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한순간에 눈과 치아를 모두 잃은 무스는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창고에 갇혔다. 조만간 정착지에 닿는 즉시 치안대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엔딜의 혐의는 완전히 풀렸다. 신 앞에서 진실임을 인정받았으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무죄가 확정된 순간부터 사람들은 엔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일방적인 오해로 엄한 사람을 잡을 뻔했으니 양심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다. 일부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딜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엔딜. 우리가 널 오해했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 뭐…… 됐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엔딜은 겸연쩍은 얼굴로 사과를 받았다. 쑥스러운지 조금 굳은 모습이었지만 왠지 기뻐 보였다. 거친 말투와 행동으로 감추고 있었을 뿐, 사실은 정이 고팠던 걸지도 모른다.
“잘 해결된 것 같네.”
“고생하셨습니다, 엘 님.”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내 옆에서 이사나와 카이테인이 말했다. 사건이 수습되는 동안 두 사람에게는 그동안의 정황을 모두 설명해 둔 상태였다. 워낙 안타까운 사연이라 그런지 그들은 엔딜의 오해가 풀린 것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운이 좋았어요. 한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는데.”
“지켜보는 저까지 조마조마했습니다.”
“그쵸? 정말 십년감수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엘뤼엔 님께선…….”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에요.”
나는 씩 웃으며 이마의 서클렛을 문질렀다. 아슬아슬한 순간 대반전을 선사해 준 엘뤼엔은 그 뒤로 전혀 소식이 없었다. 말을 걸어 봐도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 바쁜 와중에 잠깐 틈을 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꼭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거듭했다.
“아무튼 두 사람에겐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눈에 띌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아닙니다. 엘 님의 성정에 그런 일을 보고 그냥 넘어 가시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 오히려 저는 엘 님께서 그런 분이셔서 더 존경하고 있습니다.”
“응, 맞아. 나도 엘이 그런 성격이라서 너무 좋은걸?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던 것도 다 엘의 그런 따뜻한 마음 덕분이란 걸 잘 아니까.”
빙긋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군가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이해를 받는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 아닐까? 조금 전 사람들에게 믿어달라고 울부짖던 엔딜의 얼굴이 떠오르자 새삼 그 가치가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에 파묻혀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행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저기…….”
그때 누군가 부르는 음성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눈앞에 엔딜이 서 있었다.
“아…….”
가까이 다가온 엔딜은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낭패감을 느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령사라고 말한 내가 왜 교황의 인장을 지니고 있냐는 것이라든지.
‘……망했다.’
당시엔 워낙 급해서 덮어 놓고 사고를 쳤는데,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무모한 짓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쯤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여차하면 정령사는 교황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위장 신분이었다고 하면 된다. 마침 진짜 정령사인 이사나가 곁에 있으니까,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둘러대면 될 것 같았다.
“저, 저기…….”
눈이 마주치자 엔딜은 당황스러울 만큼 안절부절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두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꼭 고백 직전의 어린 남학생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지, 비유가 이게 뭐야. 그럼 마치 내가 고백 대상자가 된 것 같잖아. 스스로 생각하고도 소름이 돋아서 나는 급히 두 팔을 문질렀다. 그러자 엔딜이 움찔거리며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무슨 일이야?”
“으음, 그, 그러니까…… 저기…… 하, 할 말이…….”
“무슨 할 말? 도와줘서 고맙다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무, 물론 고맙다는 인사도 하러 온 거지만…….”
워낙 엄청난 일을 겪은 탓일까? 그답지 않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나는 분위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말인데?”
“그, 그게…….”
“괜찮으니까 말해 봐.”
설마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조금 용기가 생긴 듯, 엔딜은 한층 차분한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확인?”
“당신, 혹시 정령왕…….”
“……스톱.”
그래,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잊었다. 나는 급히 한 손으로 엔딜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깜짝이야. 심장 떨어질 뻔했네. 슬쩍 주위를 돌아보니 다행히 그가 한 말을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시 엔딜을 보자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 * *
이동 장소로 택한 것은 엔딜의 선실이었다. 아무래도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기엔 탁 트인 공간보다는 독실이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엔딜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일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자아, 그래서 아까 뭐라고?”
“네, 네?”
“내게 확인할 게 있다고 했잖아. 이제 다시 말해 봐. 아까 전에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그는 ‘정령왕’이라고 말했었다. 설마하니 정령왕과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을 리는 없고…… 내 정체를 알아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지금까지 내가 정령왕이라는 걸 드러낼 만한 힌트를 준적은 없다. 물속에서 그를 구했을 때도 모습을 감춘 상태였으니까. 정령사인데 교황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의심스러울 순 있어도, 그것 때문에 알아봤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보통은 둘 중 하나의 신분을 사칭했다고 여기는 게 정상이잖아?
내 혼란스러운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엔딜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곤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엔딜이 각오를 다진 것인지 망설이듯 좌우로 굴리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또다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물의 정령왕…… 맞죠?”
“…….”
짤막한 침묵이 흐르고, 주위의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수 초의 시간이 몇 년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맙소사, 진짜로 알아본 거야? 대체 어떻게?
내가 대답이 없자 엔딜은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물에 빠졌을 때, 분명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멀쩡히 살아난 거예요.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저절로 물속에서 떠올랐다는데,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잖아요. 그거…… 물의 왕께서 절 구해 주신 거 맞죠? 그래서 내가 결백하다는 것도 아신 거죠?”
설마 거기까지 짐작할 줄이야. 나는 동요를 감추려고 노력하며 애써 되물었다.
“자,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정령왕은 뭐고, 대체 내가 뭘 했다는 건데?”
“마, 맞잖아요. 모른 척하지 마세요.”
