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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141화 (141/608)

제141화

내 짐작이 맞았다. 엔딜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더 크게 흐느꼈다. 타인의 입을 통해 새삼스럽게 인지한 사실에 벌컥 서러움이 솟은 듯했다.

“흐흑, 제 여동생 세실이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의원에게 보여도 소용이 없고…… 신관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그래서…….”

“정령왕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방울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만한 물을 담고 있었던 건지. 이러다 탈수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그는 이내 자조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정령왕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 같은 녀석이 어떻게 감히…….”

“……엔딜?”

금방이라도 꺼질 듯 공허한 목소리에 나는 불안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곧 정신을 차렸는지 엔딜이 급히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하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예하. 교황은 이렇게 부르는 거 맞죠? 내가 괜히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아니, 뭐. ……좀 괜찮아?”

별로 괜찮아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예의상 그렇게 물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이제 난 정령사도 뭐도 아니니까. 모처럼 물의 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시큐엘을 보내 주셨는데, 소중히 아끼기는커녕 너무 함부로 대했어요. 눈앞의 이득만 좇느라 정작 귀한 게 무엇인지도 몰랐던 거죠. 내가 정령왕이라도 나 같은 녀석은 꼴 보기도 싫을 거예요. 아마 그래서 시큐엘을 다시 데려간 거겠죠.”

엔딜은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펼쳐든 그의 손바닥은 방금 전 흘린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거 알아요? 예전엔 이렇게 내 손을 보고 있으면 충만한 뭔가가 가득 담기는 기분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그게 전부 사라져 버렸어요. 있을 땐 몰랐는데, 아마 그게 시큐엘의 기운이었나 봐요.”

“…….”

“솔직히 말하면요. 물의 왕을 만나면 시큐엘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있어요. 아니, 사실은 그걸 제일 바랐던 것 같아요. 좀 염치없죠? 그래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령왕은 너무 까마득히 먼 존재라서 만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느낌? 하지만 시큐엘은 곁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만난 이후로는, 그가 없는 일상은 상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요.”

끝에 이를수록 중얼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덤덤히 손바닥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는 거네요.”

“…….”

짧은 침묵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깊이 한숨을 내쉰 엔딜이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기 때문이다.

“하하, 전부 자업자득인 주제에 무슨 푸념이람. 헛소리가 길었네요. 방금 그 얘긴 잊어 주세요.”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야죠. 그냥 조금 불편해지는 것뿐이에요.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 과욕을 부린 셈이죠.”

“그러고 보니 마을에서 나와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아, 맞아요. 한 10년쯤 된 것 같네요. 정확히는 마을에서만 나왔을 뿐 여전히 엘프의 영지 안쪽에서 살고 있는 상태예요. 인간은 접근할 수 없는 땅이죠.”

“그럼 네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동생은 누가 돌보는 거야?”

“그런 사람 없어요. 세실 혼자예요.”

“어? 하지만 환자라며.”

“그렇긴 한데…… 약만 잘 챙겨 먹으면 거동은 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방책을 잘 만들어 놨기 때문에 들짐승이 들어올 일도 없구요.”

“그래도 위험할 텐데…… 차라리 누군가에게 맡겨 놓는 게 낫지 않아?”

“맡길 곳이 있어야죠. 엘프들은 우리 남매와 교류하지 않아요. 마을을 나오는 과정에서 제가 좀 지랄하는 바람에 단단히 찍혔거든요.”

“으음, 그럼 인간 중에서 사귄 사람이라든가.”

어라,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엔딜은 조금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곤 체념하듯 대답했다.

“……예하는 신관이니까 하는 말인데요, 사실 나나 세실한테는 들짐승이나 몬스터보다 인간 종족이 더 위험해요.”

“어?”

“나만 해도 노예 사냥꾼한테 노려진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시큐엘이 곁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잡혀가서 지금쯤 이름 모를 귀족의 노예로 살고 있었을걸요? 아마 이번 일정이 끝나면 다시 한동안은 인간의 땅을 밟기 어려울 거예요. 정령 계약이 깨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쫙 퍼질 테니까. 당분간 몸을 사려야죠.”

“그럴 수가. 경비대는…….”

“인간의 경비대가 엘프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해요?”

“…….”

