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36화 (136/608)

제136화

루카르엠은 스스로 내뱉은 말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아, 맞아요. 그런 명령이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는 반사적으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설마 지금까지 저 기나긴 헛소리들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던 건 아니겠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걸 아는데, 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자 루카르엠이 난처하다는 듯이 볼을 긁었다.

“흐음, 역시 안 되나요?”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아! 너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 물의 왕께서 거부하신다면 하지 않을 테니까요. 누구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죠.”

“그게 무슨…….”

“정말입니다. 사실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전 마왕 전하의 명에 따를 생각이 별로 없거든요.”

“그 말을 믿으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자 그는 ‘진짠데…….’라고 중얼거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내 양 어깨를 붙잡고는 코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게 아닌가!

“뭐, 뭐하는 거예요?”

“이야, 가까이서 보니까 더 아름답게 생기셨네요. 평소에 미인이라는 소리 많이 들어 보셨겠어요. 이거 사실 대단한 겁니다. 제가 이래 봬도 안목이 굉장히 높거든요. 웬만하면 미인이라는 얘기 잘 안 해요. 지금까지 제가 인정한 미인이 딱 두 명 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두 번쨉니다. 굉장하죠?”

“무슨 헛소리를…….”

“자자, 그러지 마시고 물의 왕께서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일개 마족 주제에 정령왕에게 맞서는 게 말이 됩니까? 안 되죠? 완전 가소롭죠? 웬 날파리가 알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들어왔나 싶지 않나요? 제 말이 바로 그거거든요.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을 설마 마왕 전하가 모르실까요? 물론 그럴 리가 없죠. 그런데도 이런 명령을 내렸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그냥 저더러 나가 죽으라는 소리를 아주 길게 돌려 말하신 거죠.”

“주, 죽으라고?”

“네, 그런 겁니다. 실은 제가 그분께 좀 미운털이 박혀 있긴 하거든요. 뭐, 다른 마족들이야 그런 명령을 받아도 넵 하고 순순히 죽어 줄지 모르겠지만, 전 이래 봬도 제 목숨이 더 중해서요. 살아남는 쪽을 택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시네요.”

처음부터 알아듣지 못하게 설명한 건 그쪽이잖아!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눈앞에서 얄밉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배를 걷어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를 생각이 없다면서 여긴 왜 찾아왔는데요?”

“그거야 일단은 시늉은 해야 하니까요.”

“시늉?”

내 반문에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하지만 마왕의 명령에 대놓고 불복하는 것도 죽는 건 마찬가지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일을 벌이고 실패한 것처럼 꾸며 보려는 거지요. 그거라면 전하도 뭐라 하시진 못할 테니까요. 이해되셨습니까?”

“그야…….”

“역시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절 일행으로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왜 갑자기 이런 결론으로 이어지는 거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탁이라 나는 황망히 두 눈만 깜빡거렸다. 아까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도무지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 표정에서 혼란을 느낀 듯 루카르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나요? 하지만 이것도 제가 생각한 계획의 일환입니다. 정공법으로 공격해서 실패했다고 하면 마왕 전하가 제 말을 믿으실 리가 없거든요. 질 걸 뻔히 알면서 뛰어든 셈인데, 누가 봐도 일부러 실책을 범했다는 걸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일행으로 섞여 들어가서 지내다 방심한 틈에 공격했다! 그랬는데도 처참히 실패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정이 다르죠.”

“그럼 그냥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내 말에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묘하게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아, 아니. 의외로 예리한 면이 있으셔서 좀 놀랐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되긴 하죠. 하지만 마왕 전하는 곳곳에 숨겨둔 눈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은 진위를 금방 파악하실 겁니다.”

“어차피 거짓말하는 건 똑같지 않나요?”

“전혀 다르죠. 물의 왕께서 절 일행으로 받아들였다가 쫓아내신다면 적어도 그 자체는 진실이 될 테니까요.”

“즉, 나더러 연극을 해 달라는 말이네요?”

“정답.”

그렇게 말하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선 그 어떤 의도도 읽을 수 없었다. 너무 바보같이 해맑은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그대로 수긍할 뻔했을 정도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멍청해 보이는 녀석이 다가오면 무조건 경계해라.

이 순간 왜 갑자기 예전에 엘뤼엔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다시 정신을 바로잡았다.

순진한 얼굴에 넘어가지 마, 엘. 저 녀석은 마족이야. 전 차원에서 제일 사악하기로 유명한 종족이라고. 오죽하면 엘뤼엔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모두 그들 종족 때문이라는 말이 다 있겠어?

심지어 눈앞의 마족은 그런 존재들 중에서도 4명밖에 없다는 공작이다. 그런 존재가 순진하다는 건 전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굳어졌다.

루카르엠 역시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흐음, 역시 아직은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던 것 같네요. 결국 시간이 해결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까요? 좋습니다, 엘퀴네스 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그건 우리를 쫓아다니겠다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완벽하게 마왕 전하를 속이려면 엘퀴네스 님의 협조가 필요하거든요. 민폐란 건 알지만 저도 목숨이 걸려 있다 보니 이 부분만큼은 양보해드리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당장 결정을 내리기엔 부담스러우실 테니 생각할 시간을 드리려는 겁니다.”

생각할 시간? 그냥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고?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는 씩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제가 당신의 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기척을 숨기고 다니진 않겠습니다. 당신의 허락 없이는 일행분들에게 필요 이상 접근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안심이 되시겠습니까?”

“으음, 그거라면…….”

