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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42화 (142/608)

제142화

그의 말은 즉각 반응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인어의 모습을 한 나이아스가 튀어나온 것이다. 깜짝 놀랐는지 부릅뜬 눈으로 숨만 크게 들이키는 엔딜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거봐, 내 말 맞지?”

“어떻게…….”

“원래 이런 게 당연한 거라니까. 정식 정령사가 된 소감이 어때?”

“정식 정령사…….”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는 걸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얼굴이 여전히 멍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다시 본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네 동생에 대한 것 말인데. 그건 다 같이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언제라고 확정할 순 없지만 최대한 일정을 맞춰 볼게. 그런 김에 일단 몇 가지 확인해 둘 게 있는데…… 엔딜?”

“으응?”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를 부르자, 엔딜은 황급히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뭐야, 이게 가장 중요한 얘긴데 왜 집중을 안 해?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동생이 앓고 있는 게 희귀병이라고 했지? 신관에게 병을 보인 적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신성력으로 치료해 봤어? 효과는 어느 정도였어?”

“아, 그게…… 일시적으로 낫긴 하는데 그때뿐이라서…….”

“흠, 그래? 일시적인 효과라. 어지간한 것들은 신성력으로 대부분 치료가 가능할 텐데, 균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건가? 그럼 원인 자체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그러고 보니 동생이 먹는 약초는 어떤 효과가 있는 거야?”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고개를 들자 엔딜이 황망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왠지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이었다.

“듣고 있어, 엔딜?”

“어? 네?”

“네가 정기적으로 구입한다는 약초 말이야. 무슨 효능이 있는 건지 물었어.”

“아, 그, 그게 자세히는 모르지만, 장기와 신체 기능을 보완하는 거라고…….”

“으음, 신체 기능 보완? 그럼 치료약이라기보다는 보약 같은 건가 보네.”

하긴, 시중의 약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체력을 키워서 스스로 떨쳐내게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몇 년째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별로 신통한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내가 고칠 수 있을까? 아직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엔딜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했고, 이제 막 꿈에서 깬 사람 같기도 했다.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흥분한 건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미리 말해 두는 건데. 솔직히 나도 고칠 수 있을 거란 장담은 못 해. 상처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병’에 관해선 시험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이런 건 확실히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다급히 내저은 손이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휘젓다 이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엔딜?”

“정말…… 물의 왕이세요? 진짜예요?”

“뭐?”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든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엔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정하게 응시하는 눈동자엔 충격과 혼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혀를 찼다. 어쩐지 묘하게 침착하다 싶더니,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라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깨닫는 것도 빠르다.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 하나도 안 들었지?”

“드, 들었어요. 근데 믿을 수가 없어서…… 아,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당신은 교황이라고…….”

“으음, 그건 미안해. 유희 중이라 정체를 밝히는 게 좀 꺼려졌거든.”

“그럼 정말로…….”

“그래, 내가 바로 물의 정령왕이야.”

내 대답에 엔딜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물어보면서도 정말 내가 긍정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너도 참 심하다. 이제껏 멀쩡하게 대화해 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뭐야? 심지어 대놓고 정령사로 만들어 주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실감을 못 할 수 있어?”

“아, 그게…… 꿈인 줄 알아서…….”

“나이아스도 직접 소환해 봤잖아.”

“환상을 본다고만 생각을…….”

느릿한 대답에 난 황당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하급이라고 해도 물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성질이 거칠다. 나이아스를 소환했을 때 다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전부 다 꿈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제 보니 상당히 심하게 둔한 녀석이었다. 엔딜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우물거리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럼 저 진짜 정령사 된 거예요? 다시 시큐엘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했잖아. 하지만 당분간은 참아. 네 몸이 감당하기도 벅차겠지만, 불러도 응답하지 못할 거야.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몸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역소환의 충격까지 겹쳤으니까. 한동안은 휴식해야 해.”

“네? 무리요?”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비추던 엔딜은 이어진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네가 처음에 정령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건 다 그가 도와준 덕분이라고. 그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시큐엘의 입장에선 부담이 큰 일이거든. 목숨을 걸고 한 거야.”

“그, 그랬군요. 전혀 몰랐어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사실 시큐엘만 아니었으면 내가 정체를 밝히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 녀석이 널 위하는 마음이 안쓰러워서 나서기로 결심한 거니까. 알았어? 그러니까 앞으로 그 녀석한테 잘해.”

“네, 네! 그럴게요. 앞으로 다시는 정령사로서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맹세해요.”

그는 한 손을 든 채 경건하게 선언했다. 이미 대부분의 오해는 풀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앙금들까지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좋아,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됐으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마, 말 안 해요, 절대로.”

“응, 그럼 됐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엔딜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 차올랐다.

“또 울려고? 너 의외로 울보구나.”

“그, 그치만…… 믿어지지 않는 걸요. 제게 이런 일이…… 이제 다시는 희망 같은 거…… 없을 거라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말하면서 감정이 더 벅차오른 듯 엔딜은 두 손을 꽉 쥔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우는 모습이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남들이 이 광경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는지. 새삼 이곳에 나와 그밖에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멋쩍은 기분에 나는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네 동생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은 못 해.”

“괘, 괜찮아요. 무, 물의 왕께서 직접 살펴보러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세실도 정말 기뻐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정말이에요. 전 지금 이렇게 물의 왕을 뵙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으음, 근데 너 내 이름 몰라?”

“아, 알아요. 엘퀴네스 님이시잖아요.”

