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37화 (137/608)

제137화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엔 그가 느끼고 있는 혼란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음에 귀를 틀어막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로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선장이 조금 밝아진 안색으로 모두를 달래며 말했다.

“자자, 다들 이제 그만들 해. 엔딜이 아니라고 하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사실이지 않겠나?”

“하지만 선장님.”

“엔딜이 조금 말투가 거칠어서 그렇지, 사람을 해치는 녀석은 아니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선장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사람들의 분위기도 다소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엔딜을 범인으로 확정 짓고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이나마 재고를 하려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엔딜이라고 해도 설마하니 그런 짓을…….”

“괜히 엉뚱한 녀석 잡는 거 아냐?”

“좀 더 제대로 알아봐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호의적인 기류가 형성되자 선원들 역시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엔딜의 결박을 느슨하게 풀었다. 물론 분위기에 따라 맞춘 행동일 뿐 의심의 눈길까지 푼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몸을 굽히고 앉아 엔딜과 눈을 맞췄다.

“좋아, 엔딜. 넌 정말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니까!”

“그럼 죄인이 한 증언은 뭐야? 그 사람이 널 공범으로 지목했다고. 그건 왜 그런 거냐?”

“그 미친 새끼가 무슨 생각인지 내가 알 게 뭐야! 난 진짜 결백하단 말이야!”

“그럼 그자한테 돈을 받은 것도 사실이 아니란 말이지?”

“……그건!”

그 순간 한 번도 쉴 틈 없이 주장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멈췄다. 돈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집요하게 엔딜을 주시하고 있던 선원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경꾼들도 다시 얼굴을 굳히고 엔딜을 노려봤다. 바로 그때였다.

“찾았다!”

한 선원이 복도 끝에 있던 선실 안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봤다. 새벽녘, 무스가 엔딜의 품에 강제로 안겼던 돈주머니였다. 돌려줄 타이밍을 잡지 못해 그냥 지니고만 있었던 것을 방을 뒤지다 찾아낸 듯했다. 아마 무스가 노린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원이 내가 예상한 그대로 소리쳤다.

“엔딜의 선실에서 찾았어! 그자가 말한 대로야! 독수리 인장이 찍힌 돈주머니야!”

“……!”

이제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싸늘해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모두의 표정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류하던 선장도 참담한 표정으로 엔딜을 바라봤다. 그 시선엔 무너진 신뢰에 대한 배신감이 담겨 있었다.

“엔딜, 설마 어떻게 그런 짓까지…….”

“아, 아냐. 내가 전부 설명할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굳어 있던 엔딜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선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엔딜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더 들을 것도 없어, 이 사기꾼 자식! 감히 우리를 속이려고 해?”

“이 녀석을 당장 창고로 끌고 가! 정착지에 닿는 대로 그 죄인과 함께 치안대에 넘기자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자 엔딜 역시 마음이 급해진 듯했다. 그는 잡아당기는 손길에 저항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기다려! 난 진짜 아니야! 그건 그냥 그 새끼가 강제로 준 거야! 난 받을 생각 없었어!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누가 믿을까 봐? 돌려주려면 진작 돌려줬어야지. 그걸 계속 지니고 있는 시점에서 넌 이미 끝난 거야, 이 멍청한 녀석아!”

“강제로 준 거라니까? 돌려줄 타이밍이 없어서 가지고 있었을 뿐이야! 그 새끼가 날 모함하려고 함정을 판 거란 말이야!”

“흥, 결백은 재판소에나 가서 실컷 주장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무죄로 풀려나겠지. 그럼 믿어 주마.”

“재판소? 지금 날 재판소로 보내겠다고?”

