 폭행을 당한 모양이다. 동정의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처참한 모습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비쩍 마른 얼굴 가득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니 아마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건 전생의 일까지 통틀어 그가 처음이었다. 엘뤼엔이 도와주긴 했지만 내가 원해서 벌어진 일이니 내가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앞에서 흩뿌려지던 피, 처절하게 울려 퍼지던 비명 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아마 나만 없었다면 그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나로 인해 그의 운명이 처참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겪은 일 중에선 가장 강렬한 경험인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자, 그럼 다시 가 볼까?”
웃으며 돌아서자 이사나 역시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굉장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곧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어?”
이사나 역시 내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네. 전혀 몰랐어. 이게 얼마만이지? 알렉들과 헤어진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한 사람이 빠진 것뿐인데 뭔가 묘하게 허전하네.”
“나도 그래.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것에 익숙해졌나 봐.”
“생각해 보면 원래는 우리 둘이 다니는 게 당연한 건데 말이지.”
언제 이렇게 많은 관계를 맺었던 걸까. 분명 함께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다시 원점이 됐다. 방긋 웃는 이사나를 보면서 나는 새삼 인연이란 게 얼마나 짧은 것인지 실감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무수히 엮어가는 인연들 속에서 나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몇이나 될까? 언젠간 이사나도 그 수많은 인연들 속의 하나로 파묻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서늘했다.
“엘? 왜 그래?”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사나가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멍해진 내 모습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잠시간 그 모습을 응시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렴 어때.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걸.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분명한 건 나는 그와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할 거라는 점이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많은 기억들을 쌓아가야지. 그것은 좋은 추억이 되어 미래의 날 지탱해 줄 것이다. 물론 아직은 닿을 리 없는 머나먼 이후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 * *
저벅저벅.
길게 이어진 복도, 넓게 펼쳐진 대리석 바닥에 묵직한 군화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고개를 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러 물들인 듯 짙은 노란빛의 금발,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보라색의 눈동자.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남자는 대륙의 젊은 천재 검사―파이런 드 카리브디스였다.
검은색 정복 위에 걸친 붉은 망토가 그가 움직이는 동작에 맞춰 힘차게 펄럭거렸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모여 있던 무리들이 양쪽으로 우르르 갈라지는 진풍경이 속출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사람이 많은 곳에선 당연히 거치는 관례가 된 지 오래였다. 오랜만의 입궁이라 그런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한 것 같았지만, 카리브디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사람들을 지나쳤다.
잠시 후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문 앞이었다.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카리브디스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경례했다.
“전하, 카리브디스 공이 드셨습니다.”
“들라 해라.”
이윽고 짧은 답문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카리브디스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드는 창가 쪽, 거대한 테이블 위에 앉은 대공은 한창 집무에 열중해 있는 상태였다. 카리브디스는 묵묵히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대공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훑어보고 있던 서류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말했다.
“드래곤이 나타나 소동을 벌였다지?”
“…….”
“꽤나 화려하게 건물을 날려먹었더군. 사망자에 부상자 하며, 피해 액수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대답이었다. 대공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카리브디스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치고 잡혀온 신하를 보는 사람답지 않게,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 실제로 본 드래곤은 어떻던가? 소문처럼 강하고 무서운 존재던가?”
“강하긴 했습니다.”
“호오, 무섭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전투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두려움을 인식할 사이도 없었다? 그대다운 대답이군.”
밝은 얼굴만큼이나 목소리 역시 경쾌했다. 대공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감정을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번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리브디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화내지 않으십니까?”
“화를 내? 내가? 왜?”
“…….”
대공의 반문에 카리브디스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무뚝뚝한 그가 곤란할 때 취하는 반응이었다. 대공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이런. 여전히 소문에 둔감한 남자로군. 지금 그대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라는 건 알고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고 있다면 말해 주지. 지금 수도엔 그대가 드래곤과 싸워 이겼다는 소문이 파다히 퍼져 있는 상태다. 수도의 백성들이 모두 그대를 찬양하고 있는 중이지.”
오늘따라 유난히 시선이 따갑던 게 그 때문이었나. 카리브디스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대공이 그 모습을 즐기듯 내리훑었다.
“수하가 세운 공적은 곧 나의 공적. 나로선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일이야.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송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드래곤을 물리친 영웅을 위한 연회를 베풀 생각인데, 그대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군. 주인공이니 당연히 참석해야지?”
“그건…… 알겠습니다.”
이미 통보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차마 싫다는 대답을 하지 못한 카리브디스는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대공에겐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하기로 결정한 일을 거부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카리브디스는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키면서 깨달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