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손에 쥔 메달에 힘을 강하게 밀어 넣었다. 그러자 부르르 떨리던 메달 속에서 파각!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마법을 실행하는 중심핵이 파괴된 듯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메달의 푸른빛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나 참, 어떻게 이런 짓을…….’
설마 이렇게 지저분한 술수를 부려 놨을 줄이야. 이제야 무스가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굴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엔딜이 거절해도 그에겐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살짝 혀를 찬 다음 다시 소년과 엔딜을 살폈다. 둘 다 얼굴이 매우 창백했지만 다행히 공기 막을 씌우는 게 늦진 않았는지 무사히 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소년의 몸에서 목걸이를 떼어 낸 후, 두 사람을 수면 위로 올려 보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끝까지 구조해서 데려가고 싶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띈다. 일단 물 밖으로 떠오르고 나면 나머진 배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예상대로 두 사람이 떠오르자 갑판은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왜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고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나선 것이다.
“큰일이야! 사고가 난 것 같아!”
“누가 저 두 사람을 끌어올려!”
선원들이 물에 뛰어들어 두 사람을 구하는 동안, 나는 갑판에 올라 남몰래 형체를 덧입었다. 마침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섞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조가 끝난 즉시 갑판은 응급조치를 하는 손길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숨은 쉬나?”
“다행히 살아 있어!”
“아이고! 도련님!”
그 혼란한 틈 속에서 나는 시종과 함께 소년의 곁에 붙어 있는 무스를 발견했다. 계획이 틀어진 탓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굳어진 상태였다(물론 다른 사람들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소년이 숨을 내쉬자 그는 더 굳은 표정으로 초조하게 소년의 품 안을 살폈다. 목걸이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그의 얼굴에 슬쩍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건져내는 도중에 물속에 빠트렸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걸 가만히 내버려둘 내가 아니었다.
“이걸 찾으시나 봐요?”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늘어트렸다. 무던히 돌아보던 그의 얼굴이 메달을 발견하는 순간 크게 일그러졌다.
“너…… 그걸 어떻게…….”
“콜록, 콜록!”
그때였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소년이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응급처치를 하던 소년의 시종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로……키…….”
다행히 소년은 금방 반응을 보였다. 창백하던 안색도 한층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시종은 펑펑 울면서 소년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왜 물에 빠지신 거예요?”
시종의 말에 멍해 있던 소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부지런히 가슴 부근을 더듬는 손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마법에 걸려 조종당했어도 그 순간의 기억까지 사라진 건 아닌 듯했다.
“나…… 나…… 목걸이가 갑자기…….”
“예? 목걸이요?”
의아해하던 시종은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바로 그때, 굳어 있던 무스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목걸이를 빼앗으려는 것이다. 목적이 뻔히 읽혔지만 나는 일부러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빼앗기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속도가 매우 느리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내게 닿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다리를 붙잡아 넘어트린 것이다.
쿠당탕!
“크억!”
무스를 넘어트린 사람은 놀랍게도 엔딜이었다. 언제 의식을 되찾았는지 그가 엎드려진 상태에서 무스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땅 밑에서 튀어나온 좀비를 보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씨발. 이 개 같은 새끼가…….”
새파랗게 질린 무스의 외침에 엔딜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자락을 쥐어짜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역소환의 충격을 다스리지 못해 온몸이 엉망진창일 텐데도, 눈빛만큼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곧장 무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야! 너 무슨 짓 했어! 씨발! 전부 다 불지 못해? 죽여 버리겠어!”
“엔딜! 진정해, 엔딜!”
“이거 놔!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하지만 소리치며 날뛰던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갑자기 무리한 탓에 몸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쿨럭!”
“이, 이봐! 엔딜!”
요란한 소동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스가 발목 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날카롭게 날을 세운 단도였다.
“위험……!”
깜짝 놀란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무스의 손에서 단검이 던져졌다. 그 궤적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소년을 향해 있었다. 나는 정체를 드러낼 각오를 하고 소년을 구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읏차!”
갑자기 구경꾼들 사이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더니, 날아오는 단검을 단숨에 낚아채는 게 아닌가!
“이런, 이런. 과격한 분이네요. 이런 물건을 함부로 던지면 위험하잖습니까?”
“……!”
그는 코 아래까지 깊숙이 후드를 눌러쓴 장신의 남자였다.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남자는 여유 있게 휘파람을 불며 잡아챈 단검을 공중에 던져 받았다. 그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선원들이 부랴부랴 무스에게 달려들어 그를 결박했다.
이후 사태는 무섭도록 빠르게 정리됐다. 선원들은 결박한 무스를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창고에 가뒀다. 아마 중간 정착지에서 경비대에게 넘길 것 같았다. 소년을 살해하려 한 증거품으로는 단검과 목걸이가 제출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년은 어느 귀족 가문의 사생아인 듯했다. 본래는 어머니와 함께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본가에서 불의의 사고로 후계자를 잃게 되면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스는 본가의 여주인 쪽에서 소년을 제거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마중을 나온 것처럼 교류해서 미리 친분을 쌓게 한 후, 틈틈이 죽일 기회를 엿봤던 것이다.
엔딜에게 접근한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그가 상급 정령사치고는 마나가 풍부하지 않다는 것까지 전부 다 감안해서 일을 꾸몄다. 이틀 간격으로 쉬었던 것이 그에게 엔딜이 지닌 마나의 한계치를 알려 준 셈이었다.
소년의 시종은 단검을 막아 준 남자를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무거운 기분으로 엔딜을 돌아봤다. 굳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소년은 앞으로 더 힘든 일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큰 시련이 엔딜에게도 다가와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올렸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미 예상했던 일임에도 마음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엔딜의 이마에서 인장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는 정령을 부를 수 없었다.