누군가의 말에 엔딜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을 겁먹어서 그런 거라 여겼는지 선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왜, 재판을 받는다고 하니까 겁나냐? 우리가 보내는 게 아니라 치안대가 보낼 거다. 네가 이렇게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니 재판을 여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야만적인 이종족들이야 죄를 지으면 즉결 처벌 할지 몰라도, 법규 아래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겐 절차라는 게 있거든. 너처럼 결백을 주장하는 놈들을 위해 공판이라는 형식을 거치지. 높으신 분들이 정황을 듣고 잘잘못을 가려 준단 말이야.”

“공판…….”

“그래, 그러니 괜히 여기서 힘 빼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부 거기 가서 해. 네가 정말 무죄라면 어차피 풀려날 텐데 뭐가 걱정이야? 대신 유죄인 게 증명되면 지하 감옥에 갇혀 평생을 썩게 될 거다, 이 비열한 녀석아.”

“그럴 일은 절대 없어. 그런데 그게 얼마나 걸리는데?”

“뭐가?”

“재판 말이야. 판결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글쎄? 재판소는 큰 도시에나 가야 있으니까, 못해도 두세 달은 걸리겠지.”

“그건 안 돼!”

그 순간 차분하게 듣고 있던 엔딜의 입에서 돌연 고성이 터졌다. 갑자기 일어난 소음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역시 지지 않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두세 달이라니! 그렇게 오래 기다릴 시간은 없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약초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건 네 사정이지. 그러게 누가 그런 추악한 짓을 하래?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아니라고 했잖아! 난 아니라고!”

엔딜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도리질 쳤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방에 지친 듯 신물이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를 잡아끌었다.

“자,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계속 저항했다간 더 심하게 얻어맞을 줄 알아.”

“제발 믿어 줘! 난 바로 돌아가야 해! 나한텐 아픈 동생이 있어!”

“헛소리!”

“진짜야! 걘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위험해! 집에 남은 약초가 얼마 없어! 내가 약을 사서 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진짜 큰일 난단 말이야!”

엔딜은 질질 끌려가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잔뜩 얻어맞아 피멍이 든 얼굴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사람들 중 몇몇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엔 선장의 모습도 있었다.

“제발! 세실! 난 아니야! 허엉, 왜 아무도 안 믿는 거야! 신님! 듣고 계세요? 제발 누군가 날 좀 도와줘! 시큐엘! 물의 왕 엘퀴네스 님! 난 아니란 말예요! 믿어 줘! 난 아니란 말이야!”

아아.

처절한 절규를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새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 있었다. 통로를 가로막고 서자 한창 엔딜을 끌고 가던 선원이 불만스럽게 날 응시했다.

“뭐야, 넌?”

울고 있던 엔딜도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느꼈을 때 그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그 와중에도 나를 알아볼 기력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너……!”

그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엔딜이 결박을 뿌리치고 내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선원들은 모두 ‘어어’ 하고 허둥거리기만 할 뿐 튕겨 나가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엔딜은 거의 매달리다시피 내게 달라붙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너 그때 그 녀석 맞지? 새벽에 만났던 걔지? 넌 다 알지? 그 새끼가 그 돈주머니 나한테 강제로 준 거 봤잖아! 그치? 제발 이 사람들한테 얘기 좀 해 줘! 응? 너도 알잖아. 내가 원해서 받은 거 아니야. 나 그때 그 새끼 제안 거절했단 말야. 나 좀 믿어 줘, 제발…….”

가까이서 보니 몰골이 더 말이 아니었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눈 밑이 온통 까맸고, 바짝 마른 두 뺨은 광대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장담하건대 아직 역소환 때 입은 내상을 다 회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신체적인 폭력까지 당했으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삼킨 후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해. 너 지금 지나치게 흥분했어.”

“나, 나, 진짜 안 했어! 정말이야! 정말 난 그 애 구해 주려고 했어! 진짜야!”

“알아.”

“저, 정말? 넌 날 믿어 주는 거야?”

“그래.”

난 전부 다 봤으니까. 덧붙이고 싶은 진실은 그냥 입안으로만 삼켰다.

