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범죄학 이론에 의하면 ‘낙인 효과’라는 게 있다. 사회적 제도 안에서 누군가를 한 번 일탈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실제론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그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다는 현상이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가 딱 그랬다. 애초에 ‘엔딜이 한 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전제 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험악해진 분위기에 아래쪽에 있던 엔딜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보였다. 엔딜이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간신히 눌러 참고 있던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다들 적당히 좀 하세요.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요?”
“뭐, 뭐야?”
“본인이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것을 증명하는 목격자도 나왔어요. 근데 왜 계속 범죄자 취급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 아니란 게 밝혀졌을 때 엔딜의 얼굴을 어떻게 보려구요? 그때 가서 미안했다고 하면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 딴에는 진심으로 내뱉은 충고였다. 하지만 이미 색안경을 낀 사람들은 내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선원들은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꼬마야,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증언은 별로 효과가 없어.”
“왜요?”
“말했다시피 너도 상당히 수상해 보이거든. 얼굴은 가리고 있는 데다 행색도 남루하잖아.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나서서 말해도 모자를 판에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알 수 없는 지저분한 꼬마의 말을 어떻게 믿겠어?”
“지저분…….”
“이런, 너무 노골적인 말이었나? 하지만 불쾌해도 어쩔 수 없어. 우리들의 눈에는 너 역시 그 녀석과 한패인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정 억울하면 너도 같이 재판에 따라가든가. 그곳에서 저 녀석을 위해 증언하면 되겠네. 그것까진 말리지 않으마.”
재판이란 단어에 엔딜의 얼굴이 다시 파리해졌다.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눈빛으로 그렇게 달래준 다음(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들이 말하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뭔데요?”
“그야 누구나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자신의 이름을 건다…….”
“아참, 설마 그렇다고 난 어느 지역의 아무개요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소용없어. 그래 봤자 당연히 모를 테니까.”
“하하하하하!”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 사람들은 완전히 날 바보에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엘 님.”
그때 카이테인과 이사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를 돕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설마 또 다른 일행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선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특히 이사나와 달리 카이테인은 누가 봐도 완연한 어른이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카이테인을 바라봤다. 그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카이 씨, 저 사고 좀 쳐도 돼요?”
“예?”
불쑥 내뱉은 질문에 당황한 듯 그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과연 수석 사제라는 직함답게, 그는 이해하는 것도 빨랐다. 곧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엘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고마워요. 라이, 잠시 이 녀석 좀 맡아 줄래?”
“응? 아, 으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사나에게 곧장 엔딜을 떠밀었다. 그러자 정작 놀란 건 엔딜이었다. 얼결에 이사나의 품에 안긴 그는 허둥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엔딜, 일단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 전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대신 그동안 한 가지만 지켜줘.”
“으응?”
“지금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넌 한 마디도 하지 마.”
마지막 말은 거의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엔딜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겁하며 작은 소리로 입을 뻐끔거렸다.
“서, 설마 정령을 부르려고?”
한마디도 하지 말라니까. 눈썹을 찌푸리자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야, 그, 그만둬. 안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나 때문에 정령사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안 좋단 말이야. 그런 걸 밝혀 봤자 널 믿어 줄 리가 없어. 괜히 한편이라는 의혹만 더 키울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긴 하니 다행인 걸까.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더 초조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야, 너 내 말 들려?”
“응.”
“씹, 들리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령사라고 말해 봤자 소용없다니까? 그런 방법이 통할 리가…….”
“걱정 마. 다른 방법을 쓸 거니까. 넌 내가 한 말이나 제대로 지켜.”
“그게 무슨…….”
“지금부터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대답과 동시에 나는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머리 뒤로 젖혔다. 펄럭,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옷자락 안에 갇혀 있던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후두둑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어?”
엔딜의 눈동자가 점점 크게 벌어지는 것을 뒤로 하며, 나는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유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주변이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아직 본론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상대 쪽의 기세가 수그러든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날 심하게 비웃었던 선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명 얄밉게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왠지 지금은 공포 영화를 본 듯 경악에 찬 얼굴이다. 시선이 마주지차 그는 뻣뻣한 얼굴로 군대에서나 볼 것 같은 정자세를 취했다. 잠시 뭐하는 건가 싶었지만 어쨌거나 내게 불리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난 의문을 떨치고 당당하게 물었다.
“내 신분을 밝히라고 했었죠?”
“네? 아, 네, 그, 그랬지요…….”
그랬지요? 뭐야, 이건 또 웬 존댓말이지?
조금 전까진 협박에 가까운 말투로 마구 윽박지르더니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 뭔가 내게서 심상치 않은 기백이라도 읽은 걸까? 하긴, 그런 거라면 좀 이해는 된다. 난 지금부터 엄청난 일을 벌일 계획이니까.
“다들 똑바로 잘 봐요.”
꿀꺽.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 다음(어째선지 사람들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천천히 두 손을 올려 이마에 차고 있던 서클렛을 떼어 냈다. 내 행동을 어리둥절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음 순간 완전히 드러난 이마를 보고 하얗게 굳었다.
“…….”
“…….”
호흡이 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얼어 버린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봤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굳어 있는 공기가 더 경직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돌아보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다시 눈앞의 선원을 향했을 때였다. 털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악에 가득 찬 그의 시선은 내 이마에 똑바로 박혀 있었다.