* * *
눈을 뜨자 익숙한 세상이 나를 반겼다. 골목마다 둘러쳐 있는 높은 담벼락과 굵은 기둥의 전봇대,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드리운 현대식 건물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한국에서 내가 태어나 자란 동네의 풍경이라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이곳이 꿈속이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인지했다.
‘이 동네는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이쪽의 일을 전혀 떠올리지 않게 됐다. 과거의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일부러 떠올리려 애쓰지 않는 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일상에서 멀어진 것이 된 건 확실했다. 마치 서랍 속에 담아 두고 필요할 때만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분명 지금의 내게는 좋은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보는 풍경을 두고도 그리운 감정보다는 떨떠름한 느낌이 더 앞섰다.
하고많은 과거의 장소 중에서 하필이면 집 근처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아무도 오가지 않는 텅 빈 골목길에 시선을 던졌다. 콘크리트로 대강 메운 듯 고르지 않은 바닥, 세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아담한 거리는 비탈진 산길처럼 하염없이 솟아올라 있었다. 둔덕마다 층층이 자리 잡은 주택들 사이로 낡은 상가의 모습이 듬성듬성 모습을 비췄다. 바로 그 너머 끝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
무의식적으로 더 뻗어 가려는 시선을 거두며 입술을 깨물었다. 학교를 오가며 매일같이 걷던 길목은 지금도 눈을 감은 채 걸어도 될 만큼 익숙한 것들뿐이다. 하지만 이 길을 걸었을 때 기분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지훈이 아니니?”
그 순간 또렷하게 들려온 음성에 나는 흠칫 숨을 멈췄다. 녹슨 기계처럼 덜컥거리는 고개를 들고 간신히 돌아보자 곧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보였다. 소름이 끼치도록 낯익은 모습들이.
“엄마…….”
한때 내가 그렇게 불렀던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그녀만이 아니었다.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나는 그 옆에 함께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낮게 심호흡했다.
“아버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소리를 뱉는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인 줄 몰랐다. 목구멍에서부터 시작된 불씨가 그대로 삼켜져 뱃속까지 전부 까맣게 태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여느 때의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숨이 멎어 싸늘해진 나를 볼 때마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 시선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니, 이러면 안 돼.’
빠르게 추락하는 기분을 다잡으며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전부 끝난 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기억들에 얽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내 부모가 아니었고,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었다. 난 강지훈이 아니라 엘이니까.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도, 외면할 필요도 없어.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두 손을 그러잡으며 웃었다. ‘괜찮아, 이건 꿈이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니 가슴이 한층 진정되는 것 같았다.
“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떠밀리듯이 내뱉은 말이 더 짙은 확신이 되어 안도감을 줬다. 나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피하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아서일까, 두 사람의 얼굴에 희미하게 동요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자 조금 더 태연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가족이란 걸 동경했어요.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곳에 제 자리는 없었죠. 어렸을 땐 무조건 절 미워하기만 하는 두 분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안다고?”
되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희미했다.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던 그녀의 약한 모습에 날 선 기분도 한결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명계의 신이 전부 알려 줬어요. 부모님이 절 싫어한 건 제 잘못이 아니라 그곳에 제 운명이 없었기 때문이래요. 그러니까 전 두 분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 같은 거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응, 정말이에요. 두 분도 운명에 없는 자식을 만나는 바람에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으로 평생 괴로워하셨죠. 어떻게 보면 저보다 더 심한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에 관한 건 모두 잊어버리시고 이제 그만 행복해지세요.”
“지훈아…….”
지금 엄마의 표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조금쯤은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고 있을까?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전 지금 행복하거든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제게 친절해요. 양아버지도 생겼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존재도 생겼어요.”
“그들이 네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그럼요. 이곳은 진짜 제 자리인걸요.”
“어쩜 너란 아이는…….”
안타깝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더 환하게 웃으려고 했다. 처음으로 그들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찰나였다.
“―정말 한결같이 멍청한 소리만 하는구나.”
삽시간에 엄마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어깨가 저절로 떨릴 정도로 차갑고 독기 어린 음성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제야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아무것도 없을 때 드러나는 거야. 할 수 있는 것도, 주어진 것도 하나 없는 아주 보잘것없는 상태일 때 말이지. 그래, 가령 예전의 강지훈 너의 모습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지금 너를 봐.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의 넌 매우 아름답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어. 그런 널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건…….”
“운명이 없어서 미워했다고?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란다. 아마 예전에도 네가 지금 같은 모습이었다면 나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경멸하진 않았을 거야. 왜냐면 사람은 모두 아름다운 것에 관대해지거든. 운명이니 제 자리니 하는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말이야.”
“…….”
“너도 이상하게 생각했잖니? ‘너의 진짜 자리’인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네 얼굴이 가려져 있으면 무시하거나 험상궂게 굴었지. 하지만 네 외모와 능력을 보고 나면 모두 늘 관대해졌어. 그게 무슨 뜻인 것 같니? 결국 넌 아름다운 껍데기를 뒤집어써야만 사람들 앞에서 빛날 수 있다는 얘기지. 즉, 본질을 가려야만 한단 말이야.”
“……본질.”
“그래, 본질. 트로웰은 왜 네게 다정할까? 이사나가 널 따르는 이유는? 라피스가 왜 너와의 계약을 원했지? 왜 네 양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널 그 자리에서 아들로 삼았는지,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진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젠 존재할 리도 없는 그것이 마치 온몸을 장악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날카로운 음성은 그것마저 뚫고 파고들었다.
“잘 생각해 보렴, 지훈아.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야.”
“……그만.”
“넌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거란다.”
“그만!”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만약 네가 정령왕이 아니었어도, 그들이 널 사랑했을까?”