“아니, 난 진짜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거든? 일단 물어보자. 왜 날 정령왕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치만 머리색이랑 눈동자 색이…….”
“어? 머리색?”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곧 흠칫해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아차, 그러고 보니 시큐엘이 이 녀석한테 내 외모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고 했었지? 처음 후드를 벗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굳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바로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웃으려고 노력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하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설마 머리색 때문에 오해한 거야? 확실히 흔한 색은 아니긴 하지만, 아주 특이한 색도 아니잖아.”
“그치만 그런 외모는 흔한 게 아니죠.”
“응? 외모?”
“……후드를 벗었을 때 사람들이 왜 놀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숨이 섞인 엔딜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사람들에게 여자로 오해받은 것이라든가. 어느 여관에 갔을 땐 라피스랑 부부로 오해받은 것이라든가. 그때마다 나를 비웃는 듯했던 녀석의 표정이라든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은 건.
“……나 여자 아니야.”
뜬금없는 내 말에 엔딜은 당혹감을 드러내면서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당연하죠. 정령은 무성이니까요. 음, 그러니까 정확히는 여성체?”
“여성체 아니라고!”
“네에? 그럼 남성체셨어요?”
이젠 일일이 화낼 기운도 없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당연히 날 정령이라고 생각하는데? 네 논리로 따지면 이 세상에서 머리색 파랗고 좀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은 다 물의 정령왕이게? 말이 안 되잖아.”
“으음, 그렇긴 한데…… 정령도 소환하셨고…….”
“그럼 나한테 있는 신의 문장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심지어 교황의 상징이야. 의심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이거 진짜 신의 인장 맞거든? 신벌이 내리는 것도 봤잖아.”
“……알아요.”
“그런데 왜…….”
“그게…… 정령왕이라면 신들과도 친분이 있을 테니 도움을 받았겠지 싶어서…….”
젠장,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천천히 심호흡했다. 좌절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지금은 상황을 수습해야 할 때다. 정령왕으로서 체면이 있지, 정곡을 찔렸다고 이대로 순순히 인정할 순 없었다. 애초에 신의 문장을 받았던 건 내가 정령왕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으니까.
특히 내게는 지켜야 할 일행이 있다. 소문이란 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불거질지 모르는 법이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미 마왕 쪽에선 내 존재를 인지했고, 그건 결국 대공도 알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 대놓고 행적을 노출하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이미 이상한 마족이 따라붙은 시점에서 틀린 것 같긴 하지만.
‘아니, 괜찮을 거야. 그 마족은 마왕을 배신할 생각이라고 했으니까. 설마 이쪽의 일들을 냉큼 일러바치러 가진 않겠지. 솔직히 보고할 것도 딱히 없잖아? 어차피 그쪽에선 내가 정령왕인 거 다 알고 있는데 뭐. 그래, 맞아. 걱정할 일은 없어. 그리고 새로운 소식이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정령왕이 교황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게 형벌의 신 엘뤼엔의 것이라든……가…… 아하하.’
……정말 괜찮은 걸까?
이제야 미친 생각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렇지 않아도 삼 일의 기적 이후 형벌의 신이 이사나를 비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히 퍼져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단지 소문일 뿐이겠지만, 이게 사실임이 증명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교황의 등장 자체가 마신의 교단 입장에선 매우 거슬리는 사건일 텐데, 심지어 그들이 자신들과 척을 진 황제의 편에 선 것이다. 이게 선전포고가 아니면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무스가 그랬었지. 마신전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혹시 이러다 엄청 일이 커지는 거 아니야?
“저기요?”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엔딜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 다음 얼른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짙은 마력이 느껴졌다. 루카르엠이라고 했던가? 그가 지니고 있는 기운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아직 마계로 돌아가진 않은 듯했다.
“아, 미안. 잠시 딴생각을 좀…… 아무튼 미안한데 나 정말 교황 맞아. 그때 정령을 소환한 건 그냥 평범한 속임수였어. 근처에 있던 친구의 도움을 받았지.”
“친구?”
“내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정령사거든. 진짜 물의 상급 정령사.”
“……왜 속임수를…….”
“당시 상황이 좀 그랬잖아. 신관이라고 하는 것보다 정령사라고 말해야 네가 날 경계할 것 같았거든. 그 다음엔 적당히 밝힐 만한 타이밍이 없었고.”
“그런…….”
“정 의심스러우면 내 친구를 데려와서 증명해 보일게. 그럼 되겠어?”
“…….”
그 말에 엔딜의 눈동자가 멍하니 깜빡이더니 급격하게 흐려졌다. 다음 순간 이어진 광경에 나는 당황했다. 엔딜의 동그란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진짜 아니에요?”
“그, 그렇다니까.”
“그럴 수가…… 난 이제야…… 겨우 만났다고…….”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악물었다. 설마 울어 버릴 줄이야. 수많은 반응을 예상했지만 이것만은 정말 짐작하지 못했다.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 잠시 모른 척했던 양심이 쿡쿡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는 신음을 눌러 삼키며 말했다.
“저기, 야, 잠깐. 울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봐. 갑자기 왜 우는 거야? 내가 정령왕이 아닌 게 그렇게 슬퍼할 일이야?”
“하, 하지만…… 정말 만나고 싶었…… 흐윽. 꼭 만나고 싶었는데…….”
“정령왕을 왜 만나고 싶은 건데? 계약하고 싶어서? 엘프는 정령왕이랑 계약 못 해.”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분께 부탁을…….”
“부탁?”
“장로님이 예전에…… 물의 왕은 무슨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게 무슨…….”
내가 병을 치료할 수 있어서 만나고 싶었다고? 두서없는 대답에 눈썹을 찌푸리길 잠시간, 갑자기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아프다고 한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