아차,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즉시 나는 바로 낭패감을 느꼈다. 여기서 응수한다는 건 결국 따라다니는 걸 허락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바로 정정하려 했지만 루카르엠의 말이 이어지는 게 더 빨랐다.

“아니, 난…….”

“정말이죠? 그럼 허락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엘퀴네스 님! 이야,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신 분이네요. 사실 저 같은 녀석은 무슨 말을 하든 수상하니까 얼씬도 하지 말라고 쫓아내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 정령왕! 배포가 남다르시군요!”

“으음, 그게 아니라…….”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게 보여 주신 신뢰는 결코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요. 저 이래 봬도 할 줄 아는 것도 진짜 많거든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제가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이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하아, 네에…… 부디 그러길 바랄게요.”

결국 나는 체념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왕 뱉어 버린 말,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물론 이 시간 이후부터는 주변 방비에 철저히 신경 써야겠지만.

차라리 통보라도 해 주니 다행인 걸까. 앞으로 그의 존재를 염두에 둘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제 기분은 좀 나아지신 것 같군요.”

“……!”

그 순간 들려온 말에 나는 잠시 모든 생각을 멈췄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묘하게 웃고 있는 루카르엠의 얼굴이 보였다.

“정령왕이 악몽을 꾸는 일은 흔하지 않죠. 주신의 축복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외모와 권위, 그리고 충만한 능력.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태어난 분께서 대체 무슨 고민이 있으신 걸까요?”

“…….”

“혹시 푸념할 곳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절 찾아주십시오.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쓸데없는 참견……!”

왠지 울컥하는 기분에 쏘아붙이려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루카르엠의 모습이 어느새 홀연히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떠나지 않았단 걸 알 수 있던 것은 근처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척을 숨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정말 지킬 생각인 듯했다.

“으으~ 대체 뭐야, 저 사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팔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그 마족에게 휘둘린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적과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이튿날은 아침 일찍부터 바깥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싸우기라도 하는 건지 고성과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항해가 길어지면 갑갑함 때문에 예민해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만큼 사소한 다툼도 늘었다. 특히 거친 뱃사람의 성향상, 선원들 사이에선 주먹다짐이 오갈 정도로 큰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흔한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소음을 느꼈을 땐 이번에도 으레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건지 시간이 지나도 진정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소란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급기야 쿵쿵 진동까지 울리기 시작하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다며 카이테인이 직접 선실 문을 열고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요, 카이 씨?”

“흠, 아무래도 복잡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엘프 말입니다.”

엘프? 엔딜을 말하는 건가? 생각지 못한 존재의 언급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이 배 안에서 ‘엘프’라는 단어로 지칭할 만한 존재가 달리 그 녀석 외에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정령을 잃은 충격으로 실성한 녀석이 마구잡이로 사람들 사이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워낙 성정이 거친 녀석이다 보니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엘프라면 이번에 사고가 났던 정령사 소년 말이죠? 그 소년이 왜요?”

굳어 있는 내 옆에서 이사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 두 사람은 엔딜에 관해선 일반적인 소문만 접했을 뿐, 자세한 정황까진 알지 못했다. 이번 사고에 대해서도 누군가 그를 이용해 살해를 기도했고, 그 소동이 벌어진 과정에서 운 나쁘게 정령 계약이 해지됐다는 정도로만 간략하게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그때 가까이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내가 아냐! 난 아니란 말이야!”

“……!”

바닥을 긁듯이 거칠게 울리는 음성. 틀림없는 엔딜의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아마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와 있는 듯했다.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찬 무리 사이에서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년을 발견했다. 엔딜이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중 선원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저항하는 엔딜을 거칠게 붙잡아 바닥에 강제로 눌렀다. 이미 몇 차례 폭력까지 행사했는지 작은 몸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이봐, 너무 심하게 대하진 마. 아직 죄가 확실히 밝혀진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이 녀석이 너무 심하게 저항을 하잖아요.”

“맞아요. 조그만 게 힘이 얼마나 센지. 이렇게라도 해야 얌전해진다구요.”

선장의 말에 결박하고 있던 선원들이 투덜거리며 변명했다. 어젯밤 엔딜을 두둔해 주고 있었던 선장의 푸근하던 얼굴이 오늘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연신 안타까운 시선으로 엔딜을 바라보았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만류하지도 못했다.

“저기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나는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쯧쯧 혀를 차며 구경하고 있던 한 남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번에 귀족 도련님 하나가 죽을 뻔한 사고 있잖아. 알고 보니 저 이종족 녀석이 그 일에 가담했다는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범인 녀석이 조금 전에 다 불었다는 모양이야. 저 녀석도 공범이라고 말이지. 새벽에 만나서 돈을 주고 청탁했다고 하던데?”

“……!”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스, 그 작자가 작전 실패에 앙심을 품고 엔딜을 모함한 것이다.

“난 아니라고! 난 오히려 그 꼬마를 구하려고 했단 말이야! 씨발! 몇 번을 말해! 그 꼬마한테 물어봐! 그럼 전부 알 것 아냐!”

정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엔딜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자 붙잡고 있던 선원 중 하나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이미 물어봤어. 근데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

“뭐, 뭐야?”

“그 도련님은 목걸이에 홀린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으신단다. 그 이후에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씨발! 난 구하려고 했다니까?”

“흥, 사람을 구하려고 했는데 왜 정령을 잃어? 시큐엘이 떠났다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 거겠지.”

“말은 똑바로 해! 시큐엘은 일부러 떠난 게 아냐! 역소환된 거란 말야! 그런데 내 몸이 충격을 버티질 못해서 계약이 깨진 거라고! 그 꼬마를 구하느라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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