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마족이니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고작해야 작은 차원에 있는 제국 하나인걸요. 그거 하나 사라진다고 마신의 권위가 줄어들진 않습니다.”
“그래도 전쟁은 안 돼요. 엘뤼엔의 입장이 곤란해지잖아요. 그러다 잘못되면 마신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고.”
“호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나야 어차피 유희일 뿐이고, 여기선 정체를 감추고 지내면 된다지만 엘뤼엔은 그렇지 않잖아요. 안 그래도 성격이 나쁜데 적까지 만들면 어떡해요.”
“성격이 나쁘다, 라…… 그렇게 말하셔도 됩니까?”
“사실인데요, 뭐. 어차피 엘뤼엔은 이런 일도 다 예상하고 있을걸요? 워낙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신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요.”
“그러면 딱히 걱정하실 것도 없는 것 아닌가요?”
“아니죠. 엘뤼엔이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고 내가 하는 일이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난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실컷 도움 받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 괜찮을까요? 설마 이미 마신과 싸우고 있는 중인 건 아니겠죠?”
루카르엠은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색하고 싶은 표정과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표정이 우위를 서로 점하기 위해 싸우다 끝내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흩어진 느낌이랄까? 나로서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왜, 왜요?”
“아뇨, 뭐랄까.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굉장히 귀여운 분이시네요.”
“……뭐라구요?”
“하하, 칭찬입니다, 칭찬. 일단 제 소견을 말씀드리죠. 마신과 형벌의 신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별로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원만했던 적이 있냐고 묻는 게 더 빠르실 것 같거든요.”
“그게 무슨…….”
“신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마신과 형벌의 신이 함께한 자리는 결코 동석하지 말라. 중간에 있는 자는 반드시 파국을 맞이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이가 나빠요?”
“원래 부끄럼이 많은 성격일수록 애정을 확인하는 과정이 치열한 법이죠.”
대체 그게 뭔 소린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썹을 찡그리자 루카르엠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어쨌거나 이쪽의 일은 두 신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새삼 분쟁을 겪기엔 이미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거든요. ……좀 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특별한 일? 그게 뭔데요?”
“그걸 알면 제가 신이지, 마족이겠습니까?”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어진 답변에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자 루카르엠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화사한 미소였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재밌을 것 같긴 하군요. 형벌의 신 엘뤼엔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해서 늘 얼음 같지만, 크게 분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죠. 그가 이성을 잃고 화내는 모습, 기대되지 않습니까?”
“……제발 참아주세요. 전 그런 거 보고 싶지 않거든요?”
“이런, 낭만을 모르시는 분이시군요.”
그딴 낭만 알고 싶지도 않아!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마족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누가 어둠의 자식 아니랄까 봐 취향도 꼭 그같이 음습한 것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 눈빛이 사나워져서인지 그는 이내 두 손을 들며 항복 표시를 해 보였다.
“뭐,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앞으로도 즐길 시간은 많으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마력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에 남은 것은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앞으로 당신의 행보를 기대하겠습니다, 엘퀴네스 님. 부디 저를 계속 즐겁게 해 주시길.”
……정말 끝까지 밉살맞은 마족이었다.
* * *
이틀이 지나자 드넓은 바다만 펼쳐지던 전방에 드디어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배의 중간 정착지이자, 엔딜의 목적지인 리튼 항이었다. 부우우, 입항을 알리는 무거운 고동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선체가 부두 쪽으로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갑판 위는 닻을 내리기 위한 준비로 연신 분주한 상태였다.
“저기 봐. 드디어 도착했어, 엘.”
“응.”
한껏 상기된 이사나의 말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항구 마을의 풍경을 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갑갑한 배 안에서 탈출할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선실 안에서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라고 밝힌 것이 원인이 되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일부 승객들 중에서는 내게 잘 보이려고 선물을 보내는 사람까지 있었다(물론 받지 않고 죄다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일정엔 몇 가지 크고 작은 변동이 생겼다. 먼저 이 배의 최종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서 우리들 역시 이곳에서 하선하기로 했다. 어차피 국경을 넘은 김에 여기서 다음 직항까지는 육로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며칠 돌아가는 셈이었지만 남은 기간 동안 내내 사람들 틈에서 불편을 겪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배로 하는 여행에 질린 탓도 있었다.
그리고 카이테인이 우리 일행과 헤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건 엔딜의 영향이 컸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병 때문이었다. 치유 수련 중인 그는, 신성력으로 낫지 않는다는 희귀병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저주?”
사건의 발달은 일정을 의논하는 자리에 엔딜을 부르면서 시작됐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검을 찾는 것도 급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을 보러 가는 건 던전을 다녀온 다음으로 정하기로 했다. 중간에 일정을 빼는 것보다 다녀오는 길에 들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란 생각에서였다.
엔딜은 결정에 만족해했고, 그것으로 모든 회의가 일단락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에 나와 일행들은 모두 당황했다. 엔딜의 여동생이 걸린 병을 두고, 엘프 일족들 사이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저주라니, 무슨 저주?”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하지만 그냥 지어낸 말일 거예요. 그 사람들은 세실을 싫어하니까. 그 애에 관해선 무조건 안 좋게 얘기하거든요.”
“싫어한다고?”
병에 걸려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싫어했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엔딜은 조금 주저하더니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백했다.
“실은…… 세실은 순수한 엘프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인종의 피가 섞여 있거든요. 그 애는 엘프인 어머니와 인간 남자의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인간들 사이에서 하프라고 불리는 존재죠.”