내가 입을 다물자 엔딜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예하도 봤잖아요. 나 인간들이랑 사이 별로 안 좋아요. 성격이 이래 먹어서 별로 누군가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편이거든요.”

“……마을에선 인기 많아 보였는데.”

“그거야 정령사인 엔딜 얘기죠. 항구 마을이라 생업이 전부 바다에 달려 있으니 내가 날씨를 예측해 주는 게 도움이 되거든요. 개인적으로 평범한 엘프인 나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은 없어요.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지. 선원들의 태도 보면 알잖아요? 그들 대부분 오랫동안 날 봐왔던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내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딱히 서운하진 않아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왜…….”

“그냥 내가 이종족이라서 그래요. 엘프더러 배타적인 종족이라고 하지만 사실 인간 종족도 만만치 않아요. 이득 때문에 곁에 두면서도 마음속으론 믿을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뭐, 그래서 가끔 엿 먹어 보라고 일부러 사기 칠 때도 있지만.”

“……신전이랑 결탁해서 정화 의식을 주도하는 거 말이야?”

“윽,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요? 신관은 천리안이라도 있나요?”

“돈 받는 걸 봤거든.”

“이런, 그걸 들키다니. 예하한테 내 점수가 낮을 수밖에 없었네요.”

“…….”

씁쓸하게 웃는 모습에서 나는 다시금 내 일행들을 떠올렸다. 언제나 곧고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아마 엔딜의 곁에도 그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머나먼 과거 숱한 방황의 시절, 친구인 태진이가 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듯이.

그때의 난 언젠가 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나약함과 어두운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덮을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올곧은 사람. 그래서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희망이 돼 줄 수 있는 사람.

‘그래,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시큐엘이 엔딜 곁을 맴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막연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그는 엔딜이 처한 곤란한 상황뿐만 아니라 상처로 얼룩진 그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의 내가 바랐던 소망 그대로.

그러고 보니 정령들은 정령왕에게서 파생하는 존재라고 했었지. 내내 정리되지 않던 복잡한 공식에서 겨우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나 참.’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잖아. 나는 푹 한숨을 내쉰 다음 엔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뜻밖의 행동에 놀란 듯 그가 빠르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왠지 순진한 소녀를 희롱하는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난 쓰게 웃어 준 다음 잡고 있는 손을 통해 가만히 치유의 힘을 밀어 보냈다.

“……어?”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엔딜이 곧 무엇을 느꼈는지 멈칫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역소환 때 내상을 입었지?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내버려두면 그냥 방치할 것 같아서 치료했어.”

“아, 고맙…….”

“그리고 오해하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으니까 말해 둘게. 정령 계약이 끊긴 건 딱히 네 잘못은 아냐. 그냥 처음부터 결속이 약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일 뿐이지.”

“그게 무슨…… 결속……?”

“한마디로 정령과 연결된 끈이 부실했다는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넌 정령사가 되기엔 자질이 부족해.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의 수준이지. 시큐엘이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계약은 했지만 원래부터 네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어. 샘물도 못 담을 그릇에 바다를 채우려 했으니 당연히 결속이 약할 수밖에. 정령 쪽에서 억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했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깨졌을 거야. 즉,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었다는 거지.”

그 말에 멍하게 듣고 있던 엔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아무래도 너무 직설적인 설명이었던 모양이다. 충격이 컸는지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뭐야. 난 원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야?”

말투도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원래대로 돌아온 거라고 해야 하나. 답지 않게 정중하게 굴더라니, 기분이 상하자마자 다시 본성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단순한 녀석 같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너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이 그래.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물의 정령왕이 시큐엘을 선물로 줬다고 했지? 그것도 실은 지어낸 말이야.”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그대로야. 네가 정령사가 된 건 왕의 뜻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시큐엘 혼자 계획해서 벌인 일이거든. 그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아마 그렇게 말하면 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하, 함부로 말하지 마. 교황이라고 존대해 줬더니 내가 우습게 보여?”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왜냐면 난 너에게 그를 보낸 기억이 없거든.”

“그게 무슨…….”

차갑게 노려보던 그는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잠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말의 뜻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알아듣기는 했는지 곧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동자에 서서히 경악이 스며드는 것을 보며 나는 엔딜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로 줄게.”