엔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물어보면서도 설마하니 내가 정말로 긍정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멍하니 흔들리던 눈동자가 반가운 기색을 띄더니 이내 괴로운 듯 다시 크게 일그러졌다. 양옆으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 고마워,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나는……나는…….”

나는 다시 흐느끼는 그를 가만히 토닥였다. 주위는 온통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어찌 됐든 엔딜의 결백을 증명해 줄 증인이 나온 상황이다. 선원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더 이상 강경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그때 그들을 대표해서 선장이 난처한 얼굴로 나섰다.

“새벽의 일을 봤다고?”

“네.”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어차피 그럴 작정으로 나섰기 때문에 나는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새벽에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보았고, 그가 돈주머니를 강제로 떠넘기고 사라졌다는, 내가 목격한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엔딜이 단칼에 거절했다는 말도 잊지 않고 강조했다.

“거래 내용에 대한 것도 알았니?”

“대강은…….”

“흠, 왜 그런 일을 바로 고발하지 않았지?”

“엔딜이 거절했으니까요.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섣불리 움직일 순 없잖아요. 그 남자가 그 자리에선 청부 대상이 누군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따로 알아보고 나중에 당사자에게 언질을 주거나 경비대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요.”

사실은 귀찮아서 그랬던 거지만, 무스를 막으려고 했던 건 사실이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선장은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눈치였다. 그런데 그때 선원들 사이에서 누군가 한 명이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어? 잠깐, 너 그때 목걸이 가지고 있던 녀석 아냐?”

“네?”

“맞네! 칙칙하게 눌러쓴 후드하며, 옷차림도 전부 똑같아. 이번에 귀족 도련님을 죽일 뻔했다는 목걸이! 그거 네가 갖고 있다가 증거품으로 제출했잖아. 내 말 맞지? 그건 어디서 났던 거야?”

“아, 그건…….”

이런, 설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 말고도 후드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편이라 딱히 누군가의 눈에 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차마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가져왔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돌연 선원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직후 이어지는 말에 나는 진심으로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너 혹시 그 녀석이랑 한패 아니냐?”

“……네?”

“증거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살인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좀 이상하잖아. 사실은 다 같은 편이었는데 계획이 실패해서 걸릴 것 같으니까 모른 척 발을 뺀 거지. 한 놈에게 전부 덤터기 씌울 작정으로 말이야. 내 말이 틀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뭐야, 찔려서 그래?”

“뭐, 뭐라고요?”

“생각해 보니 진짜 수상하네. 애초에 살인 청부하는 현장을 목격했는데 나중에 신고하려고 했다는 게 말이 돼? 보통은 일이 터지기 전에 신고하려는 게 정상이잖아.”

그거야 사람마다 전부 다른 거지. 모두 다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거든?

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주장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의심의 눈길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일에 뛰어들 때부터 이미 각오는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발끈하지 않기 위해 차분히 설명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목걸이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걸 우연히 주운 것뿐이에요. 말했다시피 전 그 남자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계속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 남자가 뭔가 찾고 있길래 직감적으로 이거구나 했죠. 마침 피해자인 소년이 목걸이에 대해서 언급한 직후였거든요.”

“나중에 신고하려고 한 건?”

“그것도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당연히 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엔딜이 안 한다고 했으니까요.”

“바로 그게 수상하다는 거야. 어떻게 엔딜을 믿어?”

“……뭐라구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싶어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선원은 오히려 더 거만하게 말했다.

“엔딜의 평소 행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믿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신뢰할 사람이 따로 있지, 다른 녀석도 아니고 다름 아닌 엔딜인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왜 말이 안 돼? 너도 그동안 그 녀석이 얼마나 돈을 밝히는지 봤을 것 아냐.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야. 그런 녀석이 거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단칼에 마다할 리가 있겠어? 오히려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면 모를까.”

“맞아, 그건 그래.”

“저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

선원들이 한마디씩 늘어놓기 시작하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군거리던 소리가 한층 커진 것을 느끼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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