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35화 (135/608)

제135화

“……!”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땐 주위가 온통 캄캄했다. 나는 잠시간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숨을 살짝 멈추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낡은 나무판자들로 덧대어진 천장, 삐거덕거리는 창문 너머로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하늘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질리도록 보았던 선실 안의 풍경이었다.

현실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저절로 숨이 쉬어졌다. 그런 내 모습에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새삼 안심할 건 뭐람. 꿈이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은 왜 그런 꿈을 꿨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어제저녁에 들었던 그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이 아파요?”

그날의 사건 이후, 엔딜은 갑판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배 안에서는 그가 더 이상 정령을 부르지 못하게 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정령사가 갑자기 자격을 상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요즘은 어디를 가도 연신 엔딜의 이야기를 화젯거리로 삼았다. 선실에 처박혀 매일 울고 있다는 둥, 폐인이 되었다는 둥, 흉흉한 이야기들이 떠돌았지만 전부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정령을 잃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평소 그의 거친 입담과 수전노처럼 돈을 밝히던 성격이 원인이 된 것 같았다. 하필이면 지저분한 사건과 연관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의심의 눈길까지 더해진 듯했다.

그러던 중에 접하게 된 그의 과거는 조금 뜻밖이었다. 엔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그를 수년 동안 지켜봤다는 선장이었다. 엔딜에 관한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을 보다 못해, 조금이나마 두둔해 주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놀란 반응을 보이자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희귀병인 모양인데, 그나마 효과가 있는 약초가 자생하는 곳이 알폰프 제국령밖에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두 달마다 한 번씩 꼭 이 배를 타고 알폰프 제국에 다녀오는 거지. 차라리 이주를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아예 살기엔 그곳 환경이 너무 척박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저 혼자 고생하는 쪽을 택한 것 같아.”

“헤에, 그렇구나.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글쎄, 내가 이 생활을 했을 무렵부터 그랬으니까, 아마 11년쯤 됐나?”

“켁! 11년? 그럼 그 꼬마 나이가 지금 몇이라는 거예요? 아직 십 대로 보이는데?”

“엘프잖아. 그들 종족은 100세 때 성인식을 치른다고 하던데. 겉으로 보기엔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을 거다.”

“그, 그렇군요.”

“신기하지? 사실 녀석이 엘프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됐어. 그전엔 후드를 푹 눌러쓰고 인간인 양 행세했거든. 말투도 꽤 거칠어서 도무지 엘프라곤 상상할 수가 없었지. 아마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식으로 굴었던 것 같아. 지금은 그 말투가 습관으로 굳어진 모양이지만. 아무튼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정령을 소환하게 됐는데 그때부터는 그냥 엘프임을 밝히더라고. 덕분에 금방 유명해졌지.”

선장은 그날의 일을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까지 엔딜의 수입원은 엘프의 영역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약초나 풀을 캐다가 파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령사가 된 이후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들의 사회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어디를 가든 정령이 그를 보호해 주니 주변을 겁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수입이 풍성해지자 동생의 병도 보다 많은 의원과 신전에 보일 수 있게 됐다. 돈을 버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더 많이 벌면 그만큼 다양한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동생이 완전히 낫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엔딜이 품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상에. 그럼 그 많은 돈이 전부 동생 치료비로만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지. 그것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녀석인걸. 오히려 그렇게 벌어도 항상 적자인 모양이야. 신전 치료비가 좀 비싸야 말이지.”

“끄응, 그렇구나. 엄청난 수전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어째 좀 짠하네.”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나 역시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뿐이다. 사실은 몇 번이나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잡지 않았다. 분명 시큐엘은 자신의 계약자를 두둔하고 싶어 했었다. 이유를 물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변명은 나중에 듣겠다며 그의 입을 막았었지. 아마 사정을 들었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나는 정말 많이 화가 나 있던 상태였으니까. 엔딜에 대해서는 그저 괘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나중에 가선 의외로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른다 싶긴 했지만, 그런 순간에마저 선입견을 완전히 지웠던 것은 아니었다.

인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도, 안되긴 했지만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정령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게다가 내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닌, 불행한 사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지 않은가.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싶으니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가슴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정작 나를 괴롭혔던 건 그 다음에 이어진 대화 내용이었다.

“근데 왜 그 녀석 혼자서 그렇게 아등바등 약값을 버는 거래요? 다른 가족들은 뭘 하고요?”

누군가 불쑥 내뱉은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선장을 향해 쏠렸다. 사실 그 부분은 나 역시 궁금하던 차였다. 아무리 인간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엔딜은 엘프 일족 사이에선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체구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이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건 어느 종족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엘프 종족은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서 다 큰 성인일지라도 함부로 인간 세상에 내보내지 않았다. 하물며 어린아이에 불과한 엔딜이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돈을 벌러 다닌다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시선이 짙어지자 선장은 곤란한 듯이 얼굴을 긁적였다.

“글쎄.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엘프 마을에서 살지 않는다더군. 동생이랑 단둘이 나와서 지내고 있다고 하던걸?”

“엥? 부모가 없나요?”

“아니, 그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언뜻 들어 보니까 부모가 살아 있긴 한 것 같던데, 교류는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뭐야, 가출이라도 한 건가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 부모 쪽에서 버린 거지.”

“엑?”

“……!”

선장의 은밀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쿠웅, 가슴 안쪽에서 무거운 돌덩이가 크게 흔들렸다. 주위의 놀란 반응에 선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음 지었다.

“의외지? 아마 내 짐작으론 병 때문에 애들을 버린 게 아닐까 싶어. 마을에서 나오게 된 것도 그 병 때문인 것 같았거든.”