“……어? 저기?”

“미안, 좀 아플 거야.”

“그……!”

무언가 말하려던 엔딜은 곧 크게 숨을 삼켰다. 내가 그의 몸에 무자비하게 물의 기운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페리스 때랑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그의 경우 잠재된 친화력을 이끌어내는 것뿐이었다면 엔딜은 막힌 길을 강제로 뚫어 터전을 닦는다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후자가 더 어려운 데다 받는 사람 쪽의 부담도 더 크다. 신체 기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하면 그나마 괴롭진 않겠지만, 지금은 단숨에 진행하고 있으니 아마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윽고 적당한 시점이 되었을 즘 나는 거의 넘치다시피 퍼붓던 주입을 멈췄다. 그러자 숨도 못 쉬고 컥컥거리던 엔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사이 그의 온몸은 식은땀에 푹 절어 있었다.

“허억, 허억! 뭐, 뭐야?”

“네 육체의 성질을 바꿨어. 그래 봤자 딱히 거창한 건 아냐. 그냥 기본 틀을 만든 것뿐이니까.”

“……기본 틀?”

“정령사로서 필요한 가장 최소한의 기반이랄까. 우물이 없으면 수맥을 끌어와서라도 강제로 만드는 수밖에.”

대답과 함께 나는 엔딜의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터져 나온 물방울들이 그의 피부 위에 스며들면서 푸르스름한 무늬를 새기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새기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굳이 절차를 새로 밟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빠르고 간단하니까.

이윽고 손을 떼어 내자 그의 이마 위에 선명한 계약의 증거가 드러났다. 상급 정령사임을 증명하는 물의 인장이었다.

“자, 다 됐다.”

“……지금 이게 다 뭐야?”

“뭐긴. 시큐엘을 준다고 했잖아. 그와 맺었던 정령 계약을 다시 살렸어.”

내 말에 엔딜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한 손으로 천천히 이마를 매만졌다. 동요를 한다거나 의문을 느끼는 것도 없이 그저 그렇구나, 담담히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에 오히려 실망한 건 나였다. 다시 정령사가 됐다고 하면 엄청 기뻐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이렇게 심심할 줄이야.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단, 계약을 살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거야. 예전엔 시큐엘 혼자서 오롯이 계약의 책임을 감당했다면, 이제부턴 너도 같이 나누게 됐으니까. 앞으론 정령을 소환할 때 힘이 더 많이 필요할 거야. 대신 한계까지 마나를 소비해도 계약이 끊어지진 않아. 사실 지금까지가 비정상이고 이게 정상이지만.”

“정상…….”

“평범해졌단 소리야. 바뀐 흐름에 적응하려면 당분간 훈련이 좀 필요할 거야. 특히 넌 억지로 길을 낸 거라서 더 오래 걸릴지도 몰라. 첨부터 시큐엘을 소환하는 건 벅찰 테니까 한동안은 나이아스부터 소환해 보면서 천천히 적응 훈련을 해 나가도록 해.”

“……어? 나이아스?”

그 순간 묵묵히 듣고 있던 엔딜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다.

“뭐야, 하급 정령으로 시작하는 게 불만이야? 근데 다른 상급 정령사들도 원래 다 그렇게 하거든? 매시간 필살기만 쓰는 사람이 어딨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나이아스를 소환할 수 있다고? 어떻게?”

“어떻게 라니…… 설마 몰랐어? 상위 정령과 계약하면 하위 정령은 그냥 소환할 수 있어. 네 경우엔 상급 정령사니까 운디네도 부를 수 있는데? 마나가 허용하는 선까지 소환 숫자도 늘릴 수 있어.”

“……그건 그냥 헛소문 아니었어?”

“헛소문이라니?”

“하, 하지만 나…… 지금까지 그런 거 못했는데…….”

아,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다. 요행으로 정령사가 된 탓에 그동안 능력이 온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시큐엘이 일방적으로 지탱한 계약이었으니, 거기서 다른 정령까지 소환하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젠 다를 거라고 했잖아. 이전 계약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제약이 있었던 것뿐이야. 앞으론 할 수 있어. 뭣하면 시험해 볼래? 지금 한번 말해 봐. 나이아스 소환, 이라고.”

“……나이아스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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