“알면서 왜 자꾸 물의 왕이라고 해?”

“그, 그야 전 평범한 엘프인 걸요. 제가 감히 어떻게 정령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어요.”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내뱉는 말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정령왕이니까 이름을 부를 수 없다니. 내 정체를 알면 대부분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라 조금 신선한 기분이었다.

“뭐야, 그게. 그냥 이름으로 불러. 나도 그게 훨씬 듣기 편하니까.”

“으음, 그럼 엘퀴네스 님?”

“엘.”

“네?”

“엘이라고 해. 그게 내 애칭이거든.”

그러자 엔딜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과격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을 정도였다.

“마,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떻게 애칭을……!”

“뭐 어때서? 부르기 편하라고 만드는 게 애칭인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부르는걸? 게다가 그 이름 엄청 유명하거든? 사람들 앞에서도 엘퀴네스라고 하려고?”

“으음, 그건 그렇지만…….”

“거봐. 그러니까 그냥 엘이라고 불러.”

“……네, 엘 님.”

머뭇거리던 엔딜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 봤자 양옆으로 솟은 귀가 온통 새빨개서, 보지 않아도 무슨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엔딜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미운 꼴을 다 봐서 그런가? 왠지 이 녀석과는 앞으로 좋은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신의 문장이라…….”

“……!”

귓가에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엔딜과 헤어진 후 머무는 선실 쪽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지만 나는 누군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그시 노려본 기둥 뒤에서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부터 나를 쫓아다니고 있는 마족, 루카르엠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요즘 정령왕들은 부업을 꽤 화려하게 하시나 봅니다? 설마 교황이라니…… 이것 참, 형벌의 신과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저를 놀라게 만드시는 분이군요.”

그래, 안 그래도 널 어떻게 하나 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잘됐네요. 마침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흐음, 무슨 확인을?”

“이번 일, 마왕에게 보고할 건가요?”

그러자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설마요. 이미 명령 불복을 작정하고 온 마족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전 그렇게 의리 있는 성격은 못 됩니다. 게다가 제가 왜 이런 재밌는 상황을 스스로 망치겠습니까?”

“이게 재밌어요?”

“네, 매우 재밌네요. 생각지 못한 수확을 얻은 기분이랄까요.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거든요. 참고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무척 흥미진진하기까지 합니다.”

……왜 저 말이 악담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고자질할 의사가 없다는 점에서 나는 우선 안심했다. 못 미더운 마족이라곤 해도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마신의 심기가 불편할 텐데, 여기서 일을 더 키우고 싶진 않았거든요.”

“음? 마신의 심기가 왜 불편합니까?”

“왜긴요. 자신이 최고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제국 영토에서 다른 교단의 교황이 나왔잖아요. 이런 경우 운 나쁘면 종교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이미 마신교단에서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는 소문까지 있고요.”

“아, 그런 얘기였군요.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까? 전 물의 왕께서 오히려 그런 상황을 바라신다고 생각했는데요.”

“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말에 루카르엠은 눈빛을 빛내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내 이마에 있는 서클렛이었다. 그와 함께 이어진 말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이거, 마신교단의 보물 아닙니까?”

“……!”

“제가 이래 봬도 기억력은 좀 좋거든요. 오래전에 마신전에 장식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도난당해서 잃어버렸다고 한 것까지도요.”

설마 여기서 서클렛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나도 모르게 몸을 굳히자 루카르엠은 노골적으로 서클렛을 주시하며 말했다.

“처음엔 잘못 본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보니 정말 확실하네요. 설마 이게 물의 왕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우연히 습득하신 거겠죠?”

“그, 그렇긴 한데…….”

“흐음, 하지만 그런 얘기를 과연 몇이나 믿어 줄까요? 알고 계십니까? 이것을 지니고 있는 당신이 형벌의 신관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마신전을 향한 선전포고가 성립한다는 걸요.”

‘라피스으으―――!’

아마도 내 얼굴이 사색이 된 모양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루카르엠이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농……담?”

“뭐, 사실 이제 와서 누가 그 서클렛을 알아보겠습니까? 저나 되니까 기억한 거지, 인간들 중에선 그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겁니다.”

“……그냥 겁준 거였어요?”

“실례. 반응이 너무 재밌으셔서 말입니다.”

살의가 치솟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지금 당장 얼굴을 날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마족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나의 행동을 사전에 봉쇄했다.

“내친김에 말씀드리자면 한 제국 영토에 교황이 둘인 것도 그리 특별한 건 아닙니다. 예전부터 종종 있어 왔던 일이죠. 더구나 상급신끼리는 서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대체로 공존하는 분위기고요. 그러니 아마 걱정하시는 만큼 분란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설령 전쟁이 일어나면 또 어떻습니까?”

“어떻냐니…….”

“어차피 지금의 마신교단은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서 형벌의 교단의 상대가 안 됩니다. 아무리 과거에 잘 나갔던 사람이라도 일단 노인이 되면 새파랗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 영웅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전쟁을 일으켜 봤자 지들만 손해날 겁니다. 몇 번 부딪쳤다가 제 풀에 꺾여 바로 물러설걸요?”

아니, 잠깐! 마족은 마신의 창조물 아니었어? 마신교단에 대해서 그렇게 막 평가해도 돼?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루카르엠을 바라봤다. 그러자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듯,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뻔한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엘퀴네스 님의 입장이라면 오히려 교황의 신분을 이용해 전쟁을 부추길 것 같군요. 이참에 제국의 최고신을 바꿔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당신 정말 마족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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