“맙소사. 그래서 버렸단 말이에요? 세상에 무슨 그런 부모가 다 있대요?”

“그러게 말이야. 엘프 종족은 핏줄에 대한 정이 더 각별하다고 들었는데,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야.”

“허어, 엔딜이 괜히 삐뚤어진 게 아니었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들었던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사람들의 험담 소리가 연이어졌지만 더 이상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버려졌다.’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머릿속을 핑글핑글 맴돌았을 뿐.

‘……그렇다고 그런 꿈을 꾸다니. 나란 녀석은 정말이지…….’

자조적인 기분에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상할 정도로 손이 저렸다. 고개를 내리고서야 나는 내가 이불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힘을 풀고 나니 그때부턴 손끝에서부터 가는 떨림이 일었다. 마치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제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 돈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어도?”

꺼질 듯 위태롭게 울리던 목소리를 상기하자 숨이 턱 막혔다.

‘정말 바보 같아.’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런, 악몽을 꾸신 건가요?”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기운에 날을 세웠기 때문에 칼을 휘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한 발짝 물러나 가볍게 그것을 피했다.

“이야, 생각보다 과격하신 분인데요?”

생글 웃는 목소리가 얼핏 낯익었다. 나는 여전히 경계한 상태에서 상대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머리끝까지 푹 눌러쓴 후드, 망토 사이로 드러난 단련된 장신의 체구. 분명 어디선가 봤던 모습이었다. 의아해하기를 잠시간, 나는 곧 그를 어디서 봤는지 상기했다. 얼마 전 소년에게로 날아간 단검을 가볍게 막아 냈던 남자.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신은…….”

왜 이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거지? 혹시 선실을 잘못 찾아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남자가 머리에 눌러쓴 후드를 걷어 냈다. 그러자 등진 달빛을 타고 그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위를 가득 채운 어둠보다 더 짙은 흑발,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에서 습하게 빛나는 적동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마족…….”

“하하, 맞추셨습니다. 역시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하긴, 흑발에 적안은 마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니까요. 그래도 제 눈동자 색은 조금 탁한 편이라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정령왕이라서 그런지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

내가 정령왕인 것도 알고 있다. 그저 우연히 접근한 게 아니란 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옆 침대에 있는 이사나와 카이테인부터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가 경계하는 기색을 뻔히 읽었을 텐데도 눈앞의 마족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친근한 어조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모든 마족이 흑발에 적안인 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정말 개성이 없다니까요. 근데 사실 이게 첨부터 이랬던 게 아니에요. 마족들이 쏘다니면서 사고를 치니까 신들이 이 저 빌어먹을 놈들을 피할 방법이라도 만들어 내라고 마신을 찾아가 징징 거렸거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알아보기라도 편하라고 색을 전부 통일시켜 버린 거죠. 그 전엔 마족들도 다양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지니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이렇게 개성 없는 꼴이 됐으니 참 애석한 일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건 됐고, 당신 누구예요? 왜 이곳에 있죠?”

“흐음,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그런 걸 궁금해하게 생겼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마족을 바라보았다. 생긴 건 멀끔한데 왠지 특이한 사고를 지닌 사람 같았다. 굳은 시선을 보냈지만 눈이 마주친 마족은 오히려 해맑게 웃었다.

“전 루카르엠이라고 합니다.”

“루카……르엠?”

“그냥 루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마계에선 미흡하나마 공작의 직함을 달고 있긴 합니다만, 이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별로 안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 찾아왔던 마족 데르온도 공작이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분명 공작은 마계에서 4명밖에 없는, 매우 높은 존재만 갖는 지위였다. 게다가 내 정체를 알면서도 단신으로 찾아올 정도면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어쩌면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누가 속을 줄 알고?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루카르엠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아뇨,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사실 직함만 공작이지 실제 하는 일은 정원사에 더 가깝거든요.”

“하?”

“정말입니다. 마계에 오시면 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바로 아실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이곳에선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아쉽네요. 언제 한번 기회가 된다면 마계로 모시고 싶군요. 혹시 마화라든가 마목들에 관심 없으십니까?”

“마화? 마목?”

“이런, 모르셨군요. 그건 마계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중간계에서 자라는 식물보다 훨씬 아름답고 화려하며, 무엇보다 아주 강하죠. 다만 키우는 방식이 좀 까다롭긴 한데…… 제가 그걸 참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요. 제 정원에 있는 마목들만 해도 수천 그루가 넘습니다. 이름도 전부 지어줬어요. 레베카랑 사라랑 프릴, 등등. 예전에는 레베카가 제 정원에서 제일 잘나가는 녀석이었죠. 근데 요즘 대세는 마릴다라고…….”

“저기요…….”

주절주절 이어지는 설명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꿈꾸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카르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실례. 제가 정원 얘기만 나오면 좀 이럽니다. 어디 보자, 제가 어디까지 얘기를 했죠? 일단 자기소개는 대충 끝낸 것 같고.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으셨던가요? 그건 마왕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명령?”

이제야 좀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아서 나는 내심 안도하는 한편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왕의 명령을 받아서 왔다면 절대 좋은 의도일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루카르엠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흠,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실은 제가 건망증이 좀 심해서요. 얼마 전의 일인데도 벌써 내용이 가물가물하네요.”

“…….”

“아니,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지금 막 떠오른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랬더라. 제 기억에 의하면, 물의 왕이 보호하고 있는 소년을 죽이라고 하셨던 것 같네요.”

“아, 그렇……네?”

너무 태평한 어조의 말이라 나는 잠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그러니까 물의 왕은 나고, 내가 보호하는 사람이라면…… 이사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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