“아…….”
이제야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인종에 속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혼혈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하물며 엘프 종족은 자신들의 영역에 외부인의 출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배타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를 고운 시선으로 봤을 리가 없다. 병은 단지 수단에 불과할 뿐, 처음부터 추방할 궁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전 그런 점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세실은 너무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단지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그 앨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병에 걸렸을 땐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죠.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도, 치료해 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운명이라나? 더러운 피가 섞여서 크레아 님이 진노하신 거라고…….”
“크레아?”
“엘프를 창조한 신의 이름입니다.”
의아해하는 내 옆에서 카이테인이 조용히 답했다. 그는 평소보다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엔딜을 향해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쭉 들어 보니 일족들은 동생분이 병에 걸릴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같군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건…….”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 쪽에서도 구체적으로 도울 방안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엔딜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우리 일족과의 혼혈은 전부 그 병에 걸린대요. 시기는 개인차가 있지만 대부분 성인이 되기 전에 발병하고, 일단 한번 발병하면 무조건 몇 년 안에 죽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주라고…….”
“그치만 저주 아니야! 그딴 헛소리가 진짜일 리 없잖아! 세실은 병에 걸린 지 벌써 5년이 넘었어.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격분한 탓인지 엔딜은 평소의 말투로 소리쳤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외치듯,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바닥만을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살아 있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야. 그냥 치료법이 조금 까다로운 것뿐이라고. 지금까지 잘 해왔는걸? 신의 저주라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정말?”
대답한 사람은 카이테인이었다. 뜻밖의 동조에 당황했는지 엔딜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카이테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학에는 신들의 창세론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각 종족의 탄생 일화가 나오지요.”
“탄생 일화?”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인종이 인간이라는 사실 아십니까? 태초에 주신이 인간종을 만들었고, 그들을 위해 중간계를 세웠습니다. 그러고 주신을 보좌하는 신 크레아에게 한동안 그들을 지켜보도록 명했죠.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에게 호감이 생긴 크레아 신은 그들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가져다가 엘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는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인 신 중 하나입니다. 그런 크레아 신이 인간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저주를 내렸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구나. 처음 들어 봤어, 그런 얘기…….”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이 부분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마 인간에게서 종족의 기원이 시작했다는 것이 불쾌한 탓이겠죠. 사실 엘프만이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도 인간 근원설은 싫어하는 편입니다. 자신들이 인간보다 상위 종족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으음, 그런 거 기분 나쁘지 않아?”
“그럴 게 뭐가 있습니까? 자신의 혈통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걸요. 인간들 역시 이종족을 무시하고 폄하하기도 하잖습니까? 물론 이런 행동이 결코 옳은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당신…… 좋은 사람이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은 당신이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네요.”
“내, 내가?”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을 혼자서 애써 왔잖습니까. 세상에선 그런 사람을 가리켜 훌륭하다고 하지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과 더불어 엔딜은 카이테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 같았다. 순식간에 만개한 꽃처럼 밝아지는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홀로 아픈 여동생을 간호하는 일상은 분명 지치고 고됐을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저 말을 듣고 싶었을까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일단 저주는 확실히 아니라는 거죠?”
“네, 아닙니다.”
확인차 건넨 질문에 카이테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확신에 찬 어투였다.
“저주였다면 신전에 보였을 때 이미 진단을 받았을 겁니다. 그들의 신성력에 반발했을 테니까요. 일시적이나마 치유의 힘에 호전된다는 건 그 자체가 저주와는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혼혈에게만 나타나는 병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확실히 연구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러네요. 체질의 문제일까요?”
“글쎄요,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쉬운 해석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종족과의 하프는 매우 드문 편이니 사례라고 해 봤자 그다지 많지도 않겠죠. 단순히 우연이 겹친 걸 수도 있으니 그것만으로는 근거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전 이런 병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들어 보거든요. 오히려 제가 알기론 하프는 순수한 인간보다 더 오래 산다고 들었습니다.”
“엥? 그래요?”
“예, 최소 삼백 년 이상은 더 산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건 결국 모든 하프가 병에 걸려 단명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파고들수록 난해해지는 추론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복잡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카이테인의 얼굴은 드물게 찌푸려 있기까지 했다. 생각에 잠겨든 그는 잠시 후 엔딜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두 달마다 약초를 산다고 하시더군요. 굳이 그 기간을 지키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으응, 한 번에 구입할 수 있는 최대 수량이 정해져 있거든. 약초의 자생지가 별로 많지 않아서 그 이상은 물량을 늘리지 못한다나 봐.”
“흠, 그럼 그 기간 안에 엘 님이 오셔야 한다는 말이군요.”
결론부터 내리자면,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지에 닿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테고, 그 안에서 체류하게 될 일정을 생각하면 두 달은 가뿐히 넘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난처한 기색을 눈치챈 듯 엔딜이 얼른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괘, 괜찮아. 떨어지면 다시 약초를 구해 오면 되지. 지금까지 쭉 해왔던 일인걸? 몇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병세는 더 진전되지 않는 게 확실합니까?”
“……아직까진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는 말이군요.”
“…….”
담담히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엔딜은 불안한 표정만 지었을 뿐, 부정하지는 못했다. 하긴, 이미 병을 앓기 시작한 지 5년이 넘은 상황이다. 아무리 약으로 다스리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조차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죽을 수 있는 게 세상의 일이다. 하물며 환자의 내일이 여전히 오늘과 똑같을 거란 기대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