“시, 신의…… 인장……?”
“신의 인장이 이마에…….”
나는 슬쩍 엔딜을 바라봤다. 날 정령사라고 알고 있는 만큼, 그가 이번 계획에서 가장 최대의 변수였기 때문이다. 괜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날뛰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다행히 엔딜은 약속(이라기엔 일방적인 지시였지만)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리만치 넋이 나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반응이 나타난 건 그때부터였다. ‘인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막힌 논두렁에 물꼬가 트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술렁거림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 보여? 맙소사, 저거 진짜 신의 인장 맞지? 지금 인장이 이마에 있는 거야?”
“그럴 수가…… 얼굴에 인장을 받는 건 교황뿐…….”
“세상에…… 나 저 문장 뭔지 알아. 형벌의 신 엘뤼엔의 문장이야.”
“뭐? 혀, 형벌의 신?”
“그,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 형벌의 교단에 얼마 전 교황의 상징이 나타났다고…….”
“그럼 설마…….”
수군거리며 주고받던 말들은 흐름이 이어질수록 점차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황을 인지했으면서도 차마 인정하기 힘든 건지 말없이 숨만 죽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공간에 쐐기를 박은 것은 카이테인이었다.
“예하.”
“……!”
낮게 울리는 음성에 사람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카이테인은 한 팔을 올리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 덕분에 살짝 흘러내린 소매 밖으로, 그의 팔목에 찍힌 엘뤼엔의 문장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증거가 하나뿐일 땐 의심스럽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면 그 증거는 진짜인 것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짐작대로, 그가 지닌 인장을 본 사람들은 더 크게 숨을 삼켰다.
“세상에. 손목에 인장이 있잖아? 저 사람도 고위 사제야…….”
“들었어? 저 사람이 방금 저 소년에게 ‘예하’라고…….”
“…….”
다시 한 번 장내에 놀라움으로 인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카이테인에게 고마운 시선을 보낸 다음 선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특히 처음에 주저앉은 선원은 아예 엎드린 상태였다.
신들의 개입이 활발한 세상에서 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아무리 작은 교단의 교황이라도 국가로 치면 일단 왕에 해당하는 위치인 것이다. 오히려 신의 권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어지간한 왕국의 왕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감히 교황 폐하를 몰라 뵙고…….”
나는 덜덜 떠는 선원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다시 서클렛을 착용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더니, 쓸데없다고만 생각했던 교황의 상징이 설마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처음 이것을 받았을 때 엘뤼엔을 원망했던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이제 제 증언에 효력이 생겼나요?”
“예? 아, 그, 그럼요! 다,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서, 설마하니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사제께서 하시는 말씀을 의심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그것도 교, 교황 폐하이신데…….”
“그럼 엔딜의 무죄도 인정하시는 거죠?”
“예? 그, 그건 좀…….”
뭐야, 이건 왜 대답을 못 해? 당연히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간 반응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증언은 믿는데 엔딜의 무죄는 못 믿겠다구요?”
“그, 그게…… 예, 예하께서 보시는 자리에선 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나중에 녀석의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하아?”
“예, 예하께선 사제이시니 저런 녀석이라도 신뢰하시겠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시, 실제로 사고가 일어나긴 했고,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또…….”
그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굽히지 않고 웅얼거렸다. 어떻게든 엔딜만은 끝까지 죄인으로 몰아갈 작정인 것 같았다. 솔직히 여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내심 혼란에 빠졌다. 신분만 밝히면 다 될 줄 알았지, 설마 이런 방식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으음, 그럼 이제 어떡하지? 첨부터 끝까지 전부 다 지켜봤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홀로 조용히 난처해하고 있을 때였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이테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좋은 방법이라니, 그런 게 있다고? 의아해져서 쳐다보자 그가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오직 예하밖에 쓰실 수 없는 방법입니다.”
* * *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나무문이 열리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아래 어둑한 공간이 드러났다. 낡은 가재도구와 청소 기구들,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부자재들만 보아도 이 방의 사용 용도가 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지저분한 공간 가운데, 한 남자가 기둥에 묶여 있었다. 지저분하고 초췌한 몰골이 된 남자의 이름은 무스. 며칠 전 일행이던 귀족 소년을 죽이려고 했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창고에 갇힌 사람이었다.
“……뭐냐, 무슨 일이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것에 경계심을 느낀 듯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우리들 사이에 서 있는 엔딜을 발견하곤 비소를 터트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내 공범자 엔딜 군이 아니신가?”
“…….”
반가운 말투에 엔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사납게 치켜든 눈빛이 잠시간 그를 향했다가 나를 의식한 듯 다시 수그러들었다. 그것이 겁먹어서라고 생각했는지 무스는 더욱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몰골이 꽤나 엉망이군. 상당히 많이 맞은 모양이야.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입이 좀 가벼워서 말일세. 차마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자네에 대해 전부 말해 버렸지 뭔가?”
하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물론 웃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조용한 공간에 그의 야비한 웃음소리만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함께 온 선원들이 머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잠자코 지켜봤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무스도 이쪽의 묘한 공기를 읽은 듯했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천천히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